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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사령관의 하루 (21)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닌데, 그래도 뭐 보다보면 나쁘진 않더라고.

 

그래도 조금 더 그……와일드 번치처럼 화끈하면 좋을 텐데 말이지.

 

T-75 워울프

 

 

 

 

 

 

65.

 

“카멜, 카멜.”

 

“왜 또 귀찮게 하는데.”


“오늘 뭐할 거야? 술은 어때?”

 

“아- 그건 좀. 나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


“보여줄 남자도 없는데 다이어트는 해서 뭐해? 나 원.”

 

모처럼의 휴일이 왔지만, 늘 그렇듯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맨날 퍼질러 자거나 술 마시고 퍼질러 자거나……둘 중 하나라 조금 심심하긴

 

했다. 이것저것 할 게 많긴 한데, 막상 하려니 귀찮아진다.

 

“어.”


카멜과 함께 뭘 할지 고민하며 복도를 걷던 중, 사령관과 마주쳤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걷는 걸 보아하니 그 좋아하는 일이 없는 모양이다.

 

“안녕, 사령관. 일은 어쩌고 여기 있어?”


“오늘이 휴일이라서 일을 못 합니다. 콘스탄챠 S2가 못하게 막습니다.”

 

“보통 노는 걸 막지 않나? 아무튼 쉬는 날이면 우리랑 놀래?”


말은 이렇게 했지만, 권유를 거절할 게 뻔했다.

 

사령관은 흔히 말하는 아싸라 남들이랑 같이 노는 걸 싫어한다.

 

“……좋습니다. 여러분과 교류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니까요.”


“어? 진짜? 그냥 던져본 말인데 이걸 받아주네.”


“야, 사령관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정말.”


카멜이 내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뭐하고 놀래? 술은 어때? 위스키랑 토닉, 보드카도 있어.”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T-75 워울프.”

 

“그럼 갬블은-”


“또한 모든 종류의 도박을 하지 않습니다.”


“……사령관, 여자랑 자본 적 없-”


“아하하하! 사령관, 얘가 원래 좀 상태가 안 좋아. 응? 이해해 줄 수 있지?”


카멜이 웃으며 내 입을 콱 틀어막았다.

 

“음? 워울프, 카멜……게다가 사령관까지 있군. 보기 드문 조합이지 않나.”


그 때, 등 뒤에서 칸 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대장. 마침 사령관의 순결에 대해서 논하는 중이었는데.”


“상관을 놀리면 쓰나. 미안하다, 사령관. 보다시피 워울프는 바보라서…….”


“괜찮습니다.”


하아……왜 대장은 이런 재미없는 남자한테 반한 걸까.

 

티 안 내려고 애쓰는 건 알고 있지만, 다른 애들을 대할 때와 달리 

 

상냥하게 대하려고 하는 게 보인다. 취향 참 독특하다니까.

 

“휴일이라 할 일이 없어서 산책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 두 사람에게

 

같이 놀자는 권유를 받고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드문 일이군. 사령관이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지 고민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저도 가능하면 일을 하고 싶습니다만, 그랬다간 콘스탄챠 S2가 화낼 겁니다.”

 

“아주 잡혀 사는구나?”


마누라 무서워서 술집도 못 가는 아저씨도 아니고……어휴, 한심하긴.

 

“나도 마침 쉬려던 중이었다만, 끼어도 되겠나?”
 
“대장이 끼겠다는데 저희가 어떻게 말려요. 아, 오랜만에 영화나 볼까요?”


“영화, 좋지. 워울프 너도 영화라면 껌뻑 죽지 않나?”


“특히 총알과 피가 튀는 영화 말이지.”


그럼 결정됐군.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사령관은 우리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말했다.

 

“……이게……사람이 사는 곳……? 이건 돼지우리 아닙니까?”


“조금 지저분하긴 하지. 그래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아?”


“사람 썩는 냄새라면 나는 것 같습니다만.”


그 말대로지만, 그래도 우리 숙소는 딱 이 정도가 좋다.

 

쓰레기통엔 생리대가 쌓여있고, 바닥엔 먹다 버린 과자와 술병이 굴러다니며

 

안 빨은 빨랫감들이 이곳저곳에 걸려있지만- 이 정도는 세이프다.

 

“엉? 뭐야, 사령관이 우리 숙소엔 왜 왔어? 혹시 사열?”


“사열로 왔으면 여러분 모두 영창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숙소엔 하이에나, 샐러맨더, 마지막으로 탈론페더까지 있었다.

 

“야, 숨겨! 숨겨! 덮어!”

 

샐러맨더가 이불로 카드를 덮으며 말했다.


