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벌어진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이 깬 나는 내 허리를 껴안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켄타우로스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느낌이 좋았는지 소녀는 나를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켄타우로스가 힘이 쎄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름 성인 남성인데도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가다 그대로 엎어지며 마룻바닥에 코를 찧었다.


얼굴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내 비명 소리에 고개를 든 소녀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그 육중한 하반신이 내 배를 짓누르고 말았다.


산장에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지며 힘차고 활기찬 아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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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타우로스의 회복력은 놀라웠다.


붓기는 상당히 많이 가라앉았고 벌써 상처가 아물기 시작해 더 이상 진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 쯤 되면 적어도 3~4일 내에 실밥을 풀어도 될 정도다.


내심 이들이 약간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우린 정녕 이런 괴물들과 싸워온 걸까?


그래도 방심했다간 상처가 덧나는 것은 매한가지기에 다리를 최대한 쓰지 말라고 계속 경고했다.

물론 내 두 팔을 앞다리에 비유해서.


그런 그녀는 아침부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엎드린 내 자세를 따라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런 천진난만한 소녀의 머리에 딱밤을 한 대 살짝 쥐어박으며 붕대를 마저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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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독을 마친 나는 다시 이쉔을 향해 길을 떠날 준비를 했지만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 적의 정찰대와 조우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이쉔으로 가 공화국군에 합류하는 것이 내가 살 길이었다.


그녀 또한 그것을 알기에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갈색 머리칼 사이로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것이 보였다.



전장에서 만나 잠시 정을 나눈 사이였지만 우리는 서로 적이다.


언제까지고 함께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다음에 만날 때는 서로 총을 겨눠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관계다.


이곳은 손톱만한 쇳조각 하나가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전쟁터다.

나약한 마음가짐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녀가 아니라도 제국군의 누군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뒤로 하며 나는 티아나의 가녀린 몸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내 눈물샘을 자극했지만 그녀는 보지 못했으리라.


아니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았다.


내 품에 파고들어 흐느끼던 소녀는 자신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어제 그녀가 보여준 사진들 중 하나였다.


구겨지고 살짝 그을린 인화지 속에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티아나의 모습이 찍혀있었고,


아래에 무언가 적혀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단어들을 읽지 못했다.


나는 사진을 받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소중히 끼워 넣고

입대 후 찍은 사진을 꺼내 소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래. 이러면 된 거야. 그냥 추억으로 서로의 마음 속에 묻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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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집 뒤편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긴장한 나는 창문 틈을 통해 밖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제국군이었다. 우거진 나무들에 가려 군복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반신이 말인 병사들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우리 군에 없다.


하필 이럴 때에...


그들은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소총을 든 병사가 넷, 아니 다섯인가?


그 중심에 소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지금 도망쳐봤자 소용없다. 여기서 전력으로 뛴다 한들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야.


평범한 인간의 속도로는 저들을 이길 수 없으니까.



 나는 소녀를 뒤로 한 채 앞 창문을 넘어 골조만 앙상하게 남은 건물로 빠르게 걸어갔다.


물론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최대한 발자국을 지우는 것은 잊지 않았다.


눈에 뒤덮인 건초더미 아래로 파고들어 몸을 숨기고 틈 사이로 밖의 상황을 살폈다.


열린 창문을 통해 집 내부의 상황을 볼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그것이 내 크나큰 실수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집 뒷문이 거친 소리와 함께 으스러지며 티아나와 같은 군복을 입은 켄타우로스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 중 소대장으로 보이는 여성은 상황보고를 듣는 듯 소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부하들은 사주경계와 동시에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집 내부를 둘러보던 소대장은 열린 창문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 창문들은 전부 막혀 있었지만 그 곳 하나만 뚫려 있었기에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이 분명했다.


나라도 같은 의문을 가졌을 테니까.


그녀는 직접 앞문을 열고 나와 내가 숨어있는 건초더미 바로 앞까지 천천히 다가왔다.


서둘러 지운 발자국 흔적을 내려다보며 누군가가 이 근처에 있다는 걸 확신한 듯 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발굽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은 더 빠른 속도로 뛰었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타고 내려와 내 콧등을 촉촉하게 적셨다.




내가 숨어있던 건초더미를 주시하던 그녀는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들고 나를 향해 겨누었다.


애초에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포기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항상 친구 녀석이 입에 달고 살던 말버릇이 있다.


녀석은 그 말과 함께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벌써 2년도 더 된 일이다.


이제 나도 그 뒤를 따라가는구나.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치 오래된 필름을 재생하듯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내 머리에서 주르륵 지나갔다.


아아. 이게 주마등이 스친다는 그거구나.


그 마지막은 방금까지 함께한 켄타우로스 소녀, 티아나의 미소가 장식했다.


그래도 마지막에 누군가를 살리는 보람찬 일을 하고 간다는 생각에 입고리가 살짝 올라갔다.


부디 전쟁 끝날 때까지 꼭 살아서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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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발의 총성이 산장에 울려 퍼졌다.


고통은 없었다. 총에 맞으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프다는 건 다 거짓말인가?


