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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사령관의 하루 (27)

 

 

 

 

 

발할라 따윈 없다. 천국도, 지옥도. 죽은 뒤엔 영원한 침묵만이 존재한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들은 발할라를 믿는다.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GS-10 샌드걸

 

 

 

 

 

 

81.

 

155번째 기록.

 

나는 최초였다.

 

불굴의 마리를 개선하여 만든 바이오로이드, 레오나. 그게 바로 나였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승리할 것.

 

그래서 난 그렇게 했다. 거기에 의문을 가지거나 반발하지 않았다.

 

인간이나 바이오로이드나 똑같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능력도, 그 무엇 하나 선택하지 못한 채 태어나

 

태어난 목적만을 위해 살아간다. 

 

누군가는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우리가 운명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운명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게 내 운명. 철혈의 레오나로서 끝없이 싸우다 죽는 게 나의 사명.

 

그걸 위해서……나는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까?

 

무엇을 더 희생해야, 끝에 닿을 수 있는 걸까.

 

 

 

 

 

 

82.

 

156번째 기록.

 

철충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몇 년이 지났을까.

 

인류는 끝장났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조만간 그들은 멸종할 것이다.

 

우리는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들었다. 

 

애초부터 성공 가능성이 없다시피 한 작전이었지만, 우리는 이 알래스카에

 

와서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했다. 기도하고, 싸웠다.

 

……그리고 패배하여 이 좁아터진 콘크리트 더미에 숨어 지냈다.

 

부하들은 거의 다 죽었다. 실종된 아이들도 십중팔구 죽었을 터였고 지금

 

남은 건 분대, 아니 분대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7명이 전부였다.

 

나, 발키리, 샌드걸, 베라, 알비스, 님프, 마지막으로 안드바리.

 

식량은 최대한 아껴 먹어도 일주일 남짓 버틸 정도였고, 탄약은 서로

 

머리에 한 방씩 쏠 정도가 고작이었다. 전투 한 번이면 다 쓸 분량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발키리가 말했다. 이제 남은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세 가지 길이 있어. 첫째, 여기서 버티다 죽는다. 아마 한 달 정도 살 수 있으려나.

 

둘째, 나가서 싸운다. 소대 하나 정도는 끝장낼 수 있겠지. 

 

마지막 셋째. 걸어서 바다까지 간다. 최소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걸어야 도착하는 곳에.”

 

자동차를 타고 가도 며칠이 걸리는데, 이 눈보라를 뚫고 행군하면 못해도

 

3주, 길게 잡으면 한 달이 걸릴 터였다. 알래스카는……지나칠 정도로 넓었다.

 

“구조를 기다리면 안 될까요?”


“못 들은 걸로 할게, 님프.”


구조대가 올 가능성은 없었다. 낮은 게 아니라 그냥 아예 없었다.

 

본부는 한참 전에 끝장났을 터였고 정말 기적적으로 본부가 버텼더라도

 

구조대를 보낼 여력은 없을 것이다. 기적에 기적이 겹쳐 그게 가능해도

 

우리를 찾으려면 이 드넓은 알래스카의 절반을 수색해야 한다.

 

“남은 길은 하나뿐이군요. 하지만 안드바리는…….”


“그 아이는 못 가. 알잖아, 발키리.”

 

안드바리는……저번 전투 때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치료는커녕 밥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그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 모두 그걸 알고 있었다.

 

“……제가 할까요?”


“내가 할게.”


부하한테 그런 일을 시킬 순 없다. 이게 내 마지막 남은 양심이었다.

 

님프와 베라는 고개를 돌렸고, 샌드걸은 담배를 꺼내 피웠다. 알비스는

 

끅끅 울며 눈물을 삼켰다. 나는 애들이 작별 인사할 시간을 줬다.

 

“준비 됐니, 안드바리?”


“준비됐어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권총을 꺼내 장전했다.

 

안드바리는 언제나 똑 부러지고 당찬 아이였다. 

 

한 번도 무섭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막내에, 가장 어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 중에서 가장 용감했다. 나는, 이 아이가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데려가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욕해도 괜찮아. 무능해서, 정말 미안해.”

 

나는 안드바리를 안아주었다. 그제야 그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알비스……언니, 부탁드려요. 분명 많이 울 거예요. 그리고 자원을……얼마

 

남지 않았으니 최대한 아껴 쓰세요. 저 없다고 함부로 낭비하면 안 돼요.”

