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와 만났던 곳은 광활한 침엽수림이 펼쳐져 있고 일 년 내내 칼바람이 몰아치던 공화국의 북부전선이었다.


거친 지형 덕분에 제국군이 자랑하는 기갑부대의 진격을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지만,

이번 전투로 인해 우리 공화국군은 전선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우리가 지원하던 전방의 보병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포대는 서둘러 진지 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적 침투조가 한발 빨랐고 그들이 부대를 유린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기관총을 비롯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화기를 이용해 서둘러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훈련된 켄타우로스 기병들은 그런 우리를 비웃듯 재빠르게 달려들어 손쉽게 진영을 무너뜨렸다.


격렬한 저항 끝에 가까스로 화포를 지키는데 성공했지만,

포대장*을 비롯한 포대원의 과반수가 그들의 습격에 희생되어 더 이상 작전을 속행할 수 없게 되었다.


생존자들은 공화국군 3사단이 주둔 중인 ‘이쉔’으로 집결하라는 전사한 포대장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들고 갈 수 없는 화포를 비롯한 군용품들을 모두 불태운 후 이쉔이 위치한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을 파고드는 추위와 배고픔으로 사기는 바닥을 쳤고,

적의 소탕부대와 몇 번의 교전 끝에 결국 나를 제외한 전우들은 모두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고 그렇게 이틀 정도가 지났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걸어 심신 모두 지칠대로 지친 나는 정신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부지역 특유의 거센 눈보라까지 몰아쳐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대로라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걷길 몇 시간,

운 좋게 버려진 폐가로 보이는 집을 발견해 그곳에서 잠깐 몸을 녹이기로 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방아쇠에 손을 얹고 썩어있는 문을 살짝 열었다.


탕-


귀를 찢는 총성에 놀란 나는 측면으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역시 안전한 곳은 없는 걸까.


숨을 고르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후 덜렁거리는 문 틈 사이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이런 성대한 방식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집주인이 대체 어떤 녀석인지 확인했다.





한 소녀가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나보다 네댓 살은 어려보이는 외모였다.


다만, 몸상태가 좋지 않은지 숨을 매우 거칠게 쉬고 있었고, 총을 잡은 두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대로 대응 사격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나는 대체 무슨 배짱이 있었는지

바닥에 총을 내려놓고 두 손을 든 채 그녀를 향해 조심조심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역시 제국군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아군이었다면 갑작스레 발포하진 않았을 터.


내가 발을 뗄 때마다 그녀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치며 계속 소리쳤지만,

나는 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기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바로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간 나는 총구를 잡아 옆으로 치운 후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몸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녀의 왼쪽 다리에 큰 상처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앞다리의 허벅지 부분에 피에 젖은 군복 외투가 묶여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말의 하반신을 가진 켄타우로스였다.


옛날부터 제국이 위치한 동쪽 지역에는 인간과 닮은 아인족이 많이 살고 있었다.

켄타우로스도 아인족 중 하나로 그 기동력과 무지막지한 힘을 살려 과거 대륙을 호령하던 제국 기병대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이들에게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말의 힘 정도는 우습게 능가하는 전차나 장갑차와 같은 기갑병기가 개발되어 자연스럽게 이들을 대체했고

지금은 그저 약간 강한 보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은 백병전에 한해서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들의 기동성은 일반 보병은 따라잡을 수 없는 스피드로 후방부대를 교란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전차가 없는 알보병 부대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교환비를 자랑했다.


그래서 제국은 여전히 켄타우로스로 구성된 기병들을 운용하고 있었다.

며칠 전 우리 포대를 급습해 와해시킨 침투조 또한 이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공화국에는 켄타우로스가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나는 무방비하게 그녀에게 다가가는 당돌한 짓을 벌였을 지도 모른다.



다리에 감긴 외투에 손을 대려고 하자 소녀는 이를 악문 채 들고 있던 총으로 내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러나 상처로 인한 통증 때문인지 곧 신음 소리와 함께 총은 내 몸을 피해 허공을 갈랐고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나는 엎어진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외투를 벗어 군복 왼쪽 어깨에 박힌 적십자 마크를 보여주었다.

일단 이쪽에서 위해를 가할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줘야했으니까.


당혹스러워 하는 그녀를 무시한 채 메고 있던 구급낭을 펼쳐 응급처치를 위한 각종 도구들을 꺼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그녀는 긴장의 끈을 놓았는지 아니면 단념했는지 몸을 벽에 기대고 살포시 눈을 감았다.


다행히 출혈은 멈춰있었으나 허벅다리 전체가 부어있었고, 추운 날씨로 인한 감염인지 그녀의 이마는 불같이 뜨거웠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 찰과상과 타박상으로 인한 멍이 가득했다.


일단 가장 급한 부분인 외투에 묶인 앞다리부터 보기로 했다.


