1편

2편

3-1편

3-2편

4-1편

4-2편


1.

"무슨 얘기요?"


조금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귀찮은 것에 걸렸다는 듯한 약간 짜게 식은 시선이 뒤를 이었다.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대낮부터 무작정 술을 마시다 갑자기 자기 얘기를 들어달라는 남자.

분명, 엄청나게 시간만 잡아먹는 일일테니까.

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서도, 정우의 입은 바싹 말랐다.


"미안한데요, 아저씨. 저 이거 말고도 알바 하나 더 남았거든요? 다음에 들어줄게요."


어느정도 예상한 것처럼, 거절의 표시가 담뿍 담긴 말을 꺼낸 여자가 돌아섰다.

은근슬쩍 참견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깊게 개입하는 것은 싫다 이건가.

하지만, 더이상 이것 저것 잴 상황이 아니었던, 정우는 황급히 그녀를 다시 불러 세웠다.


"저기요!"


"아, 됐다니까요. 일 없어요~"


"오 만원!"


한 손을 쫙 펼쳐보이며, 외치는 정우의 말에 여자의 발이 딱 멈췄다.


"오, 오 만원. 제 얘기를 들어주면 바로 드릴게요."


"진심이에요?"


기분 나쁜 듯, 샐쭉 찢어진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괜히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정우의 입은 더욱 빨라졌다.


"어디서든 상관 없어요! 여기서 들으셔도 됍니다! 그저 제 이야기만, 그저 이야기만 들어주시면 돼요..."


실수였을까.

다음 아르바이트가 있다기에, 무턱대고 돈 부터 외치는 것은 실언이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과열되는 느낌이었다.

핑 돌 정도로 과한 생각은, 어느새 상상을 뛰어 넘어 망상의 영역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갑자기 돈을 주겠다는 영문 모를 남자.

의심 받기에는 차고 넘쳤다.

정말 까딱하면 성매매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자 정우는 눈조차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실수였을까' 라고?

아니, 명백히 실수다.


"미, 미안해요...기분 나쁘셨죠. 죄송합니다."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했다.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서 큰 실례를 저질렀다.

술을 먹은 것보다 얼굴이 더욱 뜨겁고 화끈 거렸다.

정우는 제 자신이 너무 못나서 죽어버리고 싶은 느낌이었다.


"하아."


횡설수설하다 이제는 직각에 가까운 정우의 사과를 보며,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로에게 찾아오는 약간의 침묵.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나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진짜, 폭탄도 이런 폭탄이 없네. 씨이..."


정우에게 하는 말 인듯, 짜증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여자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요즘같은 스마트폰 시대와는 조금 괴리감이 느껴지는 구식 폴더 폰의 숫자패드를 몇 번 누르는 모습.

역시 경찰을 부르는건가 싶어, 정우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그런데.


"아, 언니. 저에요. 오늘 저 못 갈 것 같아서요...네, 몸이 좀 안 좋아요. 네, 죄송해요~ 다음에 대타 뛰어드릴게요."


상황이 조금 묘하게 돌아갔다.

아무리 그래도, 경찰을 언니라고 말하진 않을테니까.

엿듣는 취미는 없었지만, 거리가 가까웠던지라 어느정도 통화의 내용을 들어버린 정우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화를 끊은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퉁명스러운 표정은 여전했지만, 방금의 진심어린 사과를 본 뒤부터는 얼굴이 조금 풀어져 있는것 같았다.


"뭐요?"


그 허락같지도 않은 허락에, 정우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정말 감사합니다!"


"아, 됐고 괜히 호들갑 떨지 마요. 쪽팔리게..."


그렇게 말하며, 유리문 너머의 판매대로 시선을 향하던 여자가, 이내 엄지로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일단 딴 데 가요. 점장 입이 워낙 싸서, 이런거 보면 못 참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정우는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정말 감사해요. 그..."


"수진."


