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쿠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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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 |
성명 | 사이드 쿠틉 이브라힘 후사인 샤들리 سيد قطب إبراهيم حسين الشاذلي Sayyid Qutb Ibrahim Husayn Shadhili |
출생 | 1906년 10월 9일 |
이집트 케디브국, 아슈트, 무사 | |
사망 | 1966년 8월 29일 (향년 59세) |
이집트 카이로 | |
직업 | 정치인, 테러리스트, 시인, 평론가, 교사, 공무원 |
학력 | 카이로 대학교 노던 콜로라도 대학교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소속 정당 | |
파벌 | 무슬림 형제단 강경파 |
가족 | 5남매 중 첫째, 배우자 없음 |
1. 들어가기 전에 [편집]
주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샤리아' 당한 문서입니다.
SHARIAH FOR THE ARCALIVE SOCIETY!
SHARIAH FOR THE ARCALIVE SOCIETY!
쿠틉는(은) 이슬람 말아먹기을(를) 좋아합니다.
무함마드 무르시와 ISIL는(은) 쿠틉을(를) 좋아합니다.
이집트 군부는(은) 이집트 최악의 테러리스트 새끼을(를) 싫어합니다.
2. 개요 [편집]
사이드 쿠틉 Sayyid Qutb |
“지하드라는 개념을 방어적 전쟁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이슬람의 본질과 그 주된 목적, 즉 전 세계에 이슬람의 메시지를 전파한다는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하드는 모든 방해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반드시 무력을 동원해야만 한다.” ㅡ 사이드 쿠틉, 본인의 자서전에서 سيد قطب إبراهيم حسين |
3. 일생 [편집]
3.1. 젊은 시절 [편집]
이집트 남부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10세에 꾸란을 모두 암송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독실한 무슬림이면서도 의외로 젊었을 때는 친서방적이었는데, 카이로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클래식과 미국 영화까지 즐길 정도로, 이후의 쿠틉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집트뿐 아니라 당대 아랍 최고의 명문대였던 카이로 대학을 졸업했고, 이후에는 시인, 교사, 평론가로 일하며 먹물의 삶을 살았다. 미래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굴하기도 했고, 1939년에는 세속주의 정당인 와프트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이집트뿐 아니라 당대 아랍 최고의 명문대였던 카이로 대학을 졸업했고, 이후에는 시인, 교사, 평론가로 일하며 먹물의 삶을 살았다. 미래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굴하기도 했고, 1939년에는 세속주의 정당인 와프트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3.2. 이슬람 극단주의로의 변질 [편집]
그러나 이런 쿠틉의 성향은 장년기에 들어 180도로 변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미국 유학 때부터였다. 당시 이집트가 사실상 영국에 휘둘리게 만든 주범이었던 파루크 왕가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쿠틉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왕실은 그를 미국으로 보내게 되는데, 이런 왕실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입장에서는 타락적이었던 미국의 문화를 보며 이슬람 극단주의와 반서방주의를 기르게 된 것이다.
그가 이토록 극적인 전향을 하게 된 데에는 복싱 경기나 혼성 댄스 파티 등 그의 입장에서 지나치게 개방적이었던 미국 문화를 접한 영향도 있겠지만, 일설에 따르면 미국에서 겪은 인종차별 때문이라고도 한다. 인종분리가 엄격히 이뤄지고 있던 당시 미국에서, 흑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쿠틉은 차별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는 토호 가문의 인텔리로 대접을 받던 그가 미국에서 겪은 수모는, 그를 열렬한 반서방주의자로 돌려 놓기에 충분했다.
따지고 보면 1950년대 미국은 지금, 하다못해 1960-70년대의 미국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런 미국의 모습마저도 타락적이고 음란하다고 배격하며 이슬람 극단주의를 주창한 쿠틉은 엄청난 틀딱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이토록 극적인 전향을 하게 된 데에는 복싱 경기나 혼성 댄스 파티 등 그의 입장에서 지나치게 개방적이었던 미국 문화를 접한 영향도 있겠지만, 일설에 따르면 미국에서 겪은 인종차별 때문이라고도 한다. 인종분리가 엄격히 이뤄지고 있던 당시 미국에서, 흑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쿠틉은 차별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는 토호 가문의 인텔리로 대접을 받던 그가 미국에서 겪은 수모는, 그를 열렬한 반서방주의자로 돌려 놓기에 충분했다.
