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https://arca.live/b/writingnovel/45491185?category=%EC%86%8C%EC%84%A4&p=1


엘라이자가 다시 일어났을 때, 여러 가지가 바뀌어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달라진 환경은 배제하고, 가장 먼저 느낀 변화는 자신이 차갑고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 대신 푹신하고 따뜻한 안락의자에 앉아 잠에서 깼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자 흐릿한 형체 뿐이었던 주변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천장이 높고 고급스러운 벽지가 발라진, 귀족적인 품위가 느껴지는 방에 있었다. 그녀가 자세를 고쳐 앉자 바닥에 깔린 호피무늬 러그가 그녀의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엘라이자는 문득 그것이 진짜 호랑이 가죽인지 궁금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방금 그 털에 발이 닿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일텐데.


그녀가 앉은 안락의자의 앞에는 귀퉁이가 섬세하게 조각된 마호가니 책상, 그 너머에는 벽에 걸린 액자와 금색 손잡이가 달린 문이 보였다. 액자 안에 든 그림은 나체의 여자가 온몸에 거대한 뱀을 두르고 사과를 먹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으며, 그 속 그림자에 감싸져 있지 않은 여자의 날카로운 눈이 왠지 모르게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갑작스레 불편해졌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쓰러지기 전처럼, 여전히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에 엘라이자를 찾아온 사람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흰색 정장에 위험할 정도로 단추를 풀어헤친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녀가 풍기는 아우라나 기계적으로 보일 정도로 절도 있는 걸음걸이가 본능적으로 엘라이자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책상에 강하게 내려놓고 앞으로 기대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터스크 그룹 산하 미래공학부서의 연구개발부장, 자넷 하버맨 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품속에서 작은 명함을 하나 꺼내어 엘라이자 쪽으로 밀었다. 명함은 테두리에 금테가 둘러진, 깔끔하고 고급진 디자인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힌 하버맨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 볼까요.”


엘라이자가 질문을 하려고 입을 열자, 그녀는 조용하라는 손짓을 하며 그림자같은 어둠에 감싸진 얼굴을 엘라이자의 그것에 더욱 가까이 대었다. 하버맨의 숨결이 목덜미에 느껴질 정도로.


“질문은, 설명을 듣고 해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어느새 거칠어진 하버맨의 호흡만이 방을 채웠다. 엘라이자는 순간적으로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다.


공포.


정신을 짓누르는 듯한 공포였다.


엘라이자는 갑자기 찾아온 원인 모를 감정에 의문을 품기보다 그것에 곧이곧대로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끄윽- 끅-“


말을 하려고 해도 숨이 턱 막혀 앓은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버맨은 안락의자의 팔받침에 걸터앉아 두려움에 마비된 엘라이자를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과 얼굴, 목과 어깨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엘라이자가 그녀의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 이제 들을 준비가 되셨나요?”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라이자는 여전히 끅끅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하버맨의의 얌전한 목소리가 그녀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는커녕 압도적인 공포를 더욱 증폭시키는 듯했다. 그녀는 마치 고양이를 다루듯 엘라이자의 턱 밑을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핏빛 붉은색으로 칠해진, 굉장히 날카롭고 뾰족하게 다듬어진 손톱은  아직 매니큐어가 마르지 않은 듯 요상한 냄새가 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벼운 손가락 놀림 하나로 하버맨은 엘라이자의 턱 아래, 성대와 가까운 부위에 작은 상처 하나를 냈다. 피도 한방울 나지 않은 얕은 상처였지만 자신의 몸에 뭔가가 들어왔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 이걸 알아채네요..?”


손톱이 화면에 닿으며 태블릿을 두드리는 소리. 


엘라이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치려고 안간힘을 쓰며 움찔거렸다. 그러자 하버맨은 그녀를 자신의 품속으로 더욱 끌어안을 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풀어주려고 했는데, 엘라이자 씨는 나쁜 아이니까 그냥 이렇게 들으세요?”


엘라이자의 코가 하버맨의 복부에 파묻혔다. 탄탄함과 말랑함 사이의 완벽한 밸런스를 이룬 복근이 그녀의 얼굴에 맞닿아 있었다. 의외로 짙은 향수 냄새나 다른 사무적인 냄새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그 대신, 전혀 예상치 못한 냄새.


땀이었다.


달짝지근한 향기가 약하게 배어 있는, 땀 냄새였다.


그녀를 납치한 사람들과 연관되어있을 것이 분명한, 지금 그녀를 동물 다루듯이 하고 있는, 약간은 미친 것같은 여자가, 아드레날린 섞인 땀 냄새를 풍기며 흥분하고 있었다.