 

“알겠어.”


“무서워요, 언니. 이게 죽음인가요?”


나는 말없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발할라에서 다시 만나자. 눈 감으렴.”


“레오나 언니, 저……저는…….”


“다 알아. 안드바리, 알고 있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발할라에서 만나자.”


“네, 발할라에서.”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죽음은 한 순간에 불과하며, 또한 영원에 이른다.

 

나는 안드바리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주었다. 그리고 군번줄을 챙겼다.

 

“다 끝나셨습니까?”
 
“끝났어. 이제 움직이자.”

 

그토록 많은 부하들을 잃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기에 철혈이다.

 

하지만 그건, 한낱 가면에 불과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83.

 

157번째 기록.

 

우리는 나아갔다. 끝없이 펼쳐진 눈밭을 뚫고 서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적과 마주칠까 걱정했지만, 이 눈보라가 우리를 숨겨주었고

 

놈들도 이런 날씨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듯 했다.

 

눈, 하늘, 잔해. 보이는 건 그게 전부였다. 어딜 가도 똑같은 풍경이

 

반복되어 사실 우리는 이미 다 죽고 구천을 떠도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분위기는……나빴다. 다들 한 마디도 없이 땅을 보며 걸었다.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나도, 다른 애들도 알고 있었다.

 

과연 우리가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그런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들 중

 

몇 명이나 거기까지 살아서 갈 수 있을까? 가서 탈출을 할 수나 있을까?

 

이 추위와 눈, 철충보다 무서운 적은 바로 이 의심과 두려움이었다.

 

지금이라도 어디 틀어박혀 농성할까, 조금이라도 더 버텨서 구조대를 기다릴까?

 

그런 나약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내 뺨을 때렸다. 죽은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나를 믿고 따랐는데, 그 결과가 이거다. 

 

한심하고 또 한심해서- 눈을 감을 때마다 그 비명소리가 들렸다.

 

살려달라는 애원. 죽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 

 

내가 더 유능했다면, 내가 더 뛰어난 지휘관이었다면…….

 

나는 발할라에 갈 수 없다. 그곳에 나를 위한 자리는 없을 테니까.

 

 

 

 

 

 

84.

 

158번째 기록.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나흘 정도 말없이 걷다보니 심심해진 것이다.

 

알비스는 안드바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시울을 붉혔지만, 일부러 밝게

 

행동하려는 듯 방실방실 웃었다. 다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비스를

 

바보 같다고 했지만,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린 버려진 건물에 숨어 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러는 동안, 하나 남은 콩 통조림을 데워서 한 입씩 나눠먹거나

 

눈을 녹이고 나온 물을 마셨다. 적어도 목말라 죽을 일이 없다는 건 다행이었다.

 

“바다에 도착한 뒤엔 어쩌실 겁니까, 대장님?”


“멀쩡히 움직이는 배가 있으면, 그걸 타고 여기서 달아날 거야.”


“가는 길에 굶어죽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그건 너무……비참하잖아요?”


“죽음은 그냥 죽음이야, 님프. 총에 맞아죽든 굶어죽든 다 똑같은 거지.”


샌드걸의 말이 옳았다. 죽음은 결국 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젠장. 차라리 호드 놈들이랑 싸울 때가 좋았어.”

 

“적어도 말은 통했으니 말이죠. 하아, 지금 만나면 뽀뽀도 해줄 수 있어요.”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벌써 다 죽었을까?”

 

“누가 알겠어요? 그래도 만약 다시 만나면……그 땐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그 바보들이랑 말이지. 하, 그거 재미있겠는데.”

 

우린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어째서인가 이런 시시콜콜한 잡담이, 언제까지고 기억났다.

 

 

 

 

 

 

85.

 

159번째 기록.

 

님프가 죽었다. 동사였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깨졌다.

 

우리는,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86.

 

160번째 기록.

 

이제 5명 남았다. 나, 발키리, 샌드걸, 베라, 알비스까지.

 

님프의 시체는 묻어주지 못했다. 땅이 얼어서 팔 수 없었고 시체를 태울 수도 없었다. 

 

군번줄을 챙기고 시체를 옷가지로 덮어주는 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조금이나마 좋아졌던 분위기가 다시 어두워졌다.

 

“제가 나중에 건넜다면……그랬다면…….”


“이미 끝난 일을 후회해봤자 아무 쓸모없어. 이제 그만해.”

 

발키리는 계속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이제와선 아무 쓸모없는 소리였다.

