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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강물




~우유빛 길(The milky way)~




  아빠의 방에서 나온 아에사는 후우,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단지 오빠를 따라가고 싶었을 뿐인데. 12살에 계승자의 상징인 미노타 대거를 자신에게 넘기고 대륙으로 오빠인 에이멘 드 미노타가 떠나자 이제껏 자신의 오빠에게 많이 기대던 아에사는 위태로운 자신을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제 혼자 남은 자신을 지탱 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오빠를 따라 갈 것이라는 꿈과 파란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미노타 대거 뿐이었다. 밤마다 파도소리만 들리는 검은 바다를 보노라면 붉은 석양뒤로 검게 물든 오빠의 나룻배가 어딘가를 헤메는 듯 하여 늘 그 단검을 스다듬곤 했다.


  아에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불려간지라 시간은 꽤나 늦어 복도 안은 횃불을 켜놓았음에도 어두컴컴했다. 해변가 절벽에 위치한 저택의 외부는 바다가 잠들어 있었다.


  정원 밖으로 나온 아에사는 횃불을 들고 정원을 둘러보았다. 익숙하고 낯익은 향기와 어둠이 흐르는 정원. 2층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바다와 정원을 함께 보고 있으면 바닷바람이 꽃내음을 품고 그녀를 훑고갔다. 이제 그것도 내일부터는 끝이겠지.


  괜히 울적해진 아에사는 다리를 난간위에 올려놓고 파란 치마를 들춘채 새하얀 허벅지 안쪽의 단검을 쥐었다. 살짝 뽑자 어둠속에서도 파랗게 빛나는 보석검이 검신을 드러냈다. 일반적으로 보석으로 검을 만들지는 않는다. 보석으로 만든 검이 철검이랑 부딪혔다간 단박에 부서지고 말 것이다. 뽑아 들고 몇 번 휘둘러볼까, 생각하던 아에사는 그냥 검집안에 집어넣었다. 그때 옆쪽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칙 고개를 돌리자 몇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경비병 도리스였다.


  어디서 술이라도 마시고 온건지 얼굴은 붉게 물들어있었고 술냄새가 여기까지 풀풀났다. 아에사는 그 모습을 보고 고운 눈살을 찌뿌렸다. 경비병이 술이나 마시고 경비를 서다니. 아무리 미노타 자작가의 위세가 땅에 떨어졌어도 저건 기본이 안된 자세다. 게다가 그는 자신에게 인사도 안하고 서있었다. 그녀가 성난 표정을 지어도 가만있자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아직도 겨우 은밀한 그곳만 가릴 정도로 치마를 말려 올라간 자신의 치마와 난간위에 올려진 자신의 다리를 볼 수 있었다. 도리스는 그 흰 허벅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에사는 재빨리 다리를 끌어당겨 뒷걸음질 치며 외쳤다.


  “무, 무례한 것!”


  아에사가 소리치자 도리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허둥지둥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동자는 탐욕으로 가득 차 짧은 아에사의 치마 밑을 보고 있었다. 아에사는 뺨이라도 한 대 때려줄까 하다가 더 이상 상관했다간 좋은 소리도 못들을 것 같아 그냥 물러서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두 번 다시 못볼 사람 아닌가. 아에사는 흥, 하고 치마를 툭툭 털며 저택 뒤편의 절벽가로 향했다.




  도리스는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있던 자신이 방금 본 광경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에사 아가씨가 15살 때부터 저택에서 경비를 서던 그는 먼발치에서나마 그녀를 볼 수 있었는데 오늘 밤 그는 섬에서도 최고의 미인으로 치는 소녀의 은밀한 허벅지를 보게 된 것이다. 밑을 보자 불끈 솟은 그의 남성이 식을 줄 모르고 서있었다. 도저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은 여자라도 사서 자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그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파란색 짧은 치마와 유혹하듯 빛나는 흰 허벅지와 흘러내리는 금발, 신이 직접 조각한 듯 아름다운 얼굴과 녹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어떤 여자를 사더라도 그녀만큼 만족감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도리스는 탐욕에 휩싸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는 아에사가 갔던 길을 따라 저택 뒤편으로 향했다.