따지고 보면 1950년대 미국은 지금, 하다못해 1960-70년대의 미국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런 미국의 모습마저도 타락적이고 음란하다고 배격하며 이슬람 극단주의를 주창한 쿠틉은 엄청난 틀딱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3.3. 이집트에서의 정치 활동 [편집]
보수주의자의 악몽 같았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쿠틉은, 자기가 미국에서 겪고 느꼈던 바를 고향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시작하며 근본주의 사상가로 이름을 날린다. 이 시기에 무슬림 형제단에도 가입하는데, 순수한 종교단체에서 서서히 과격해지기 시작하던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가 되어 무슬림 형제단을 근본주의 단체로 완전히 바꿔버린다.
한편, 1952년 나세르의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권력을 잡게 되는데, 쿠데타 세력과 쿠틉은 처음에는 우호적으로 여러 번 접촉했지만, 근본주의 무슬림이었던 쿠틉과 아랍사회주의, 세속주의 성향의 쿠데타 세력은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결별하게 된다.
한편, 1952년 나세르의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권력을 잡게 되는데, 쿠데타 세력과 쿠틉은 처음에는 우호적으로 여러 번 접촉했지만, 근본주의 무슬림이었던 쿠틉과 아랍사회주의, 세속주의 성향의 쿠데타 세력은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결별하게 된다.
3.4. 알라의 이름으로 스러지다 [편집]
이렇게 본격적으로 갈라서게 된 무슬림 형제단과 군사정권은 극도의 대립을 이어나가고, 결국 무슬림 형제단의 단원이 나세르 총리에 대한 암살 시도를 벌이며 이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다. 그러나 무자비한 고문과 학대 속에서도 쿠틉은 끈질기게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고, 그의 저작물 '진리를 향한 이정표'는 출판되기가 무섭게 금서로 지정되지만 널리 읽히며 이슬람 극단주의의 불길을 지피게 된다.[1]
1964년 쿠틉은 건강 악화를 이유로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쿠틉 열풍'으로 그의 위험성을 재확인한 군사정권은 무리수를 둬서라도 쿠틉을 제거하기를 원했고, 결국 "원리주의를 포기하면 살려주겠다"라는 정부의 회유도 거절한 채, 1966년 국가 전복과 나세르 암살 모의 혐의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실 무바라크나 엘시시와 달리 나세르는 정적들의 피를 보기 꺼려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쿠틉을 깜방에 넣어 침묵시키고자 했지만 오히려 영향력만 커져 갔기에 이런 무리수까지 두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리수는 쿠틉을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의 순교자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무바라크나 엘시시와 달리 나세르는 정적들의 피를 보기 꺼려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쿠틉을 깜방에 넣어 침묵시키고자 했지만 오히려 영향력만 커져 갔기에 이런 무리수까지 두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리수는 쿠틉을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의 순교자로 만들어버렸다.
4. 영향 [편집]
쿠틉이 이렇게 어거지로 처형된 감이 있어서, 오히려 아랍 민중들에게는 원리주의의 순교자로 추앙받았다. 무슬림 형제단은 끈질기게 버틴 끝에 안와르 사다트 정권에서 결국 양지에 발을 딛고, 끝내는 무함마드 무르시를 위시한 자유정의당을 통해 정권까지 거머쥐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러나 이들은 집권 초반부터 종파 갈등을 일으킴과 동시에 샤리아를 국가의 원칙으로 하는 신헌법을 발표하며 나락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고, 이러한 불안정이 지속되며 국민의 지지를 잃기 시작하며 끝내는 세속주의 성향의 이집트 군부 엘시시가 쿠데타를 일으켜 막을 내리게 된다.