 

그보다도 식량이 걱정이었다.

 

이제 나흘 남짓 버티는 게 한계였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바다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굶어죽을 게 뻔했다.

 

“식량을 구해야겠어. 적어도 움직일 수 있을 때 구해야 돼.”

 

“건물을 수색할까요?”


“포격 때문에 건물이 다 무너졌으니 찾기도 어렵거니와 찾아도 그게

 

먹을 수 있는 상태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애초에 건물도 몇 개 없고…….”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군요.”

 

그래서 우리는 사냥을 시작했다.

 

갈 길이 멀었지만, 또 철충한테 발각당할 위험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굶어죽는 게 먼저였다.

 

샌드걸이 정찰해서 사냥감의 위치를 포착하면, 발키리가 저격해서

 

엘크를 잡았다. 엘크는 아주 커서 우리 모두가 먹어도 고기가 남았다.

 

남은 고기는 최대한 모아서 가지고 갔다. 그러나 이 ‘사냥’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가뜩이나 조용한 이 동네에서 총소리를 냈다가 철충이

 

우리를 발견하면 죽는 수밖에 없었고, 사냥감도 발견하는데 4~5시간이

 

걸렸다. 한 시가 급한 우리에겐 사냥할 시간도 없었다.

 

갈 길이 멀다. 

 

 


 

 

 

 

 

87.

 

161번째 기록.

 

멀리서 총성이 들렸다. 철충들이 가까이 있었다.

 

우리를 발견하고 쏜 건 아니었는데, 어쩌면 아직 생존자가 남아있고

 

그들이 싸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도와야 할까요?”

 

“가서 같이 죽어주자고?”


“……하기야 그거 말고 해줄 수 있는 게 없긴 하죠.”


발키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곧 총성이 그쳤다. 우리는 서둘러 거길 떠났는데, 알비스가 계속 가서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다고 납득시켜야 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닥치라고 말했을 텐데, 이젠 차갑게 구는 것도 지쳤다.

 

그 외엔, 생각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항상 배고프고 피곤했지만 누가 죽거나 다치는 일은 없었다, 철충도 우리

 

앞을 막지 않았다. 느리지만 어쨌든 앞으로 갈 수 있었다. 

 

“여기서 달아나면,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한창 걷던 중에 베라가 말했다.

 

“또 어디서 싸우겠지. 그게 우리들의 임무니까.”


“싸우고 또 싸운 끝에 죽는 게……전부로군요.”


“백마 탄 왕자님이 구해주진 않겠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혹시 모르죠. 저희도……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지도…….”


바보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비웃지 않았다, 뭐가 됐든 희망이 필요했다.

 

“내기할래? 누가 먼저 남자를 사귀나.”


“네? 어……하하……대장님도 농담을 하실 줄 아셨네요.”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나 묻자. 어떤 남자가 취향이니?”


내 질문에 베라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참 솔직한 아이였다.

 

“다 필요 없고……착하고 성실하면 좋겠네요.”


“소박하네.”


“저희 같은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이랑 사귀는 것부터가 주제 넘는 짓이잖아요.”

 

“그래도……나는……음, 진지한 사람이 좋겠네. 뭐든 진지하게 대하고

 

경솔하게 굴지 않는 남자 말이야. 유능하고 냉철하지만, 나름의 상냥함도

 

있는 남자. 어떤 일이든 능숙하게 해내는 멋진 남자가 좋겠어.”

 

“대장님이랑 잘 어울리겠네요. 혹시 생기면 소개시켜주세요.”


“물론이지.”

 

정말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있다면, 내 모든 걸 다 줄 수 있을 텐데.

 

바보 같은 상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 기대하고 말았다.

 

정말로, 바보 같았다.

 

 

 

 

 

 

88.

 

162번째 기록.

 

기습당했다. 새벽에 총성이 들렸고, 전투가 벌어졌다.

 

사실 그건 전투보다……도망치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닥치는 대로

 

달려서 달아났다. 경계를 세우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베라가 다쳤다. 왼쪽 허벅지를 다쳐서

 

제대로 걷질 못했다.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지만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하죠?”


“…….”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어떻게든 베라를 데리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업고 가는 것도 불가능했고 부축해주면

 

걸을 수야 있지만 그러면 안 그래도 느린 속도가 더 느려졌다.

 

“베라, 네가 선택해.”


“……여기 남을게요.”