  절벽 뒤편은 저택에 가려지고 나무가 무성해서 직접 오지 않는 한 밖에서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이었다. 북쪽에 위치한 이 절벽은 햇빛도 잘 들지않아 어두컴컴했다. 특히, 밤 같은 때에는 아예 칠흑이었다. 아에사는 자신이 들고있는 횃불을 빼고 진흙속에 있는 듯 농밀한 어둠이 들러붙어있자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에사는 횃불을 들고 오빠와 자주 갔던 비문이 새겨진 비석으로 다가갔다. 그 비석은 미노타 섬을 처음 발견한 미노타 가의 선조가 만든 비석이었다.


  이윽고 파도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절벽 끄트머리에 절벽 끝을 통째로 깎아 만든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팍까지 오는 비석은 대륙 공용어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바람과 파도가 함께 하는 곳에서 미노타는 모든 숙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


  예전에는 대륙에서도 바다위의 귀족이라고 불릴 만큼 유명했던 미노타 가문이다. 그 위대한 항해가문의 뒷배경에는 아주 오래 전, 미노타가의 시조가 바람과 맺은 계약이 있었다. 태고의 바람이라고 불리는 그 바람은 미노타가의 배가 뜨면 노도 방향타도 필요 없게 만들어주었다. 어느 배보다도 빠르게, 뱃길도 수로도 필요없이 미노타가의 항해선들은 바다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녀 대륙 어느 항해사보다도 유명해졌다.


  아에사는 그 비석을 천천히 스다듬었다. 그리곤 고개를 푹 숙이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애타고 간절한 염원이 담긴 말이었다.


  ‘조상님, 제가 오빠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공기가 사라지고 바다가 마르지 않는 한 숙원을 이룰 것이다. 그녀는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고 또 그렇게 다짐했다. 아에사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하늘 위의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보름달도 반달도 아닌 어정쩡하게 뚱뚱한 달이었다. 그걸 보자 아에사는 슬쩍 웃음이 나왔다.


  '먼 우주에서 걸어온 난쟁이들이 이곳에 찾아와선 저녁식사로 달을 한입씩 베어

먹는단다. 그래서 달은 다시 금빛 새살이 돋기 때문에 저렇게 빛을 내는 거야'


  오빠가 베어간 내 마음은 아직까지도 새살이 돋질 않아요.

그림자가 거꾸로 진 섬으로. 오빠가 태양을 보면서 동시에 그림자를 본다면, 빛의 반대편으로 어둠이 드리워야하는데 빛의 방향으로 어둠이 진다면. 모순된 세상을 본다면. 어둠으로 빛을 진다면. 빛의 방향으로 어둠이 진다면.


  우드득


  그 소리는 생각중인데다 파도소리에 묻혀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았고 그녀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차가운 꺼끌한 돌비석에 허리를 숙이고 이마를 댄 채 아에사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점점 표면위로 떠올랐다. 거대한 광야 위에 생채기 하나만큼 작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것은 금방 커져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누구...”


  고개를 돌리려던 아에사의 입은 누군가에 의해 틀어막혔다. 깜짝 놀란 그녀가 몸을 뒤틀려 했지만 이미 상체는 누가 짓누르고 있어 일어 설 수 없었다. 그녀의 가는 목덜미로 남자의 거친 숨이 닥쳤다.


  “흐흐, 그렇게 매혹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으면 어느 남자라도 가만있을 수가 없지. 네가 자초한거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아에사의 헐렁한 흰 셔츠 안쪽으로 거칠게 손을 집어넣었다. 평소에 딱히 외출하지 않는 한 차려입지 않던 아에사의 가슴 팍으로 남자의 거친 손길이 밀어닥쳤다. 남자가 아에사의 유방을 강하게 움켜쥐자 아에사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신음이 커지자 남자는 칼을 꺼내들고 말했다.


  “비명을 질렀다간 이 칼로 너를 찔러버리고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겠다. 그러면 시체도 못찾겠지? 뭐 이 시간에 돌아다닐 사람도 없는데다 저택안의 노인네는 그 두터운 돌덩이 안에 있으니 들리지도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