“이미 다 봤습니다. 설마 숙소에서 도박까지 하고 있었을 줄은…….”


“뭐 어때서 그래? 숙소에서 술도 마시고 야동도 보는데 뭘.”

 

“미안하다, 사령관. 보다시피 우리 애들은 좀 독특하다.”

 

“이 정도로 독특하면 군사재판감이라고 봅니다만, 휴일이니 넘어가도록 하죠.”


그럼 됐네! 나는 TV를 켠 다음 무슨 영화를 볼까 디스크를 찾아봤다.

 

“오늘은 사령관과 교류를 가지는 날이다. 너무 무례하게 굴진 말도록.”

 

“네에- 그나저나 교류면 역시 섹스 말하는 거지?”

 

하이에나가 손가락으로 손가락 따먹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대체 교류와 성관계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겁니까?”


“에이, 교류하면 역시 갬블이지. 사령관, 초보니까 살살 해줄게.”


“안 합니다. 도박은 인간의 뇌에도 악영향을 주는 행위로서 중독될 경우

 

일상생활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쳇, 재미없긴.”


“자, 다들 사령관은 그만 놀리고 영화나 보자고. 뭘 볼까?”


칸 대장이 손짓하자 모두 자리에 모여 앉았다.

 

“영화는 폭발이다! 마이클 봄베이 영화 보자!”


“무슨 소리야. 영화하면 역시 탓짜를 봐야지.”


“하여간 영알못들 같으니. 영화하면 서부 영화지!”


우리가 이렇게 티격태격 싸우는 동안, 사령관이 리모컨을 잡았다.

 

“건전하며 상식에 도움이 되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니까 사령관이 인기 없는 거야. 뭘 모른다니까, 정말.”


“자, 그만. 그만. 공평하게 내가 아무거나 집어서 나온 걸 본다. 불만 있는 사람?”


“없어요.”


칸 대장이 디스크 중 하나를 집어 TV에 집어넣었다.

 

그 디스크에 있던 건……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상한 놈이라는 서부 영화였다.

 

“아자!”


“쯧, 맨날 총질하는 게 뭐 그리 재미있다고.”


“이거 한 100번 정도 보지 않았나요?”


페더가 볼멘소리를 냈다. 하여간 내가 하는 건 뭐든 싫어한다니까.

 

“이 명작은 200번을 봐도 재미있다고. 하이에나! 냉장고에서 술 꺼내와.

 

그리고 내 사물함에서 과자도 좀 꺼내오고. 육포도!”

 

“하여간 막내 시켜먹는 버릇은 언제 고쳐먹나 모르겠네.”

 

하이에나가 투덜거리며 술과 안주를 가져오는 사이, 영화가 시작됐다.

 

“사령관님은 무슨 영화를 좋아하세요?”

 

“영화를 본 적이 없습니다.”
 
“진짜? 어이어이, 인생의 절반을 손해 봤잖아!”


“그 정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쉿! 열차 강도 씬은 집중해서 봐야한다고.”

 

화면 안의 배우들이 달리는 기차에 매달려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왔다.

 

‘제이미 J 제임스!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머리통을 날려버리겠어!’

 

‘지랄! 항복해도 날려버릴 거잖아!’

 

“야, 여기 술.”

 

카멜이 맥주 캔을 휙 던지며 말했다.


“뭐야, 왜 이리 미적지근해. 냉장고 누가 건드렸어?”


“너무 차가운 것 같아서 제가 온도 좀 올렸어요.”


“쯧쯧, 맥주는 차야 제 맛이라고. 맥주 말고 브랜디나 보드카 없어?”


“여기. 또 저번처럼 마시고 내 이불에 토하면 죽는다, 너.”

 

“안 해, 안 한다고.”


……그리고 한참이나 영화가 계속됐다.

 

‘아비게일, 난 이제 틀렸어. 어서 가, 네 가족한테 가라고.’

 

‘아직 살 수 있어요, 포기하지 마요.’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가서 행복하게 살아, 응? 그게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야. 나 같은 별종은 잊고 평범하게 살아줘.’

 

“커어- 드르렁- 크어어어-”

 

“누구 코골이 소리가 이렇게 커?”
 
“하이에나. 야, 잘 거면 침대에서 자.”

 

카멜이 엎어져 잠들어버린 하이에나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예의가 없어요, 예의가. 이 언니 때는 말이야…….”

 

“너도 만들어지고 2년밖에 안 됐으면 무슨 헛소리야?”
 
“2년이면 강산도 변하거든?”


“둘 다 조용히. 사령관이 집중하고 있다.”

