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

정갈히 정리된 탁자 위에 널부러진 고문서들.


라니는 일렁이는 촛대의 불꽃 아래에서 한 고문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의 시간이 계속되는 가운데,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뻣뻣한 낡은 종이의 부스러지는 소리와 차를 홀짝이는 소리뿐이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과 손에 든 고문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앞으로 걸어갔다.

어두컴컴한 하늘을 밝히고 있는 것은 오로지 별빛들의 찬란한 빛뿐이었다.


"하아."


라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손을 기대었다.


최근 들어 몇몇 고민거리가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황금률의 법칙과 관련된 것이었다.


스륵.


라니는 자신의 모자를 살짝 들어 별들을 올려 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분명, 하늘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지만, 아직 땅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릇된 빛의 꼭두각시 노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능력이 부족해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헛되이 보내었던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황금의 법칙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지상의 존재는 길을 잃었다.

희미한 빛만으로 길을 드러내고 살피기엔 아직 별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빛이 환하게 빛나기 위해선 존재의 길라잡이가 되어줄 근간이 필요했다.

억겁의 세월 동안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줄.


"세계의 근간이 될 대원칙이..."


한 때, 그녀는 데미갓의 일원이자 적법한 엘데의 계승자 중 하나였다.

수많은 마법과 비의를 탐구했고, 사법에 정통하여 '눈'의 명칭을 부여받은 마녀였다.


비록, 엘데의 망령에 사로잡힌 동안 얻은 허명에 불과했지만, 분명 그 지식은 스스로 쌓아올린 탑이었다.


"부족해.."


현재의 지식으로는 딱히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탁자위에 여러 고문서를 펼쳐놓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위대한 자'를 꿈꾸었던 인간의 집념은 그녀조차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부족해..."


빛 바랜자를 깨운 그 행동 하나가 외계의 의지를 끊어 놓았듯.

겨우 작은 행동 하나가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릇된 법칙을 근간으로 삼았다가는, 당최 얼마나 큰 파국을 불러올지 알 수 없다.

심지어 그것이 세상의 근간이 되는 대원칙이라면..


".."


라니는 희미한 악몽을 떠올렸다.

밤하늘의 쌀쌀한 공기는 잊고 싶은 기억까지 불러들였다.


"왜 그랬던 걸까."


휘이잉~


살짝 열린 창문을 타고 날아온 바람에 촛불이 일렁였다.

라니는 창문을 닫고 다시 탁자에 앉아 고문서를 펼쳐 들었다.

다른 손으로 찻잔을 들었지만 이내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마에 손을 기대고 고개를 늘어뜨렸다.

찻잔에 담긴 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딸그락.


갑작스러운 찻잔 소리에 라니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샌가 옆에 다가온 빛바랜 자 아니, 그녀의 왕이 새로운 차를 가져온 것이 보였다.


"아.. 친애하는 나의 왕. 이제 왔는가? 오늘은 조금 늦었구나."


라니는 잠시 흐트러진 모습을 바로 하기 위해 살짝 아래로 손을 겹쳤다.


한때 빛바랜자였던 그는 자신의 반려이기도 하지만, 어엿한 엘데의 왕.

높은 자로서의 격식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때 갑작스럽게 빛바랜 자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 아니.. 갑자기 뭐 하는 건가?"


갑작스러운 빛바랜 자의 행동에 깜짝 놀란 그녀는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빛 바랜자가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자, 이내 그녀는 포기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를 말해야 이해를 하지 않겠나?"


라니의 따가운 눈총에 빛바랜자는 차갑게 식은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할 말을 잃은 듯 라니는 눈을 내렸고, 둘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

".."

"에잇. 오늘도 끈질기구나."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빛바랜 자의 눈빛에 못이긴 라니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나의 규율은 황금이 아닌, 별과 달이 어우러진 차가운 밤의 규율이지.


그렇기에 원했어.


생명과 영혼을 멀리 떨어뜨려 놓기를.

별의 세기를 창세할 것을.


"하지만.."


라니는 천천히 일어나 빛바랜자와 창가 앞에 다가섰다.


별빛으로 빛나는 하늘. 암흑으로 가득한 땅.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흐를지라도, 그녀가 근간을 세우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황금률을 부수고 외계의 의지를 단절시킴으로써, 덕분에 모든 존재가 꼭두각시놀음에선 벗어났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모든 이들을 위한 결과가 맞았을까?


"어쩌면.."


라니는 빛 바랜자의 손을 꾹 부여잡았다.


"분명 나는 맹세했어."


황금을 부서뜨리고.