“싫어! 안 돼! 베라 언니, 같이 가자. 응? 알비스가 업어줄게! 그러니까……!”

 

알비스가 베라를 껴안았다. 샌드걸이 한숨을 내쉬며 그 아이를 떼어놓았다.


“베라, 식량을 좀 두고 갈게. 총알도. 필요할 거야.”

 

“아니에요, 그냥 가져가세요. 저보단…….”
 
“그냥 받아. 제발.”

 

“싫다고! 제발, 응? 레오나 언니! 베라 언니를 두고 갈 순 없어. 우린 가족이잖아!

 

가족인데 왜 버린다고 하는 거야? 이제 싫어……제발…….”

 

나는 알비스의 뺨을 때렸다. 가차 없이, 냉혹하게.

 

“T-13 알비스 188호. 우린 여길 떠난다, 이건 명령이야.”


“싫어…….”


“알비스, 가. 나는 괜찮아, 조금 쉬면 곧 나을 거야……바로 쫓아갈게.

 

열, 아니 스무 밤……그 뒤에 만날 수 있어. 알겠지?”

 

발키리가 울부짖는 알비스를 끌고 갔다. 나는 베라에게 경례했다.

 

“베라, 지금까지 수고했어. 고마워.”


“여기, 제 군번줄 받으세요. 알비스를……알비스를 부탁드려요. 부탁드릴게요.

 

전 괜찮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강한지.”

 

“발할라에서 만나자.”


“발할라에서 만나요.”


우린 떠났다. 이제 나, 발키리, 알비스, 샌드걸이 전부였다.

 

…….

 

우리들은, 대체 뭘 위해서.

 

 


 

 

 

 

89.

 

163번째 기록.

 

알비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조용해졌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 이상 분위기가 좋아질 일은 없었다.

 

바다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할까. 과연 저 너머에 바다가 있긴 할까?

 

자꾸 꿈을 꾼다. 오래 전의 꿈, 죽은 아이들과 다시 만나는 꿈이었다.

 

우린……티파티를 했다. 모두 내 방에 모여서, 다 같이 과자를 먹고

 

차를 마셨다. 떠들고 또 떠들었다. 부질없고 시시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도 참 행복했다. 더없이 행복했다, 적어도 꿈을 꿀 동안엔 이 모든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만약 발할라가 있다면, 그곳에 바로 발할라일 것이다.

 

하지만……현실은 시궁창이다. 발키리와 샌드걸이 싸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식량 때문이었다. 사냥을 할지, 말지에 대해 끝도 없이 싸웠다.

 

샌드걸은 해야 한다고 했지만 발키리가 반대했다.

 

사실, 나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내 기억대로면 이 근방에 철충들의

 

본거지가 있었다. 그런 곳에서 소란을 피웠다간 다 죽을 게 뻔했다.

 

“대장님, 아니 레오나 언니. 이대로 가면 도착하기도 전에 굶어죽어요.

 

알비스 보이세요? 하도 못 먹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요. 

 

철충이 위험한 건 알아요. 그래도 뭘 먹어야 걷든 말든-”

 

“그러다 우리 위치가 발각되면 다 죽는 거야. 신중하게, 냉정하게 생각해.”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해서 베라랑 안드바리를 버리셨습니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샌드걸은 피하지 않았다.

 

“말조심해.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어쩔 수 없다고 해서 뭐든지 정당화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네가 말해봐. 내가 어떻게 해야 했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됐는데?!”


“…….”

 

이게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다음 날 새벽에, 샌드걸은 쪽지 한 장과 군번줄을 남기고 사라졌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발할라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샌드걸은 나아가길 포기했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90.

 

164번째 기록.

 

바다가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가면, 이제 곧 여길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약해졌다. 몸엔 뼈와 가죽만 남았고 걸을 때마다

 

양말에 피가 배어나왔다. 발키리의 발은 고름이 차고 발톱이 뽑혔다.

 

그래도 걸었다. 쉬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어쨌든 걸어갔다.

 

우리는 무언가를 버리며 나아간다. 희생이 곧 인생이다.

 

나는 이 여정에서 그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버릴 수 있었기에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바다야. 드디어, 마침내…….”
 
“저희 셋뿐이군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래. 하지만 이렇게 도착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는 걸 머지않아 깨달았다.

 

바다에 다다를 즈음, 철충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놈들은 바다 주위에

 

매복해 우리처럼 바다를 통해 빠져나가려는 생존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무작정 달렸다. 어떻게든 뚫고 나아가 바다에 닿아야만 했다.