 

정말이네. 사령관이 눈동자를 빛내며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 덤벼! 한꺼번에 와! 누가 이 빌리 더 보이를 죽일 테냐? 얼른 덤벼!’

 

‘빌리! 내가 왔다. 네놈의 사신, 부처 핸즈가 왔다!’

 

“……야, 카멜. 너는 빌리랑 부처 중에 한 명만 고르라면 누구 고를래?”


“부처가 낫지 않아?”
 
“쯧쯧, 뭘 모르네. 모름지기 남자라면 빌리처럼 깡다구가 있어야지. 샌님처럼

 

구는 남자는 재미없어서 금방 질린다니까. 안 그래, 대장?”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건지 모르겠다만.”

 

“대장은 사령관 좋- 으읍! 읍!”

 

카멜이 내 입을 또 틀어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아무것도! 얘는 바보라서 이상한 헛소리 자주 하잖아요. 그치, 워울프?”


너 허튼소리 하면 죽을 줄 알아, 라는 눈빛이었다. 분명 그랬다.

 

아니……대장이 사령관 좋아하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새삼스레 뭘…….

 

“그냥 영화나 보죠. 네? 거의 다 끝나가요.”


“그러지.”


잠시 후, 마지막 장면과 함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왔다.

 

‘잘 가라, 제임스. 부처……너희처럼 이상한 놈들이 또 나오진 않겠지.’

 

“야, 끝났어. 이제 그만 자.”

 

나는 잠들어버린 샐러맨더를 깨웠다.


“으응……나중에 일어날게, 나중에…….”


“음냐음냐…….”

 

다들 잠들어버렸나. 카멜도 어느새 고개를 파묻고 자고 있었다.


“이런 명작을 보다가 잠들 수 있나? 나는 볼 때마다 재미있는데.”


“그 말대로입니다. 영화라는 건 꽤 재미있군요.”


묵묵히 영화를 보던 사령관이 말했다.

 

“특히 빌리와 제임스의 관계가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결국 그 과거에 저지른 일로 인해 죽게 된

 

제임스와, 과거에 얽매여 끝까지 달라지지 못하고 악인으로 남은 빌리와의

 

애증과 끝까지 제임스의 선함을 믿은 부처의 복수 같은 주제가 마음에 듭니다.”


“어머, 생각보다 재미있게 본 모양이네?”


“가끔 휴식을 취할 때 보면 좋을 듯합니다.”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칸 대장도 따라 일어섰다.

 

“앉아있었더니 등이 좀 아프군. 잠깐 걷겠나?”


“좋습니다. 저도 최근 허리 상태가 나빠 조심하는 중입니다.”


“나도 같이……엉? 뭐야,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데.”


영화 보면서 너무 마셨나……이제 보니 시야도 출렁출렁 흔들렸다.

 

“우리 둘이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 워울프, 너무 마신 모양이니 쉬어라.”


“그럴까……대장, 그럼 나도 한숨 잘게……하아암…….”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66.

 

“흠, 취기가 좀……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술은 백해무익합니다, 신속의 칸.”


“살면서 몸에 좋은 일만 할 순 없지.”


나는 사령관을 데리고 내 숙소로 돌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좀 치워둘 걸 그랬나……그래도 애들 숙소보단 나았다.

 

“애들이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하게 됐군, 내가 대신 사과하마.”


“괜찮습니다. 오히려 친근하게 대해주셔서 저도 편했습니다.”

 

“그런가. 고맙다, 언제나 우리의 억지를 받아줘서.”


“그게 제 역할입니다.”

 

나는 냉장고에서 얼음과 주스를 꺼내 사령관한테 건넸다.

 

“부하와 술을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는, 싫어하나?”
 
“술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나도 좀 취한 것 같으니 주스로 할까.”


우리는 주스를 나눠마셨다. 건배는 따로 하지 않았다.

 

“사령관,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듣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그만해도 되지 않겠나?”


그가 눈만 껌뻑였다. 그리고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 텐데.”


“……알아도 몰라야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게 계속 자신을 속여도, 결국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사령관. 인간에게 약점이 있다는 것이, 마음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려놓아도 된다. 버틸 수 없다면 그만둬라,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그건 도망치는 겁니다.”


“나도 몇 번인가 싸움에서 도망친 적 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전술이지. 사령관, 무서운 건 나도 안다. 그 책임을 짊어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알아……내 잘못으로 부하를 잃어본 경험이 있으니 말할 수 있다. 

 

결국, 어느 시점에선 그런 일이 일어날 거다. 사령관이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

 

이건 전쟁이다.

