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채널

 “좋습니다. 딱 두가지 소원만 들어주십시오.”

  “두가지? 그게 뭐지?”


  아에사는 바짝 긴장했다. 만약 그가 몸을 요구한다면 거부할 수 있는데까지 거부해야 했다. 그러나 끝까지 몸을 요구해온다면 결국 그녀는 그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죽인다,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소름이 바싹 끼쳤다.


  ‘그러고보니, 도리스는 죽었을까?’


  아마 지금쯤은 살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밤 내내 내버려 둔다면 피를 많이 흘려 죽고 말겠지. 그를 구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를 구한다면?


  ‘구할 수 없어...’


  생각에 빠져있던 아에사는 사내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에?”

  “...다시 말하자면, 저를 대륙으로 보내달라는 겁니다.”


  아에사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치미가 풍기는 그녀의 표정에 사내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에사는 아에사대로 의아한 감정에 빠졌다. 대륙으로 보내달라니, 생각보다 소박한 소원이다.


  “아가씨는 내일 대륙으로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수행원 삼아서 함께 보내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이 섬을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대륙으로 가서 빛을 보렵니다.”


  아에사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몸을 뺏길 염려도 소문에 대한 걱정도 사라졌다. 그녀는 기쁜 나머지 사내를 껴안았다. 사내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비틀거렸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고마워! 아저씨, 이름이 뭐지?”

  “조라입니다. 조라 윈드넬.”

  “고마워요. 조라.”


  아에사는 존댓말까지 해가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곤 그녀는 손을 흔들며 저택으로 다시 달려가 버렸다. 사내는 웃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에사는 복도를 달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두 번째 소원은 뭐지?”




  다음 날, 아에사는 이미 일어나 침대에 앉아있었다. 헐렁한 잠옷만 입고 있었지만 부드러운 머릿결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아침 햇살에 빛났다. 무표정하면서도 뚜렷한 이목구비는 아침의 요정을 상상케 했다. 그러나 그 머릿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고민들이 서로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밤새 내버려뒀으니 틀림없이 죽었을거야... 하지만 사람을 죽이다니.’


  만약 그를 죽이지 않았으면 자신은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고 말았을 것이다. 도리스는 틀림없이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닐테고 그럼 미노타 자작가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혹은 그것을 빌미삼아 계속해서 몸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귀족은 정당한 사유만 있다면 평민을 죽여도 벌금형으로 끝난다. 도리스는 자신을 능욕하려 했으니 틀림없이 사형을 당할 죄였다. 그러나 그 죽이는 역할은 기사가 해야 할 일이지 레이디가 하는 일은 아니다. 그 때문에 아에사는 정당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 시체를 확인하자. 죽으면 어쩔수 없는거고, 아직도 살아있다면... 치료해주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그 자의 처분을 결정하자.’


  아에사는 생각을 마치고 바로 일어났다. 저택에서 절벽 쪽이 보인다면 좋을텐데 아쉽게도 저택에서는 돌절벽 위로 무성하게 자란 기생나무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에사는 저택 뒤편으로 향했다.


  저택 뒤편에 도착한 아에사는 물끄러미 비석 앞 피투성이 바닥을 쳐다보았다.


  “없어...”


  죽은 도리스도 살아있는 도리스도 없다.

  아에사는 혼란에 빠졌다. 살아있었던 걸까? 어떻게 움직여서 간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그를 발견해서 데려간건가? 어느 쪽이든 최악이다. 그는 치료받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고 치료만 잘 받으면 오늘부터라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데려갔다면? 바닥에는 아직도 찢어진 자신의 옷조각들이 일부 떨어져 있었다. 그 옷조각들은 섬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옷감으로 아버지가 대륙에서 직접 사다준 옷이었다. 게다가 도리스는 바지까지 벗고 있었으니 상상하기는 쉽겠지.


  아에사는 정신을 넋놓고 있는 사이 어느새 자신이 다시 정원입구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조라와 아버지가 있었다. 조라는 뻣뻣한 자세로 아버지에게 어젯밤 일을 고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이게 전부였다.


  아에사는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도리스의 일을 아버지에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때 아버지가 아에사를 발견하고 의아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아에사? 뭐하는거냐. 잠옷만 입고.”


  그제야 아에사는 자신이 잠옷만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드러운 실크로 짠 연분홍색 치마 잠옷이 부드럽게 흔들거렸다. 생각에 빠져 있어서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정말 정신을 어디다 두고다니는건지.’

  “에, 잠깐 산책을 하고 왔어요. 좀 일찍 일어나서.”

  “아무리 이른 아침이라고 해도 그런 꼴로 다녀서는 안된다. 너는 숙녀잖니.”


  그러면서 그녀의 아버지는 겉옷을 벗어 아에사에게 입혀주었다. 아에사는 조라에게 슬쩍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아에사는 자신이 어제보다 더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에사는 부끄러움에 재빨리 저택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뒤를 따라오며 점심때 쯤 출발할 예정이니 옷가지 따위를 챙겨두라고 했다. 이미 모든 혼수 준비는 끝난 듯싶었다.


  옷가지를 챙기라고 해봐야 다시 돌아올 일도 없을 것 같으니 옷장의 옷을 모두 가져가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