억겁의 세월 앞에 놓인 수많은 장애물.


모든 생명과 모든 영혼에.


아득한 미지의 저편이 닥칠지라도.

두려움을, 망설임을, 고독을.

그리고 어둠을 향해 가게 될지라도.


"하지만.. 모르겠어.."


저들에게 빛 하나조차 되찾아주지 못하건만.

길 잃은 저들에게 길라잡이조차 되지 못하건만.


데미갓? 계승자? 여신?

허울 좋은 허명에 불과한 게 아닐까?


".."


그녀의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빛 바랜자는 천천히 그녀의 몸을 자신의 두 팔로 포개었다.


가져온 찻잔의 모락거림이 잦아드는 동안 그녀의 떨림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온 바람이 빛 바랜자의 등을 스쳤다.

라니는 따뜻한 그의 온기를 느끼며 입을 떼었다.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과거에 반신이었어."


데미갓 중, 오직 미켈라와 말레니아와 나만이 두 손가락이 선택한 계승자 중 하나였지.

그러나 우습게도 우리의 목적은 다른 것에 있었어.

가장 큰 목표는 두 손가락과 같은 거대한 의지의 통치를 벗어나는 것이었지.


"미켈라는 아마 누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렇기에 미켈라는 끝까지 맞서 싸웠어.

비록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그에반해 난 몸을 죽이고 도망치게 급급했지.


"카리아는 별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어. 황금률의 사슬에 묶이기 전까지는."


그리고 난 동시에 카리아의 왕녀였지.


그래서 책임이 져야만 했어.

카리아의 왕녀로서, 별의 운명을 지닌 자로서.


"그래서 모든 자들의 빛을 앗아간 거야. 새로운 빛을 찾아주기 위해서."


그러니 책임져야지.

세상 모든 존재로부터 빛을 앗아간 책임을.


"하지만.."


라니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말을 흐렸다.

그러다 그녀는 고개를 밑으로 돌리고는 말했다.


"괜한 이야기를 해버렸어. 잊어,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라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나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빛 바랜자는 두 손으로 라니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 아니! 뭐..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빛 바랜자의 행동에 라니가 투닥거리는 동안 빛 바랜자는 라니를 목마에 태워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별.. 별을 보라는 거야?"


라니의 물음에 빛 바랜자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은빛 한 방울, 한 방울.

정성스레 수놓은 것처럼 하늘은 촘촘히 빛나고 있었다.


그가 왜 저 희미한 별들을 바라보라고 한 것일까?

분명, 별은 빛나고 있었기에 더 고통스러웠건만..


갑작스러운 빛 바랜자의 행동에 놀라기도 잠시, 라니는 작은 한숨을 내셨다.

그러자 빛바랜 자는 손가락으로 다시 땅을 가르켰다.


"땅..?"


그는 다시 하늘을 두 번 가리키더니, 땅을 향해 내리그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 작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늘의 별이.. 땅으로 내려온다는.. 그런 의미야?"


빛바랜자는 라니를 목에서 내려놓더니, 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라니는 다시 한 번 별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황금을 대체할 별이라."


반려와 함께 창세한 별의 세기.

황금률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긴 세월동안 염원해왔던 대로.


그러나 황금의 규율은 세상을 지탱하는 근간.

그 근간이 사라진 하늘은 어두컴컴한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화려한 황금의 빛을 잃고 수많은 자가 길을 잃었다.

하늘의 별을 길라잡이로 삼기엔 아직 반딧불에 불과한 별빛.


그러나 이제는 그 의심을 떨쳐내기로 했다.

아니, 이제 흔들림 없이 굳게 믿기로 했다.


황금의 씨앗이 땅 아래에서 인내하다가, 하늘을 가리우는 황금 나무가 되었듯.

저 하늘을 뒤덮은 별빛이 언젠가 길 잃은 어린양들을 인도하것을.


앞으로 억겁의 세월동안 어떤 사건들이 코앞에 닥칠지 전혀 모른다.


한때 번영했던 녹스텔라는 분노에 가득 찬 내리는 별에 사라졌었다.

한 짐승이 엘든을 거름으로 사용했던 적도 있다.


언제 그런 상황들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 나는 이미 맹세했어."


암월의 반지가 이 손에 끼워져 있는 동안.

영원한 나의 사랑스러운 왕.

그가 언제까지나 함께 해줄 것이니.


"나의 왕. 마녀 라니를 모욕했잖아? 싫다고 말하게 두진 않을 거야.“


그제서야 라니는 환하게 웃으며 빛 바랜자, 아니 그녀의 왕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