금세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여자.

수진은 잊지 말라는 듯 말을 이었다.


"오 만원 잊지마요. 그리고 당연히 시간당으로 치는거겠죠?"


"...예?"


생각보다, 돈이 많이 급한 모양이었다.







2.

인근의 카페.

어떤 것도 괜찮으니 다 시키라고 말했지만, 의외로 수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만 시켰다.


"이게 무슨 삼천 오백원이야...진짜 드럽게 비싸네."


손에 들린 아메리카노 잔을 빨대로 휘적대며, 중얼거리던 수진이 그것을 한 모금 입으로 들이켰다.

절약이 생활에 배어있는 말투.

아까의 그 휴대폰도 그렇고, 나이에 비해서는 굉장히 검소한 성격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얘기가 뭔데요? 빨리 말해봐요. 아 물론 늦어져봐야 나는 상관없지만."


시간당 오 만원.

기왕 받아낼 거, 아주 한 방울도 안 남게 뽑아먹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정우가 저도 모르게 핏 웃음을 지었다.


"왜, 왜요. 뭐가 웃겨요?"


"아, 아니에요."


돈만 밝히는 여자로 보이는게 싫은지, 약간 얼굴이 붉어진 수진의 입이 샐쭉 찢어졌다.

그럴거면 시간당이라는 말은 왜 꺼냈니.


"흠."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좀 더 그런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 받아도 되지만, 허리까지 숙여가며 여기까지 온 목적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말을 꺼내기 전, 헛기침을 하며 조금 진정한 정우가 천천히 옛 기억들을 수면 위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맥주는 반 잔도 안 마신데다, 그마저도 카페까지 걸어오며 술기운은 진작에 흩어졌다.

기억은 또렷하다.

좋아.


"수진씨, 어제 저한테 여자친구랑 헤어졌냐고 물어봤던 말 기억나죠?"


"네."


예상했다는 듯, 즉답이 돌아왔다.

그것 때문에 대낮부터 술을 까며, 죽어버릴 기세로 들이부었으니, 그 얘기가 아니면 굳이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었으며, 말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정말 술이 좋거나, 아니면 지독한 현실을 술로 잠시나마 잊고 싶은 것이거나.

정우는 후자였다.


"오 년 전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스물 넷...정도 되었을 일이네요."


"흠, 네."


"그 여자와의 첫 만남은, 음...저도 수진씨 처럼 똑같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때 였었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그간의 일들을 천천히 수진의 앞에 늘어놓았다.

물론 구구절절히 꺼내면서도, 의식적으로 정희수라는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너무 유명하니까.

편의점에서 술이나 까고 있던 남자와 결혼까지 했었다는 것이 아무리 사실이래도, 믿어줄래야 믿어줄 수도 없는 얘기일 것이다.


한 시간.

두 시간.

제법 기억하고 있는게 많아서, 말하는 사이 시간은 훌쩍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신경한 태도로, 듣네 마네 고개만 끄덕이던 수진은, 어느새 정우의 얘기에 빨려들어가듯 한마디 한마디 경청하는 자세로 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아."


"그래서요? 네? 다음은?"


입을 다물자, 곧장 재촉과 함께 깜빡이는 것 조차 잊은 눈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빨리 입을 열라는 듯이 독촉하는 눈빛이, 마치 그대로 잡아먹을 기세인지라 정우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그녀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너무 가까워.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에?! 앗..."


아쉬운 외침을 토해내기가 무섭게, 입을 가린 수진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자기가 생각해도, 제법 큰 소리로 외쳤는지, 몇몇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며, 부끄러운 듯 얼굴을 푹 숙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쉬운듯 수진은 간절한 눈빛으로 정우에게 무언의 메세지를 보냈다.


다음 이야기를 달라.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네 시간이나 지났어요. 커피 한 잔으로는 좀 눈치가 보이네요."


"아..."


