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이 잠자는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살포시 감긴 눈꺼풀과 단아하게 말려올라간 속눈썹, 살포시 벌어진 입술은 복숭아의 갈라진 틈새처럼, 조금 상기된 볼은 귀엽게 꾸며진 인형처럼.

그 얼굴을 감싸는 것은 황금빛 햇살일까, 아니면 햇살처럼 찰랑이는 웨이브진 금발 머리카락일까.

아무렴, 잠자는 이 아리따운 공주님은 왕자님의 입맞춤 없이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인형이라도 되어버린듯 했다.


하지만 만물이 깨어나는 시작의 계절이 왔기 때문일까.

왕자님을 대신해서 소녀의 머리카락을 꼭 닮은 봄날의 햇살이 입술을 어루만져주자,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것 같아보였던 눈꺼풀이 들어올려졌다. 의외로 공주님은 조금 차가운 눈매를 가지고 계셨다.


서늘한 푸른 눈동자에 처음 들어온 것은 반투명한 하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일광. 조금 빛에 익숙해지고 보이는것은 새싹이 돋은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리고 떠오르는 봄의 절기.


새하얀 시트에서 몸을 일으켜 닫혀있던 창문을 열자, 사뿐한 봄바람을 타고 아직 여린 생명의 내음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흔들리는 순백의 커튼이 새 생명에 손짓하고, 떠나간 동장군에게 작별을 보내는듯 하다.


그에 화답하는듯 소녀의 손가락이 까딱거린다. 그러면서 열 손가락에 끼워진 순은의 반지들이 햇살을 반사한다. 그리고 소녀와 비슷한 차림새의, 하지만 그저 푸근하고 귀여운 인상의 작은 인형이 소녀에게로 날아왔다.


"앨리스, 좋은아침이야!"


인형은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반겨준다.

뒷머리를 장식한 붉은 나비리본이 날갯짓한다.


"좋은아침, 상하이. 오늘은 날씨가 정말로 좋네."


"응응! 드디어 차가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어! 그러니까 오랫만에 피크닉에 나가자!"


"어머나, 정말로 밖에 나가기 좋은 날이긴 하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어쩌나?"


"정말, 이런 날에 밖에 나가지 않으면 손해라고! 앨리스도 한번씩 바깥 나들이를 나가야지 맨날 그렇게 방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안된다고!"


"음, 그것도 그렇네. 하긴 이런 날에 햇빛을 쬐어주지 않고 그늘에만 있으면 어떤 도서관의 숙주나물처럼 되어버릴테니까. 그러면 상하이, 호라이랑 같이 소풍준비좀 해주렴. 간단하게 샌드위치랑, 바구니, 돗자리정도면 될것같네."


"응응! 샤샤샥 준비해서 얼른 나가자고!"


방 밖으로 나가는 상하이 인형. 그러나 상하이가 처음 들어올 때 부터, 대화하는 내내, 심지어 나간 뒤에도, 엘리스의 손가락은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앨리스는 눈을 감고 창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즐기면서도 계속해서 손가락을 놀리고 있다.


"찬장에 남은 빵은 충분하고... 딸기잼, 아! 꿀이 있었네. 오이, 양상추는 물에 담궈두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동시에 상하이 인형은 샌드위치를 준비하고, 호라이 인형은 창고에서 바구니를 찾아오고, 프랑스 인형은 먼지떨이를 흔들고, 러시아 인형은 창문을 닦고, 런던 인형은 바닥을 쓸고, 오를레앙 인형은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둔다.

잠자는 공주님의 집은 자신과 꼭 닮은듯 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의 금발의 인형의 집이었다. 인형들의 공통점은 모습만이 아니었다. 모두 희미한 푸른빛의 실에 묶여있었다.

이것은 마나로 짜여진 실. 또는 염사는 마치 거미줄과도 같이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실 너무 가늘어서 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고 너저분한 느낌도 없다. 그리고 거미줄의 중앙에는 소녀의 열 손가락이 자리잡고 있다.


이 인형의 집은 소녀의 집, 공주님의 성, 인형사의 공방.

칠색의 인형사 앨리스 마가트로이드는 셀 수 없이 많은 인형들의 움직임을 동시에 다루면서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그저 상쾌한 봄바람 속의 생명의 기운을 만끽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형들은 모두 실에 묶인 꼭두각시(마리오네트). 자신 역시 먹지도 늙지도 않는 마녀.

이 인형의 집에는 생명이 없다. 그렇기에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는 이 순간이 좋다.


어느덧, 붉은 머리띠부터 리본으로 장식된 푸른 드레스에 어께를 덮는 하얀 케이프까지 걸친 인형사는 상하이 인형이 준비해준 소풍세트를 들고 집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청소를 마친 인형들은 거실에 마련된 선반에 차곡차고 앉아있고, 상하이 인형과 호라이 인형은 공중에 뜬 채 앨리스의 뒤를 쫒는다.


그렇게 생명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인형의 집은 차갑게 가라앉고, 인형사는 복화술을 말동무삼아 경치 좋은 장소를 찾아나선다.




봄이 왔건만, 이 친구없는 마녀에게는 언제쯤 봄이 찾아올까.


"봄이에요~ 봄이 왔어요~"


그것은 봄을 알리는 저 요정조차 알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