그런데 이상했다. 총구는 내가 아닌 바로 옆 바닥을 향해 있었다.


...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총을 쏜 것이다.


그랬기에 고통 따윈 없었고 당연히 목숨은 붙어있었다.


얌전히 나오라는 경고 사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건초를 치우고 얌전히 일어나려고 했다.


어차피 지금 죽으나 끌려가서 죽으나 그게 그거였다.


제국은 포로에게 일절 자비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인족일 경우, 내가 위생병이든 뭐든 신경쓰지 않고 바로 가스실로 보내버린다고 들었다.


그만큼 제국은 인족을 혐오했다. 어찌보면 우리 인족은 도망자였으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않을 상대다.



그랬기에 인족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겨지는 우리 공화국은 제국에게 끝까지 반기를 들었다.


공화국마저 무너지면 다시 인족은 선조들과 같이 제국의 노예로 돌아가야 하니까.


총소리에 당황한 병사들이 오두막에서 나와 소대장에게 소리쳤다.


소대장의 안전을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대장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들을 호출한 것이 아닌 이쪽으로 오려고 하는 병사들에게 손을 들어 저지했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를 생포하려면 부하들을 불러 건초를 뒤지게 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그녀는 잠시 건초더미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티아나가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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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상황을 이해했을 땐 그들은 이미 소녀를 데리고 산장을 떠난 후였다.



그렇다. 그녀는 나를 살려준 것이다.


대체 왜?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관해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살며시 건초더미를 치우고 그 곳을 빠져나왔다.


수통의 물로 목을 적신 나는 흐트러진 군장을 고쳐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빨리 이쉔으로 가야 해.



눈에 뒤덮여 길을 알 수 없었지만, 맑은 날씨 덕분에 가시거리가 넓어져 전보다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얼어붙은 하천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천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가던 도중 살아남은 아군 무리를 만나게 되어 서로 감동의 포옹을 한 후 이들과 함께했다.


도중에 정찰을 나온 적병들을 몇 번 발견했지만,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걸어간 끝에 우리는 마침내 이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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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쉔에서 재편성된 우리 군은 끝까지 제국군에 맞서 저항했고 여기저기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국군의 도시 봉쇄로 인한 물자부족으로 기근에 시달렸지만, 우리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군인뿐만 아니라 이쉔의 주민들까지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물신양면 우리를 도왔다.


결국, 수많은 공화국 국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쉔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는 후일 ‘이쉔 공방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제국군의 남하를 저지한 공화국은 반격의 기점을 마련했고

제국에게 점령당했던 주요 도시들을 다시 탈환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쉔에서 많은 피를 흘린 이후에도 전쟁은 2년 정도 더 계속되었다.


서로 소모전만 벌이며 의미 없는 싸움을 이어가던 제국과 공화국은 마침내 1945년 5월 8일,


따뜻한 봄바람이 불던 남부전선의 피에타 요새에서 종전 협정을 맺었다.


무려 7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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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과 수녀님께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 목숨을 건진 이후로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어떻게든 멀쩡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총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전우를 업고 달릴 때면


항상 총알은 나를 피해갔다. 물론 말도 안되는 이야기란 건 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적진 코앞까지 뛰쳐나갔다 상처 없이 멀쩡하게 돌아온 내 모습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종전 후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전쟁으로 인해 중단했던 의학 공부를 끝마쳤다.


그 동안 제국과의 교류도 다시 재개되어 공화국 국민이라도 제국에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이틀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북부전선에서 만난 소녀를 잊지 못한 나는 틈틈이 제국어를 공부했고

그녀가 넘겨준 사진 밑에 적혀있던 문구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텐티브 20, 7월 19일. 포레미아에서.'


텐티브는 현재 제국의 연호이고, 포레미아는 사전에 따로 나와 있지 않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수소문 끝에 제국의 서쪽 어딘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추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라지만 잊기는커녕

소녀와 만난 지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녀의 미소 짓는 모습이 너무나 생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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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지 3년 째 되는 날,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녀의 생사조차 알 수 없다.


헤어진 뒤에도 분명 많은 전투에 참전했을 것이고 그 중 한 전장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제국 땅에서 그녀를 찾고 있었다.


정확한 지명을 알 수 없었기에 광활한 제국 땅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쥐 잡듯 샅샅이 뒤졌다.


제국인들 중에서도 이곳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허탕을 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냥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수도 없이 했었다.


그 때마다 품속에 소중히 간직한 그녀의 사진을 꺼내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공화국을 떠난 지 2년이 되어가는 어느 봄날,


나는 마침내 제국의 수도인 메르헨폴리스에서 서쪽으로 3천 마일 이상 떨어진 이 시골마을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는 정말 작은 마을이지만 따스한 바람이 불고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노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마을 이정표를 마주한 순간, 이곳에 그녀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그녀와 재회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상상들에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말이 어떻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니, 받아 들여야만 한다.


나는 지금 이 기나긴 여행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이곳에 와 있다.


종전 협정이 있었던 5월마다 들판을 노란색으로 물들인다는 ‘포레미안 플로라‘가 만개하는 그녀의 고향, 포레미아에.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