수진이 시선을 돌려, 직원들을 바라보자 약간은 곤란한듯한 미소를 짓고있는 얼굴이 들어왔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다.

유리로 된 벽 너머, 어느새 해가 떨어져 어두워진 밖까지 보고 나서야, 결국 수진이 어쩔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나, 재밌었나.

정우로서는, 괴롭고 피 말리던 우울한 기억이었던지라, 더 듣고 싶어하는 수진의 모습에 조금은 괴리감을 느끼며 마주 일어섰다.


딸랑.


"안녕히 가세요~"


카페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거리로 나서자, 선선한 밤바람이 이마를 쓸었다.

답답하던 가슴 속의 응어리.

그 어찌할 수도 없이 무겁게 짓누르던 것들이 바람을 타고 쓸려나가는 기분이었다.


후우.


숨을 깊게 들이 내쉰다.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 행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것처럼, 그것을 여러번 오랫동안 반복했다.

그런 개운함이라는 것은 오랜만이기에.


"저기, 아저씨."


"네?"


정우의 그 일련의 행동을 바라보던 수진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간의 얘기들.

그 오 년의 기억들의 처절함, 슬픔 등을 들어서일까.

괜시리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미안한듯, 쭈뼛거리는 태도였다.

그리고 정우는 수진이 어째서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금세 눈치챘다.


"계좌 불러봐요. 바로 드릴게요."


"에헤...조금 미안하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달달 외운듯 막힘없이 그 긴 숫자를 부른다.

네 시간.

이십 만원.

하지만 정우가 휴대폰으로 누르는 숫자는 조금 달랐다.


"조금 더 넣었어요.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수진 씨."


"우앗...진짜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 앞에서 휴대폰을 들은 수진이 곧장 폰뱅킹을 통해 금액을 확인했다.

아무리 급하다고는 해도, 조금은 짠해보이는 모습에 정우는 핏 웃음을 흘렸다.


"에? 뭐라고? 오십...? 다시 듣기. 오십?! 다시 듣기...진짜 오십?"


ARS의 음성을 듣고도 믿기지 않는지, 여러번 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웃음이 짙어졌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

그것이 썩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제, 가볼게요. 수진 씨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그렇게 말하며, 한결 가벼워진 발을 돌렸다.

그 응어리를 덜어내서 그런가, 그 곳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지어지지 않던 미소가, 지금은 사소한 일에도 제법 잘만 튀어나왔다.

이제는 뭘 해볼까.

짐을 덜어낸, 이제는 순수하게 자신을 위해 할 일들을 고민할 차례였다.

일단 배고프니 밥 먼저 먹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아저씨!"


걸음을 붙잡는 소리였다.

뒤를 도니, 아까처럼 우물쭈물하는 얼굴을 짓고있던 수진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그, 휴대폰 줘 봐요."


"예?"


갑작스런 요구에, 되묻자 수진이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아직, 다 안 끝났잖아요, 그 얘기. 궁금하니까...더 듣고 싶다구요."


"아, 괜찮은데..."


"제가 안 괜찮으니까, 일단 빨리 휴대폰 줘요!"


빽 외치고는, 이내 정우의 손에 쥐어있던 휴대폰을 대뜸 가져갔다.

딱히 필요 없어서 잠금조차 되어있지 않은 그 스마트 폰의 액정을 몇번 두들기더니, 다시 건네주자, 연락처에는 새로운 번호가 들어차 있었다.


"이 카페, 밤에도 열거든요? 알바 마치면 여덟 시 쯤 되니까...그 내일..."


"알겠어요. 그럼 내일 보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눈치챈 정우의 대답에, 수진의 얼굴이 확 피었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조금은 쑥쓰러운 걸까.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린, 수진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모습을 보던 정우는, 이내 미소와 함께 수진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아무래도 조금은 더 얘기를 꺼내야 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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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마저 쪄왔다...

따끈할때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