엘시시의 쿠데타 이후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내에서 불법화되었으나, 무르시를 비롯한 무슬림 형제단은 내란까지 일으키려 하며 격렬히 저항했고, 끝내는 이집트를 비롯해 사우디, UAE, 시리아, 러시아 등지에서 테러조직 겸 불법 정당으로 조직당하기에 이른다. 또한 2020년에는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가 체포당하기도 했고, 무슬림 형제단의 조직원들이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진압당한 그의 이슬람주의 사상은 다른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도 퍼져 나가 유일신과 성전과 알-카에다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주게 되고, 급기야는 다에쉬까지 탄생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집권 초반부터 종파 갈등을 일으킴과 동시에 샤리아를 국가의 원칙으로 하는 신헌법을 발표하며 나락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고, 이러한 불안정이 지속되며 국민의 지지를 잃기 시작하며 끝내는 세속주의 성향의 이집트 군부 엘시시가 쿠데타를 일으켜 막을 내리게 된다.
엘시시의 쿠데타 이후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내에서 불법화되었으나, 무르시를 비롯한 무슬림 형제단은 내란까지 일으키려 하며 격렬히 저항했고, 끝내는 이집트를 비롯해 사우디, UAE, 시리아, 러시아 등지에서 테러조직 겸 불법 정당으로 조직당하기에 이른다. 또한 2020년에는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가 체포당하기도 했고, 무슬림 형제단의 조직원들이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진압당한 그의 이슬람주의 사상은 다른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도 퍼져 나가 유일신과 성전과 알-카에다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주게 되고, 급기야는 다에쉬까지 탄생시키고 말았다.
5. 정치적 성향 [편집]
쿠틉은 반서방주의, 그것도 지하드까지 불사하는 과격한 반서방주의를 주장했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이슬람의 율법을 거부하고 서구의 법을 따르는 세계의 모든 정권이 불신자 정권으로, 무슬림들에게는 온갖 방법으로 이를 뒤집어 엎을 의무가 있다. 세계는 이슬람 세계와 그 밖의 무지의 세계로 나뉘며, 인간을 타락시키는 무지의 세계를 벗어나 이슬람 세계를 추구해야만 한다. 그냥 이슬람 안 믿으면 믿을 때까지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고 죽이라는 소리다. 이 때문에 그는 극단적인 신정제와 지하드주의를 추구하며, 이는 사실상 알-카에다나 ISIS 등 현대의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반서방주의가 극에 달해 서방과 끈덕지게 엮인 이스라엘, 또 서구 사회의 주류 종교인 기독교와 이스라엘의 유대교까지 극도로 증오했으며, 이는 쿠틉의 사상을 이어받은 무슬림 형제단 역시 다르지 않아, 콥트교 성당에 불을 지르거나 신자를 집단 린치하고 학살하는 등 참극을 벌이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반서방주의가 극에 달해 서방과 끈덕지게 엮인 이스라엘, 또 서구 사회의 주류 종교인 기독교와 이스라엘의 유대교까지 극도로 증오했으며, 이는 쿠틉의 사상을 이어받은 무슬림 형제단 역시 다르지 않아, 콥트교 성당에 불을 지르거나 신자를 집단 린치하고 학살하는 등 참극을 벌이는 원인이 되었다.
6. 목적 및 사상 [편집]
“진정한 무슬림의 의무는 이슬람으로의 교화와 전향을 위한 선교와 지하드를 통해 비무슬림 사회를 일소하고 이슬람 사회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저서 ‘진리를 향한 이정표’ 中 |
쿠틉의 직접적인 목표는 이집트를 이란이나 아프간 탈레반 정부 같이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나 그나마 테러리즘은 자제하자는 노선이었던 알-반나와 달리 이쪽은 테러리즘까지도 사용해가면서 집권을 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세속주의를 지향하던 이집트 군부에게는 주적이나 다름 없으며, 이 때문에 2022년 현재까지도 갈등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집트 군부 세력이었던 안와르 사다트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에게 암살당하고[2], 반대로 무슬림 형제단의 쿠틉과 무함마드 무르시[3]가 군부에 의해 체포당하고 사형당하는 등 원한도 깊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초창기 집권했던 나세르나 사다트에 비해 엘시시는 초강경 철권정치를 펼치는 중이며, 이에 따른 무고한 피해자들도 상당수 등장한 상태이다.