또 다시 태블릿에 뭔가를 타이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하버맨의 숨소리와 조그마한 신음이 섞여있었다.


“역시… 윌슨이 일 하나는 참 잘해요… 이렇게 예쁜 실험체를 찾아오고 말이야.”


엘라이자의 턱이 서서히 마비되어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얼어있던 몸이 아주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하버맨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 계속 엘라이자를 더듬었다.


“엘라이자 씨, 처음부터 설명해줄게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여기 잡혀온 이유는 당신이 바로 어느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 질병을 ‘GT71,’ 코드명 ‘미다스의 손’ 이라고 부르고 있죠.”


그녀는 이 질병이 처음 발견된 30년 전, 그것의 정체를 조사하던 과학자 10여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건이 발생한 지역을 완전히 격리시킨 후 그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금으로 만든 괴상한 조각상이 발견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바로 GT71에 감염되어 병의 최종단계에 이른 사람의 최후였는데, 다행히 방호복 내로 이것이 침투하지 못해 더 이상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라는 것이었다.


“‘미다스의 손’은 장기간의 침식을 통해 인간의 조직을 순수한 금으로 바꿔버리는, 사실 ‘질병’ 이라는 꼬리표가 붙기 애매한 초자연 현상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파훼법에 가까이 가지도 못했던 연구를 단 3개월만에 크게 진척시켰어요.”


그녀가 말을 끝내자 엘라이자의 몸이 완전히 풀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하버맨의 손을 쳐내고 비틀거리며 문을 향해 달렸다. 하버맨은 그녀를 막으려 하지 않았고 안락의자의 팔받침에 앉아 그녀를 주시할 뿐이었다.


덜컥.


작은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너머 엘라이자가 마주한 것은 방금 그녀가 탈출한 방이었다. 그와 비슷하게 생긴 방이 아닌, 완전히 똑같은 공간.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은 하버맨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끝까지 들으라니까…”


하버맨의 목소리가 그녀의 앞과 뒤에서 들려왔다. 


혼란스러웠다.


“저희는 그렇게 경계가 부실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모든 상황은 수많은 계산에 걸쳐서 만들어진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요? 저는 당신이 나를 떨쳐내고 저 문을 여는 행동을 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까지, 초 단위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할 행동까지 읊어드릴 수 있고요.”


엘라이자가 대답하려 입을 열려 했지만, 여전히 입만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느냐, 


그건 바로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거, 당신이 기대고 있는 문틀부터 벽, 이 푹신한 의자, 전부가 진짜가 아니란 소립니다. 나는 지금 터스크의 실험실 침상에 누워있고, 당신은 여전히 그 콘크리트 직육면체 안에 갇혀 있어요. 이건 시뮬레이션이라고요. 특정 사물과 행동에 대한 당신의 반응, 정신적 또는 신체적 변화, 그런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뮬레이션!”


하버맨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라이자 씨, 당신은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에요.”


그녀는 천천히 엘라이자에게 다가갔다.


“저 그림 안에는 이 공간 속에 접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도 상황을 관찰할 수 있도록 일종의 가상 카메라가 수많은 방화벽 뒤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그림을 한 번 쳐다본 것만으로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렸어요. 내가 당신에게 투약한 독, 그건 상처가 나도 체내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독입니다. 당신의 뇌는, ’미다스의 손‘의 영향인지, 선천적인 발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감히 말하자면 ‘신’의 영역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그런 당신을, 오직 우리에게만 복종하는 노예로 만들어버릴 생각입니다.”





*정보

-  1993년에 제정된 멸종 위기 동물 보호법에 따라, 복제한 개체일지라도 1990년 이후 멸종 위기 상태를 부여받은 종을 밀수/사냥/도축/가공 하는 것은 불법이며 개인은 최대 가석방 불가 징역 20년 이상,조직적인 범죄일 경우는 종의 희귀성에 따라 최대 수억 달러의 벌금 + 조직의 와해 또는 정부의 리스트에 올라가게 된다.

- 자넷 하버맨은 극심한 조울증을 앓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임상실험을 거치지 않은 약물을 과도하게 사용한 결과 치료는커녕 증상만 더 키우게 되었다. 워낙 냉혈한이라 평소에는 차분하고 냉정해보이지만, 이는 업무를 처리할 때만 나타나는 모습이며 위에 보여지는 것처럼 오락가락한다. 사디스틱한 성향.


피드백은 주셔도 좋고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일주일에 한 화씩은 써보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힘드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