외투가 상처에 말라붙어 있어 급한 대로 n/s* 수액 병을 뜯어 외투를 충분히 적신 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혈병과 고름으로 범벅된 환부를 씻어내자 부어오른 상처 속에 금속 파편으로 보이는 이물질이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날카로운 대검 같은 것이 살을 파고들어 그 끝이 부러져 그대로 피부에 박혀있는 상태였고,

그 주변으로 피부가 찢어진 열상이 군데군데 있었다.


다행히 아직 곪진 않았다.


베인 흔적 또한 오염이 그리 심하지 않아 이대로 봉합수술을 진행해도 괜찮아 보였다.

더구나 아인종은 인족에 비해 회복력이 높다고 하니 이정도 상처는 처치만 잘 해준다면 문제없을 것이다.



하반신 마취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지금 가진 리도카인* 양으로는 턱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환부 주위로 국소마취를 한 다음 핀셋으로 상처에 짓눌려있던 이물질을 빼냈다.


파편이 살을 비집고 나올 때마다 소녀는 고통스러워했지만, 입을 틀어막으며 잘 참아주었다.



역시 예상대로 대검의 끝부분이 박혀 있었다.


대검 끝이 부러지는 경우는 흔치 않았지만, 전장에서 부상을 입는 원인은 정말 여러가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파편을 빼내자 약간 출혈이 있어 압박대로 지혈을 한 후 수술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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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합까지 마무리하는데는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켄타우로스의 하반신 피부는 인간보다 두꺼워 봉합사*의 니들이 살을 제대로 뚫지 못했다.


아무래도 공화국 병사들의 대다수는 인족이었기 때문에 의료기구 또한 인족에 맞춰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 보단 백배 천배는 나았다. 이것조차 없었으면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을테니까.


아인을 상대로 수술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런 사실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나는 평소에 하지도 않던 실수를 연발했다.


그러나 옷소매를 입에 물고 아픔을 견디는 가여운 소녀를 보니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태연한 척 수술을 진행했다.


물론, 목덜미를 따라 흐르는 식은땀은 숨길 수 없었으므로 헐렁하게 풀어놓았던 목토시의 끈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며 정신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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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다리 이외에 다른 부위의 처치까지 모두 마친 나는 녹초가 되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그녀 또한 지쳤는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밖은 점차 어두워졌고 심해진 눈보라로 인해 낡은 집 안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나는 바람을 막으면서 조금의 빛이라도 새어나갈 위험을 막기 위해 주변에 널브러진 건초와 잔해들을 이용해 눈에 보이는 모든 틈을 막았다.


편안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소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자 소녀는 몸을 살짝 움츠렸지만 깨진 않았다.


수액을 놓으며 같이 투여한 해열제 덕분인지 열은 많이 내려가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야전 위생병*으로 전장에 배치될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누구도 살리지 못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그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모르핀* 주사를 놔주는 것뿐이었다.


내 앞에서 적의 총탄에 쓰러지는 전우들이 늘어날 때마다 내 정신은 백사장의 고운 모래성마냥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이제 더 이상 누군가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리는 수술을 했고 그 상대가 적병이었다.

내 친구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살려낸 것이다.


훈련소에서 피아 구분 없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가르치던 교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위생 부사관 교육대 시절,


아침이 밝을 때마다 '살려야 한다! 살려야 한다!' 라고 외치며 교육장을 떠들썩하게 했던 망할 교관.


그래도 학교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의료 기술을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었기에

나름 능숙한 처치를 할 수 있을만큼 쓸만한 위생 부사관으로 전장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감사해야겠지. 


수료식 때 가슴에 손을 얹고 복창했던 선서도 비슷한 내용이었을 거다.

내 눈앞에 죽어가는 모두를 살리자. 였나?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느 누구가 내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 전쟁터에서 원수를 살리기 위해 손을 내밀 수 있겠는가?


수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진 내 눈에 편안한 얼굴로 내 앞에서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켄타우로스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를 보니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인 기쁨과 뿌듯함에 몸의 피로가 씻은 듯이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방금 전까지 했던 생각들로 인해 가슴 한편이 탁 막힌 느낌은 완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생각의 바다에 잠긴 채, 소녀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오두막에서의 첫날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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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1) 포대장: 포병에서 중대급 부대인 포대의 지휘관.

2) n/s: normal seline, 생리식염수. 0.9%인 염화나트륨 수용액으로 일반적인 체액의 농도와 같아 수액이나 주사제를 희석하는 용도로 널리 쓰인다.

3) 리도카인: 국소마취에 쓰이는 마취제. 내과에서는 부정맥 치료용으로도 사용한다.

4) 봉합사: 상처 봉합을 위해 사용하는 실로 끝에 니들이라는 바늘이 달려있다. 니들의 생김새와 실의 종류 및 굵기에 따라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5) 위생병: 과거 의무병을 지칭하던 말.

6) 모르핀: 마약성 진통제. 흔히 아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탁월한 진통 효과로 전장에서 극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투여한다. 중독성 때문에 악용의 우려가 있어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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