다만 이집트에서 몰락한 것과는 별개로 쿠틉은 단순히 이집트 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의 아이돌 같은 존재로 떠올랐는데, 현대의 수니파 테러리즘 단체는 전부 이 인물한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과거 나세르가 무리수까지 둬가면서 쿠틉을 제거한 이유는 그들의 위험성과 영향력을 경계해서였는데, 결국 이들의 사상은 9.11 테러와 알-카에다, ISIL까지 탄생시키며 나세르가 괜히 그런 무리수까지 둬가면서 쿠틉을 제거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세속주의를 지향하던 이집트 군부에게는 주적이나 다름 없으며, 이 때문에 2022년 현재까지도 갈등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집트 군부 세력이었던 안와르 사다트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에게 암살당하고[2], 반대로 무슬림 형제단의 쿠틉과 무함마드 무르시[3]가 군부에 의해 체포당하고 사형당하는 등 원한도 깊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초창기 집권했던 나세르나 사다트에 비해 엘시시는 초강경 철권정치를 펼치는 중이며, 이에 따른 무고한 피해자들도 상당수 등장한 상태이다.
다만 이집트에서 몰락한 것과는 별개로 쿠틉은 단순히 이집트 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의 아이돌 같은 존재로 떠올랐는데, 현대의 수니파 테러리즘 단체는 전부 이 인물한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과거 나세르가 무리수까지 둬가면서 쿠틉을 제거한 이유는 그들의 위험성과 영향력을 경계해서였는데, 결국 이들의 사상은 9.11 테러와 알-카에다, ISIL까지 탄생시키며 나세르가 괜히 그런 무리수까지 둬가면서 쿠틉을 제거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게 되었다.
7. 평가 [편집]
근본주의 성향 무슬림들에게는 당연히 추앙을 받으며, 특히 진짜로 지하드를 실천하는 극단주의 테러단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던 만큼 그들에게는 정신적 지주의 위치에 놓인 인물이다.
그러나 근본주의 성향 무슬림들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테러리스트 취급이다. 특히나 이집트 군부를 비롯한 세속주의 세력에게는 주적이나 다름 없다.
현대의 이슬람을 이따위로 만든 인물이자 중동을 개판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좁게는 이집트를 테러리즘으로 위협해 이집트를 이란이나 아프간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로 만드려 한 인물이며, 넓게는 중동 전역의 테러리즘의 사상적 뿌리가 된 사람이다.
걍 존재 자체가 발암.
그러나 근본주의 성향 무슬림들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테러리스트 취급이다. 특히나 이집트 군부를 비롯한 세속주의 세력에게는 주적이나 다름 없다.
현대의 이슬람을 이따위로 만든 인물이자 중동을 개판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좁게는 이집트를 테러리즘으로 위협해 이집트를 이란이나 아프간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로 만드려 한 인물이며, 넓게는 중동 전역의 테러리즘의 사상적 뿌리가 된 사람이다.
걍 존재 자체가 발암.
8. 여담 [편집]
9. 관련 문서 [편집]
[1] 놀랍게도 한국에도 출판됐다. 이슬람 원리주의의 사상적인 측면을 알고 싶은 게이들은 한번쯤 읽어보면 도움이 될 거다.[2] 다만 이쪽은 이스라엘과의 관계 문제도 있긴 하다. 안와르 사다트는 4차 중동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이스라엘과의 평화론을 주장했는데, 그 때문에 아랍 국가들과 척을 졌고, 반이스라엘 감정을 갖고 있던 국민들에게 원한을 많이 사둔 상황이었다.[3] 사실 엄밀히 말하면 군부가 무르시를 직접적으로 사형시키진 않았다. "약간" 고문하고 사형을 선고하긴 했지만 실제 사인은 심장마비긴 하다. 다만 무르시가 군부에 의해 학대에 가까운 수준의 고문을 받은 정황이 드러나며 무르시에 대한 옹호 여론이 등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