 

“악!”


“알비스! 알비스, 일어서! 얼른 뛰어!”


알비스가 총에 맞았다. 나는 그 아이를 등에 업고 달렸다.

 

“레오나 대장님, 거의 다 왔습니다. 이제 정말 다 왔습니다.”


“발키리!”


“제가 발을 묶겠습니다. 지금까지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언니.”

 

“같이 가자. 가야 돼, 발키리!”


“발할라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군번줄을 받았다. 그리고 도망쳤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

 

발키리의 총성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철충들을 따돌리는데 성공했지만, 알비스는 제대로 걷질 못했다.

 

관통당한 배에서 출혈이 계속됐다. 어떻게든 지혈했지만 소용없었다.

 

“언니, 레오나 언니…….”


“괜찮아. 괜찮을 거야, 계속 걸어. 거의 다 왔어, 정말……거의 다.”

 

새까만 밤하늘에 오로라가 나타났다. 눈이 그쳤고, 바다가 보였다.

 

“보이니? 알비스, 보여? 보고 있니?”


“……응…….”

 

“집에 돌아가자. 돌아가서……티파티를 하자. 우리 다 함께, 밤새도록

 

차를 마시고 놀자. 응? 알비스, 정신 차려. 걸어야 돼.”

 

“발할라가……정말 있을까? 다들……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럼. 모두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지만 아직 우린 아직 갈 수 없어.

 

살아남은 사람들은……우리에겐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어. 그 애들의

 

목숨을 헛되게 만들면 안 돼. 알비스? 알비스.”

 

알비스가 쓰러졌다. 그럼에도 나는 버리지 못하고 그녀를 끌고 갔다.

 

버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발……정신 차려, 제발 일어나. 나를 혼자 두지 마. 응? 너마저 가버리면

 

어떻게 해. 나 혼자서 뭘 하라는 거야. 나 혼자 살아서 뭐하라고!”

 

“…….”


“알비스!”


“……언니. 나……발할라……잘 있어…….”


그리고 거기서 끝났다. 나는 알비스를 놓아주었다.

 

“……알비스…….”


내 이름은 철혈의 레오나.

 

이 이름은 수많은 희생과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나는, 그 어떤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기에 철혈이었다.

 

하지만 그건, 한낱 가면에 불과했다.

 

이토록 연약하고 겁 많은 나를 숨기는 가면일 뿐이었다.

 

“알비스, 아……알비, 알비스……! 아아, 아아아아…….”

 

여기까지 왔는데. 모든 걸 버려가며 겨우 도착했는데.

 

어디까지 희생해야 하는 걸까.

 

뭘 희생해야, 우리들은 도착할 수 있는 것인가.

 

“아아아아아아……!!”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에서, 오로라 밑에서 나는 울부짖었다.

 

이것이 그 모든 희생의 대가였다. 이걸 위해서- 얼마나 많은 걸 버려야 했지?

 

그래,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나의 형벌이다.

 

 

 

 

 

 

 

 

91.

 

난 때때로 일지를 읽었다. 아무것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살아남았다. 나는 그곳에서 살아남았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아.”


“좋은 아침입니다, 철혈의 레오나.”


복도를 지나가던 중, 나는 사령관과 마주쳤다.

 

저번의 그 일이 떠올라 피하려고 했지만- 그가 나를 붙잡았다.

 

“왜?”


“……두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 같은 여자한테 볼 일 없는 거 아니셨나?”


“첫째, 저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히 하겠습니다.”


그러시겠지. 하지만 그건 호감일 뿐, 애정이 아니다.

 

“둘째……전 당신을 신뢰합니다. 다만 제가 당신을 거부한 이유는…….”


“이유는?”


“……제가 겁쟁이라 그렇습니다.”


사령관이 내게 고개를 숙인 뒤, 가던 길을 갔다.

 

“언젠가, 곧 오게 될 그 날.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뭐?”

 

“……네가 필요해…….”

 

그 영문 모를 말을 남기고, 사령관은 자리를 떠났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인지 그 한 마디가, 자꾸만 귀를 맴돌았다.

 

 

 

 

 

 

 

 

 

 

 

 

결국 돌아오는 것도 거의 없는데 왜 나는 글을 쓰는 건가.

하지만 합리적인 이유로 뭘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겠지.

그리고 몇 개 수정함. 피곤할 때 쓰면 꼭 실수가 나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