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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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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세훈
吳世勳 | Oh "Gambling" Se-hoon
프로필
출생
1961년 1월 4일 (63세)
거주지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2]
소속 정당
현직
재임 기간
제33-34대 서울특별시장
2006년 7월 1일 ~ 2011년 8월 26일
제38·39대 서울특별시장
2021년 4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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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장녀 오주원
차녀 오승원
부모
아버지 오범환(吳範煥)[4]
어머니 사문화(史文華)[5]
형제자매
여동생 오세현[6]
배우자
송현옥[7]
본관
해주 오씨[8]
학력
서울미동국민학교[9] (졸업 / 65회)
중동중학교 (졸업)
중동고등학교 (전학)[10]
대일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법정학부 (법학 / 1학년 수료)[11]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12] / 석사[13])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14] / 박사[15])
종교
가톨릭 (세례명 : 스테파노)
신체
181cm, A형[16]
지역구
강남구 을[16대]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약력
제26회 사법시험 합격
제17기 사법연수원 수료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 겸임교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환경위원[18]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강남구 을 / 한나라당)
한나라당 최고위원
제33-34·38대 서울특별시장 (민선 4·5·7기)
미국 예일대학교법과대학원 교환교수
바른정당 최고위원
고려대학교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석좌교수
국민의힘 광진구 을 당협위원장

1. 들어가기 전에2. 개요3. 상세4. 일생
4.1. 정치 활동4.2. 민선 4·5기 서울시정
4.2.1. 사퇴
4.3. 사퇴 이후4.4. 민선 7기 서울시정4.5. 8회 지선4.6. 민선 8기 서울시정
5. 평가
5.1. 서울시정5.2. 대권주자로써
6. 둘러보기

1. 들어가기 전에 [편집]



지옥에 있는 노무현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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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요 [편집]

“안녕하세요. ‘정치 바보’ 오세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세훈 시장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킹세훈란, 대한민국의 자유보수주의 성향 정치인으로, 일명 서울의 다이묘이다. 소속 정당은 국민의힘.

헌정 사상 최연소 민선 서울특별시장[19]이자 최초의 재선 서울특별시장이었지만, 도박에 빠져 모든 걸 잃고 심지어 드루이드에게도 패배의 아픔을 겪으며 퇴물로 전락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원숭이가 원숭이 바위 쪽으로 간 뒤,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가 열리게 되며 안철수, 나경원 등과 함께 서울시장 후보군으로 꼽히게 된다. 직후 2030과 이준석을 비롯한 중도보수 진영에게 집중적으로 지원받으며 최종적으로 중도-보수 진영의 서울시장 후보로 확정되었고, 본선에서 보쿠 에이센 후보를 제치며 10년만에 서울시장 자리를 되찾게 되었다.

3. 상세 [편집]







누가 뭐래도 범보수 진영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 서울 25구 425개 행정동에서 모두 승리한 유일무이한 서울시장이다.

2022년 기준, 보수정당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이자, 민주당 측에서도 가장 경계하는 인사라 할 수 있으며, 강성 보수층과 노년층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홍준표 등의 대권주자와는 달리 연령대 상관 없이 호감도가 높은 정치인이라 사회 채널 내에서도 지지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유명 변호사로 활동하며 유망주로 꼽히게 되었고, 16대 총선 때 이회창에게 영입되어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역임한다. 16대 국회 내에서 남원정과 함께 당 내 소장파의 대표주자로 활동하며 강력한 정치자금법을 통과시키며 '차떼기당'이라 불리던 한나라당의 오명을 씻겨내기도 했다. 그러다 16대 국회가 종료되자 그대로 잊혀지는 줄 알았으나, 2006년 지선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냈고, 열린우리당 강금실을 꺾으며 서울시장에 당선된다.

당시 오세훈이 서울시장으로 있으면서 중국 사회과학원 도시 경쟁력 지수는 세계 27위에서 9위로, 광역자치단체 청렴도는 15위에서 1위로 상승한 성과를 보여줬고, 재선에도 성공하며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서울시 무상급식을 강하게 밀어붙혔고,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은 이를 저지하려 하게 된다. 그러다 오세훈이 제대로 자살꼴을 넣게 되는데, 국민 투표를 통해 무상급식 찬성이 높으면 본인이 사퇴하겠단 것이었다.

민주당은 좋다구나 하면서 아예 투표 거부 운동을 벌였고, 투표율의 저조로 투표안 자체가 부결 되어버리며 그대로 궁지에 빠져버리게 되었고, 끝내 사퇴를 강행하며 역대급 흑역사를 남기게 된다.

그리하여 약 10여년 간 야인 생활을 하게 되며, 간간히 차기 대권주자로 언급되긴 했지만, 문재인홍준표 등의 유력 정치인들에 밀려 완전히 묻혀버렸다.

