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채널

점심때가 되자 아에사는 옷가지를 넣은 가방과 화려한 하늘색 드레스를 차려 입고 정원에 내려섰다. 새하얀 분칠과 장미를 찧어 만들 즙으로 부드럽게 바른 입술은 그녀의 미모를 전보다 훨씬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화장한 그녀의 모습은 흡사 천국을 노래하는 천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내면에서는 좀더 어두운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이렇게 차려입고, 결혼 준비까지 했지만 아에사는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에겐 차마 말을 못 할 것이다. 아버지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그녀 혼자서는 미노타 섬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대륙으로 가려면 약혼을 핑계로 대륙에 도착한후 도망갈 생각이었다.


  찰그랑

  치마 안쪽의 미노타 대거가 가볍게 흔들리며 파도같은 청명한 소리가 울린다.

  대대로 바다와 함께 지낸 가문. 바다에서 난 청 사파이어를 깎아 만든 대거.


  그녀의 불운의 약혼상대는 일레드마 유블.

  

  얼굴도 모르는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당신은 나의 이용수단이 되어야겠어요.

  미안해요. 제겐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출발하자!”


  드디어 저택을 출발한다.

  항구의 거리는 약 5km. 한숨자고나면 도착하겠지.





  인간에게는 이상한 법칙들이 많다. 언제나 필요 없을 때는 잘 보이다가 필요할 때만 안 보이는 이상한 법칙이자 굉장히 맘에 안 드는 법칙. 그래서 인생에는 그걸로 인한 위기도 많다. 그리고 가끔씩 인생에 직면하는 위기는 의외의 상황에서 닥쳐온다. 

  예를 들어 약혼을 핑계로 도망가려고 할 때 섬인데 배가 없을 때.


  “......배가 없다니?”

  “뮈벤영주님. 요즘은 한창 가르 카스 항구가 황금기를 맞는 봄이란 말입니다. 겨울동안 다 먹은 식량을 구하려면 오레마이아로 가야하고 보리가 한창 익는 요즘에 배가 남아날 리가 없잖습니까.”

  “그따위 변명말고 왜 나의 사선이 없냔말이다!”

  “지난 여름에 폭풍으로 줄이 끊겨 떠내려가지 않았습니까?”

  “......그랬던가...”


  어, 어? 그럼 대륙에 못가는건가? 도망을 못가는건가? 오빠를 못만나는건가?

  대륙을 못 구하는... 여기까진 아니지.


  “안돼요!”


  아버지는 놀란눈으로 아에사를 쳐다보았다. 


  “......아에사, 급했던 모양이구나. 하지만 다 큰 처녀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게 아니에요!”


  아에사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피부가 하얀걸 보니 일꾼은 아니군. 건물에 틀어박혀 계산이나 심부름하는 아이인가 보다. 소년은 들어오는 순간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를 보고 바짝 얼어버렸다. 그래서 조합장은 무슨 일인지 직접 물어야 했다.


  “뭐냐”

  “아! 에, 조합장님, 어제부터 배가 하나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오오, 파도의 신이 내게 미소짓는구나! 배가 하나 들어왔다는군요! 아니, 들어와있었다고? 그런데 신고를 안했나?”

  “상관없어. 아니, 어제 밤에 선장 한명이 내게 찾아왔던 것 같군. 혼인세를 나도 내라고 그 선장을 통해 서신을 보냈다나. 어쨋거나 규모는?”

  “라틴 급. 소형입니다.”


  아버지는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내는것같더니 턱을 받치고 말했다. 아버지는 항상 고민할 때 저런 폼을 취하고 술을 마시던데. 아에사는 그런 생각을 하면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합장은 이미 그런 버릇 쯤은 알고 있는지 그런 폼을 취하기 무섭게 술을 꺼내왔다.


  515년. 남부 아밀레스산 포도주. 상단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함께 살다보니 눈도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랄까. 상술은 영 미숙하지만.


  “그럼 혼수품을 모두 옮기기는 힘들텐데...”

  “그냥 저만 가도 되는데...”

  “아에사,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치마끈 ?은 여자 취급받는다.”


  대륙의 어느 남자도 아에사 같은 귀품있는 미녀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조합장은 질린 표정으로 우리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선장님, 선장님. 좋은 날씨죠?”

  아에사는 혼자 갑판위에서 통통 뛰어다니며 좋아하고 있었다. 


  '신께 맹세코! 실언이나 망언을 일삼지 않겠어요.'

  '우... 제길. 약혼일자까지 늦으면 예절도 없는 사람으로 찍힐 테고 너만 보내자니 유블 가문에서의 일이 걱정되는구나. 게다가 배는 길드 소유도 아니고 외부인의 배. 어쩔 수 없군 작은 배니 혼수품을 나눠서 실어야겠다. 너는 먼저 가르카스 항구로 가서 길을 떠나거라 나는 나중에 나머지 혼수를 가지고 뒤따라가마.'

  

  늙은 선장 사르킨 칸은 갑자기 고급손님을 모시게 되어 황당했지만 여자라는 점에 더욱 당황했다. 그리고 배에 타기 전까지 얌전하던 처녀가 갑자기 배가 떠나기 무섭게 저렇게 팔짝팔짝 뛰어 다니는 것이다. 치마가 펄럭일때마다 슬쩍 슬쩍 드러나는 흰 스타킹을 입은 매력적인 다리가 늙은 선장의 혼을 빼놓았다. 음흉한 눈으로 아에사를 바라보다가 순간 질문한걸 깨닫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군요, 이렇게 배를 운행하기에 좋은날씨도 드문데.”

  “근데 왜 머리를 마구 흔들면서 말해요?”

  “...비밀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뛰며 좋아하시는지요?”

  “음음, 그런데 대륙까지 얼마나 걸려요?”


  사르킨 칸은 말 돌리기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계속 날씨가 좋다면 앞으로 7일. 날씨가 조금만 변덕을 부리면 10일입니다.”

  “에에엑! 10일 씩이나요?”

  “그렇습니다, 레이디 아에사”

  “바다는 쭉 직선길로 갈 수 있지 않나요?”

  “그건 노 젓는 노예가 있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대륙에서는 노예제도를 금지하지요. 바람으로 가는 배는 조금만 비틀어져도 방향 바꾸기가 힘들어지거든요. 대개 비가 오면 바람이 역풍으로 불기에. 뭐, 해류를 잘 탄다면 갈 수 있지만 가르카스 만에서는 해류가 굉장히 변덕스럽군요. 마치 자연의 힘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배 안쪽에서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나왔다. 조라였다. 아에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라를 호위직으로 데려가겠다고 했고 호위직이 한명 쯤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뮈벤은 흔쾌히 그것을 허락했다. 


  “조라!”


  그를 보자 아에사는 조금 긴장하고 멈춰섰다. 아무리 어젯밤에는 사이가 조금 좋아졌다고 해도 그는 그녀의 약점을 알고 있다.(헛소문이라고 무시해버리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아에사로선 상상도 못했다)


  “아에사 아가씨. 갑판에서 그렇게 뛰어다니면 선체안의 선원들이 놀랍니다.”  “으응.”


  아에사는 고개를 조금 끄덕이곤 재빨리 선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사르킨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라에게 말을 꺼냈다.


  “자네, 저 아가씨와 무슨 사이인가?”

  “호위직입니다.”


  조라는 그냥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