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밤 12시 16분.

바깥은 어두웠다.

홀로 불이 켜진 방에서 나는 노트북을 켜고 거기에 비춰지는 문구를 바라보았다.



PLUS 가입기간: 2022/1/25 01:23~2022/2/25 01:23



한 달 전에 노벨피아 플러스를 신청했다.

월 9900원, 그리고 바로 해지했다.

한 달간 얼마 없는 시간을 내서 소설을 읽으려고 했다.

매일 들어가서 온갖 소설을 읽었다.

재미없는 것도 있었다. 감동적인 작품도 있었다.

하루 한 작품은 읽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양이 너무 많아서, 읽다가 관둬서, 일이 바빠서.

결국 한 달이 다 되어 가지만 읽은 작품은 15개 정도였다.

아직 안 읽은 선작이 많은데, 구독을 해지했으니 앞으로 두 달간은 가입하지 못한다.






이렇게까진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배려해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세상을 배려할 필요가 있을까.






사이트에 들어가 선작해 둔 소설을 열었다.

재미있게 읽은 소설도 열었다.

전부 합하니 50개 정도 됐다.

바탕화면으로 가서 전에 받아둔 노벨추출기.exe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링크를 붙어넣는 창이 떴다.

열어둔 소설 하나의 링크를 붙어넣고 추출 버튼을 눌렀다.

총 216화짜리 완결소설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바탕화면에 새 폴더가 생겼다.

안에는 번호가 붙은 216개의 텍스트파일이 들어 있었다.

001.txt라는 이름의 파일을 열자 그 소설의 1화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에 작가의 말까지 같이 있었다.






다음으로 216.txt파일을 열었다.

마지막화였다.

마지막에 적힌 (끝)이라는 단어가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대로 cmd를 열어 텍스트 파일이 들어있는 폴더를 지정했다.

type *.txt > merged.txt를 치자 잠깐 수많은 명령어가 출력되더니 모든 텍스트가 합쳐진 merged.txt 파일이 생겼다.

하지만 용량이 이상했다.

분명 원래 파일들을 합친 용량은 2.3메가 정도였는데 합친 용량은 4.6메가, 두 배였다.

해당 파일을 클릭해 (끝)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해당 단어는 파일의 중간 위치에 있었다.

끝이라는 단어 바로 뒤에 다시 소설의 프롤로그가 적혀 있었다.

뭔가 오류가 있어서 같은 텍스트가 두 번 적힌 것 같았다.

중복된 문장을 통째로 지우고 저장하자 비로소 완전한 텍본이 됐다.






성공했다는 걸 알자 바로 프로그램에 다음 소설 주소를 집어넣었다.

65화짜리 완결소설.

곧 64개의 텍스트파일이 나왔다.

하나가 빠져 있었다.

링크를 타고 소설 회차를 살펴보았다.

작가 후기가 BONUS회차로 되어 있었다.

보너스 회차는 추출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차피 무료로 볼 수 있으니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이번에도 cmd를 이용해 텍스트를 병합했다.

원래는 724kb짜리 소설이었는데 1.5메가로 불어 있었다.

열어보니 이번에도 텍스트가 중복되어 있었다.

수정하고 저장했다.






시계를 보자 5분이 지나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지금은 12시 22분, 앞으로 1시간 안에 소설 50개의 텍본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반복했다.

소설 주소를 넣고, 병합하고, 중복된 텍스트를 지웠다.

1시 10분이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병합과 텍스트 지우는 건 뒤로 미루고 일단 추출부터 했다.

이윽고 'PLUS 가입기간이 아닙니다.' 문구가 뜰 때쯤엔 50개의 merged.txt 파일이 각 폴더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텍스트파일을 열어 소설 제목을 확인하고는 파일 이름을 일일히 바꿨다.

한참을 건드리자 이윽고 모든 파일이 자기 이름을 찾았다.

파일을 핸드폰에 넣고 컴퓨터를 끈 후 이불 속에 들어갔다.

파일 탐색기에서 폴더에 들어가자 텍스트파일이 정렬되어 있었다.

파일을 누르자 소설이 열렸다.

원래라면 당분간 보지 못하게 됐을 소설이, 인상 깊어서 두고두고 보고 싶었던 문장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그대로 밤새 소설을 읽어나갔다.













전에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텍본을 만드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만원 내고 사이트에 들어가 텍스트를 추출해서 핸드폰에 넣고 다니는 건 죄가 아니다.

이걸 소설 공유 사이트에 올리는 순간부터 죄가 된다.

그럴 생각은 없지만.






나는 소설을 추출할 때 작가의 말까지 같이 추출했다.

작가가 후기에 쓴 {독자닉네임} 기능 때문에 이걸 올리면 내가 바로 특정된다.

일일히 지우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서까지 올리고 싶지는 않다.

난 그저 순수하게 텍본 그 자체를 원한다.

만약 시간이 넉넉해서 선작을 전부 읽었더라도 텍본을 만들었을 것이다.












과거에 소설이란 종이책으로만 존재했다.

서점에 가서 돈을 주고 책을 사면 그때부터 책은 자신의 것이 되었다.

책장에 꽂아놓고 생각날 때마다 볼 수 있었다.

감명깊은 문장이 있으면 줄을 그어놓고 한참을 곱씹으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웹소설이 나오고서는 바뀌었다.

사람들은 웹소설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책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이전부터 책이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공원에서, 가방 안에 넣어둔 책을 꺼내 펼치고 글자를 읽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10년 전에는 다들 지하철에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을 뿐이다.

소설은 형태를 바꾸어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지만, 종이책을 소장하던 시절의 감성은 영원히 사라졌다.






웹소설은 가질 수 없다.

출판되지 않으니까.

책장에 꽂아놓고 소장감을 느낄 수 없다.

우리는 소설 사이트에 들어가 읽고 싶은 소설을 찾아가야 한다.

인터넷이 끊기면 소설과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사라진다.

평생 매달 9900원을 내고 일시적으로 빌려 읽으며 언젠가 이 작품이 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






텍본은 오늘날 사람들이 가지는 소장 욕구에 대한 뒤틀린 형태의 해결책이다.

텍본은 소장할 수 있다.

인터넷이 끊겨도 볼 수 있다.

정기결제가 끊겨도 볼 수 있다.

인상깊은 문장이 있으면 며칠 후에도, 몇 년 후에도 다시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 습작으로 돌려도 핸드폰 속의 txt파일은 영원히 남아 있다.













그렇기에... 난 텍본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