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


누군가 몸을 톡톡 치는 느낌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언제부터 잠들었던 거지? 


처치가 끝나고 대충 오두막의 틈을 막은 것 까진 기억났지만 그 뒤로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밤새 간호했던 켄타우로스 소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액이 효과가 있었나보다. 어제보다 얼굴빛이 확연하게 좋아보였다. 다행이야.


내가 추위에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자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입고리가 절로 올라가는 것을 애써 참았다. 이상하게 보진 않았겠지?


제국군은 전부 무자비하고 야만스런 괴물이라고 소개하는 선전물은 애초에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전장에서 계속 마주치다보니 그들에 관해서 그렇게 좋은 기억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이 전쟁은 우리에게 제국을 향한 증오심과 분노로 머리를 가득 채우도록 강요했고,


우리는 전투를 치를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몸부림쳤다.

그것을 풀기 위해 사로잡힌 제국군 포로를 상대로 조롱과 경멸, 추행을 일삼을 정도로 우리의 감정은 계속 뒤틀리고 망가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 미소 짓는 소녀의 모습은 말라 비틀어진 내 감정을 촉촉하게 적셨고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공화국의 적이 아닌 그저 여행길에 만난 인연이라 여겨도 되지 않을까?



그녀 옆에는 통조림이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 통조림을 보자마자 피로로 인해 잊고 있던 식욕이 되살아나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제국군의 전투식량은 취사를 전제로 한 금속제 통조림이 주류다.


언젠가 노획한 것들을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맛은 일품이었으나 불을 이용하여 익혀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전우의 유품으로 챙긴 라이터와 성냥을 가지고 있어 불을 만드는 것은 문제없었지만,


함부로 불을 피웠다가 위치가 발각됨은 둘째치고 이 건조하고 낡은 나무 집에 불이 옮겨 붙을 수도 있었기에 취사는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그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반쯤 얼어있는 통조림을 까기 위해 대검으로 캔 윗부분을 열심히 내려찍고 있는

가여운 소녀의 모습에 내 이성의 벽은 서서히 녹아내렸고 내 위장도 그에 맞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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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구급낭을 뒤져 소독용 에탄올 병을 꺼냈다.

이런 용도로 쓰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물자가 넉넉하던 주둔지에서 종종 뭘 끓여먹을 때 써먹던 방법이었다.


주변에 불이 옮겨가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넓고 평평한 돌을 주워와 그 위에 깨뜨린 수액 병을 거꾸로 올렸다.


버려진 조리기구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집 안에는 썩은 나무판자와 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최선이었다.


작은 돌로 수액 병이 쓰러지지 않도록 적당히 고정한 후, 병에 에탄올을 조금 붓고 불을 붙인 성냥을 그 위에 떨어뜨렸다.


불이 갑자기 치솟았지만, 다행히 주변에 옮겨 붙지는 않았다.

그 위에 까놓은 통조림을 올리고 데워지기를 기다렸다.




소녀는 그런 나를 넋을 놓고 바라보다 자신도 질세라 아까보다 더 열심히 통조림을 까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나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대검을 뽑아 가세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구수한 쇠고기 스튜의 향이 집 안을 가득 채웠고, 우리는 정신없이 음식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불이고 연기고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때 먹은 스튜가 내 인생에서 최고로 맛있었던 음식이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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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후 붕대를 풀고 소독을 하며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실밥은 잘 붙어있었고 붓기도 어제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있는 듯 했지만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래도 부대에 복귀하자마자 꼭 야전병원에 들리라는 말을 여러 가지 몸짓을 통해 전달했지만,

소녀는 그저 방글방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보니 참 귀여운 아이다.


공화국의 어느 도시를 거닐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별것도 아닌 주제로 하루종일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여학생들.


이 소녀가 손에 들어야 할 것은 신상 화장품과 패션 잡지지 이런 탄내나는 총이 아니다.

대체 무엇이 이 아이를 전쟁터로 내몰았을까? 제국은 그만큼 수세에 몰린 걸까?


내가 있던 부대에서도 이렇게 어린 병사는 본 적이 없다. 최소한 공화국은 나이든 사람을 징집하면 했지

대학도 들어가지 않은 핏덩이들을 전장으로 보내진 않는다.


착잡한 마음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아놓은 창문을 살짝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어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밥을 먹을 때와는 다르게 라이터를 켜지 않으면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주변이 어두워진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살짝 오한을 느낀 나는 그녀의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았다.


갑작스런 접촉에 부끄러웠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는 그녀였지만, 싫지는 않았는지 자신 또한 몸을 움직여 나와 어깨를 맞댔다.


어제 나에게 총을 겨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말 착한 아이였다.



라이터 불에 의지하며 그녀는 나에게 품속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고,

그 사진에는 켄타우로스 모녀와 지팡이를 짚고 있는 중년 남성이 함께 찍혀있었다.


남자는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

인간과 켄타우로스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했다.


공화국에서 제일 흔한 아인종인 머메이드는 인간과 자손을 만들 수 없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까지 인간과 인어의 특성을 둘 다 가지는 혼혈은 보고된 적이 없다고 한다.


아인의 특성이 우선적으로 유전되는지 소녀는 전형적인 켄타우로스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일반 켄타우로스와 다른 점이 있겠지.


애석하게도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이름이 ‘티아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발음하기 쉬우면서 참 예쁜 이름이었다. 제국어는 모두 딱딱하고 무뚝뚝한 느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부드러운 어감을 가진 단어도 있었다는게 놀라웠다.


어머니로 보이는 켄타우로스 여성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사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소녀의 모습을 보니 나 또한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역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그리운걸까?


나는 천생 고아였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잘 모른다. 

다만,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슬픈 일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안다.


나 또한 키워주신 교회의 수녀님과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지원해주신 신부님이 계시기에.


나는 살짝 울먹거리는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어릴 적 수녀님께서 항상 부르시던 짤막한 노래를 한 소절 불러주었다.


공화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굴 따러 바다에 나간 엄마와 그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을 노래한 동요지만

과연 그 뜻이 제대로 전해졌을까? 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걸 들은 소녀는 이내 울먹임을 멈추고 날 보며 다시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제 괜찮다는 뜻이리라.


이 끔찍한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고 있다.


높으신 분들의 사리사욕을 위한 전쟁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들이 아닌,


직접 전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다.


결과가 어찌되든, 피로 점철된 전쟁이 끝나야 이 한 맺힌 역사도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이런 아픔을 겪는 것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야만 한다. 반드시.



분위기 전환을 위해 교회에서 찍은 어린 시절 사진과 대학 친구들과 함께한 사진 몇 장을 보여주며

이 때 있었던 일들을 손짓 발짓 더해가며 설명해주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그녀는 양 팔을 꼬고 이상한 폼으로 서 있는 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밤은 점차 깊어져 갔지만 우리의 웃음꽃은 지지 않았고 그렇게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