20대 총선에서는 종로구에 출마해 원내 복귀를 노리게 된다. 상대는 정세균. 당시 여론조사 상으로는 오세훈이 우세했지만, 실제 결과는 여조가 완전히 뒤집힌 채 정세균의 승리로 끝나며 정세균만 대권주자 급으로 올려준 채 실패로 끝나게 된다.

19대 대선에서는 불출마했고, 자유한국당 당 대표 경선에 참여했지만 황교안에게 밀려 또 떨어졌다. 심지어 21대 총선에서는 '정치 신인' 골빈정에게 밀리며 나락에 나락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세훈을 이어 서울시장이 됐던 박원순이 넥타이로 목 메고 노무현 따라가며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가 열리게 됐고, 서울시장 후보군으로 간간히 언급되기 시작하다가 나경원을 제치고 국힘 서울시장 경선에서 승리하며 국힘 공천권을 따냈고, 따로 출마를 준비하던 안철수, 금태섭 등과의 단일화에도 성공하며 중도-보수 서울시장 후보로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4월 7일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서울시장으로 복귀했다. 역대 서울시장 당선자 중 최고 득표수 또한 경신한 건 덤. 결국 오세훈의 정치인생을 건 사실상 마지막 승부수는 권토중래를 거두며 대성공으로 끝이 났다. 이 때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서 지난 고생길이 스쳐지나갔는지 한동안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 화려한 복귀 한 방으로 차차기 대권주자와 보수정당 암흑기 탈출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차기 대선 정국에서도 보수 야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직후 8회 지선에서 송영길을 꺾고 4선에 성공하며 대권주자로써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4. 일생 [편집]

4.1. 정치 활동 [편집]

4.2. 민선 4·5기 서울시정 [편집]

4.2.1. 사퇴 [편집]

4.3. 사퇴 이후 [편집]

4.3.1. 2022년 재보궐선거 [편집]

4.4. 민선 7기 서울시정 [편집]

4.5. 8회 지선 [편집]

4.6. 민선 8기 서울시정 [편집]

5. 평가 [편집]

5.1. 서울시정 [편집]

5.2. 대권주자로써 [편집]

6. 둘러보기 [편집]

[1] 네이버 인물 정보와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서울특별시 성수동 출생으로 되어있고, 오세훈 본인도 자신을 서울 달동네 판자촌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서울 출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전라남도 담양군 출생이라는 모 언론사의 기사에 대해 오세훈 측은 왜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부인했다. 1995년광진구가 성동구에서 분리되어 신설되었으며, 본인은 어린 시절을 (당시에는 성동구 소속이었던) 뚝섬한강공원 일대에서 보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 일대에는 경마장이 있었는데 말똥 냄새 때문에 기피지역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경마장 부지에 서울숲이 생기고, 갤러리아 포레, 트리마제 등으로 부촌이 되었다. 성수동에서 산 기간이 길지는 않은 듯하다. 가세가 기울어 서울 빈민촌 곳곳을 돌아다녔고, 전학을 3번이나 갔다고 한다.[2] 임기가 짧은 관계로 취임 후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시장 공관을 사용하지 않고, 자양동 자택에서 출퇴근한다고 한다. 기사[3] 서울시립대학교 운영위원장은 서울특별시장이 당연직으로 겸직한다.[4] 1935~2019.01.08[5] 청주 사씨 (靑州 史氏) 사수학 (史琇學, 1904. 5. 2 ~ 1985. 5. 19)의 다섯째 딸이다. 1938년 10월 5일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태어났다. 이후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건강 악화로 인해 상주로 귀향했다.[6] 20대 총선 당시 더불어민주당에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하고 면접까지 봤으나 자진철회했다.[7]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교수[8] 추탄공파 13세손, 시조 27세손 世◯ 항렬[9] 집이 가난해서 전학을 여러 번 다녔다. 전곡국민학교, 삼양국민학교, 그리고 부산 광복동에서 국민학교를 다닌 경험도 있다고 한다.#[10] 전학을 갔지만 중동고 개교 100주년 행사에 참여했을 정도로 인연이 있다.[11] 고려대학교에 신입학이 아니라 편입학했기 때문에 학적상으로는 중퇴 처리가 되었지만 편입생은 전적대 학적도 유효하기 때문에 1학년 수료로 기재한다.[12] 상법 전공[13] 논문: 少數株主에 대한 抑壓과 救濟策 : 美國 閉鎖會社의 法理를 中心으로 (1990)[14] 민사소송법 전공[15] 논문: 美國 辯論前節次에 관한 硏究 : 高費用.低效率의 改善을 중심으로 (1999)[16] 출처[16대] [18] #[19] 초선 임기가 시작된 2006년 7월 1일 당시 45세였다. 관선까지 포함한 역대 최연소 서울특별시장은 김형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