 

전쟁에선 언제나, 언제나 피와 눈물이 흐른다.

 

희생 없는 싸움은 없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 승리할 순 없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걸 잃은 후에야 그걸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래,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버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누군가가

 

죽는다면? 이미 한계까지 몰린 그 정신이 버텨줄 수 있을까? 사령관, 부탁한다.

 

내가 이렇게 부탁하겠다. 이젠……스스로를 놓아줄 때가 됐어.”

 

“사령관을 그만두라는 뜻입니까, 신속의 칸?”


“그건 아니다. 다만 자신을 풀어주란 거지.”

 

나는 손을 뻗어 사령관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난 2년간, 그는 한 번도 웃거나 울지 않았다. 

 

사령관이 울부짖으며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내가

 

얼마나 우둔하고 안일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웃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울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참았을 뿐이다.

 

“저는 사령관입니다. 저는 모두를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해야합니다. 효율적이며 합리적으로, 언제나 굳건하게.”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부하들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었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남은 모두를 위해 강해져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결국 눈속임에 불과했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나날이 쌓여

 

온갖 문제를 만들어내지. 그러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쌓인 감정으로 자신을 짓눌러 죽일 것인가.

 

난, 사령관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힘들면 도망쳐도 된다. 사령관을 그만두고 싶다면, 그만둬도 좋아.

 

이젠 우리가 있다. 용이나 마리가 반대해도 내가 막아주마.”

 

나를, 우리를 믿어라. 

 

내가 말하자, 사령관의 눈썹이 조금 움찔거렸다.

 

“……저는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잖나. 우리가 널 사령관으로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그게 ‘너’를 죽인다면……설령 우리가 살아남더라도 그것에 가치가 있을까?”

 

“전 어차피 인간입니다.”


“인간, 바이오로이드. 그딴 건 상관없다. 사령관은 내가 지금껏 본 인간들 중에서

 

가장 좋은 인간이다. 솔직히 나도 인간에 대해선 좋은 감정 따윈 없지만,

 

그래도 사령관이 인간이라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단 한 순간도.”

 

그의 눈이 꿈틀거렸다. 입술도 일그러졌다. 괴로워보였다.

 

“전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해야 합니다, 인류가 여러분께 저지른 죄를 조금이라도

 

속죄하려면 이것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은 여러분을 만들면 안 됐습니다.

 

인간은 여러분을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인류는 그 모든 악의를 여러분께 퍼부었습니다. 

 

저는 제가 인간이라는 게 싫습니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사령관…….”


“대답해주십시오. 저는 어째서 살아남은 겁니까? 왜 죽지 못한 겁니까?

 

결국 이토록 괴로운 길을, 죽는 순간까지 짊어져야 할 죄책감을 품은 채

 

살아가야 할 정도로 저의 죄가 깊습니까?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져 속죄하는 게

 

저의 형벌입니까? 전……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너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 죄가 있다면 그건 인류에게 있겠지.”


“저도 그 인류 중 하나입니다. 제가 하지 않았다고 해서, 제 동족이 저지른

 

죄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편해지고 싶다. 그러나 편해져선 안 된다.

 

포기하고 싶다. 하지만 포기해선 안 된다.

 

그는 그런 모순과 싸우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자기 자신과 싸웠다.

 

자신의 행복보다 언제나 우리 모두의 행복만을 생각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우리를 살릴 수 있다.

 

얼마나 잔혹하고, 그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할 고행인가.

 

“저를 걱정해주는 것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뭔가. 오히려 나야말로 미안하다고 해야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머리를 껴안았다.

 

“의지할 수 없는 여자라 미안하다. 지금껏 알아채지 못해서 미안하다.

 

……스스로를 미워하지 마. 넌 이미 충분히 죗값을 치렀어.”

 

“인류가 저지른 죄는 고작 이런 걸로 갚을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나는 용서하마. 나만큼은 언제나 널 용서할 거야.”

 

그가 나를 껴안았다. 하지만 흐느끼진 않았다, 그게 그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한계였다.

 

“미안해.”


속삭이듯 울리는 작은 목소리.

 

내가 처음으로 들었던, 그의 진심이었다.

 

 

 

 

 

 

 

 

 

 

 

사령관이 반말을 할 때

 

1 상대가 조금의 예의조차 갖출 필요 없는 쓰레기일 때

2 진심이 드러날 때

3 아이를 달랠 때 

 

이외엔 항상 존댓말을 쓴다. 나이 차이, 계급 상관없음.

인간인 자신이 바이오로이드인 다른 애들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중. 

그래서 마리나 용이 대놓고 도구로 쓰겠다고 해도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