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채널

  방으로 올라온 아에사는 새로 솟는 분노와 슬픔 때문에 자꾸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대륙에는 뭔가 안 좋은 게 있어서 사람을 자꾸 불행하고 슬프게 만드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끝없이 계속되는 불행을 설명할 수 없었다. 아에사는 침대에 놓인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는 흐느꼈다.


  노예문서를 내밀며 비열하게 웃던 조라의 모습

  다정하게 손길을 내밀고 자신을 씻기던 조라의 모습

  광포한 바다, 거친 숨결, 더러운 오탁, 신음 소리, 점점 알 수 없는 물건처럼 변해가는 조라와 이상한 행동. 증오했고 또 미워했다. 몇 번이고 파멸을 갈구했다. 복수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대로 조라를 두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복수다.

  간단하잖아? 도리스의 목을 물어뜯은 모르덴티아가 말하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복수......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미안하다고해서 다행이라고. 죄에 대한 반성을, 용서를 구하는 행동을 처음으로 봐서 다행이라고. 대륙에는 불행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래. 좀 더 강한 힘만 있다면.

  아주 강한 것도 아니고, 불행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힘만 있다면.


  다프네는 아에사를 안쓰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아에사는 울음을 그치고 그저 멍하니 엎드려 있었다. 다프네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스다듬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긴 금발은 비단과 같이 부드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아에사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똑한 코와 큰 눈망울이지만 잔잔하고 깊은 푸른 눈동자가 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동시에 나무에서 태어나 나무들 사이에서 자라나는 엘프들다운 생기있는 느낌이 그녀를 왠지 깊숙이 끌어당겨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다프네가 입을 열었다.


  “아에사.”


  아에사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누구지?”

  “조라에요. 조라 윈드넬. 절 배신했어요. 착한 척, 인정 많은 척하더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절 괴롭힐 때도 방관하고만 있었어요.”


  다프네는 그녀에게 방긋 웃어주었다. 다프네는 힘이 있고 아직 세상의 쓴 맛 같은 것은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서 누군가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슬픈 일이다. 다프네는 아에사를 일으켜 그녀의 얼굴을 가슴쪽에 꼭 안아주었다. 침대 발치 쪽에서 모나시라는 이름의 백발의 소년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에사는 당황해서 몸을 움찔 떨었지만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과 포근함, 그리고 심장소리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자신이 두 살때 돌아가셨다던 어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리라고 생각했다.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다프네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에사는 그 기분좋고 아늑한 느낌의 노래에 혹시 성가일까, 했지만 그다지 신을 찬양한다던가 하는 내용은 없었다.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마음을 산산이 흐트려 놓는다.

  욕망의 대상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백발의 소년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노래에 취하는 느낌이 들어 아에사는 눈을 감았다. 다프네의 긴 백금발의 그녀의 코 근처에서 흔들렸다. 다프네는 참 노래를 잘 부르는구나, 하고 다프네는 생각했다.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맴을 버리고

  속박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노래가 멎었다. 아에사는 어째 자신이 잠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눈을 뜨기 싫은 기분. 눈물은 말라 잠의 요정이 뿌린 꿈의 가루처럼 자신의 눈을 눌러 붙이고 있었다. 다프네는 조용히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눈을 뜨면 이 느낌이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에사는 눈을 감은 채로 다프네에게 물었다.


  “무슨 노래에요?”

  “안 잤군? 나는 이걸 세 번째 파트까지 가기 전에 자버렸는데. 으음, 엘프 족에게 전승되어 오는 노래다. 우는 아이 잠재우는 노래지. 어릴 적에 엘프 숲에서 배운 노래라곤 이 노래 하나밖에 없어. 나머진 성가뿐이지. 하지만 이 노래는 정말 마음을 편하게 해주거든.”


  확실히 그랬다. 엘프 족의 노래라면 엘프가 이 노래를 불렀을때 뭔가 특별한 언령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정말 두 번 다시 우울한 생각이 찾아들지 않을 것처럼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으니까. 아에사는 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옆으로 누워 다프네의 손을 꼭 잡았다. 흰 장갑이었지만 부드러운 실크 아래로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아에사는 이제 가벼운 이야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결혼식에 가던 중이었어요.”

  “결혼식? 아아.”


  다프네는 눈을 뜨고 그녀의 흰 웨딩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밖에 가슴과 배부분에 은색 받침을 두어서 예식용과는 조금 달랐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이었다.


  “누구의 결혼식? 아에사?”

  “으음...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하지만 결혼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거에요. 제가 그 결혼식을 끝장낼 거거든요.”


  다프네는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에사는 그만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확실히 그녀는 귀엽다. 연상이지만, 천진무구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저를, 이제까지 지은 죄와 앞으로도 지을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을까요?”

  “회개만 한다면 가능하지. 회개한 자는 누구든 구제받을 수 있어.”

  “에이, 그러면 못하겠네요. 저는 어찌되든 그 결혼식을 끝장낼거에요. 그리고 회개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정말로 제가 회개하는 지 알 수 없는걸요. 신을 정말로 본적도 없는데.”


  그러자 다프네는 입을 다물었다. 아에사는 혹시 그녀가 화가난건 아닐까, 싶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더니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다프네가 말했다.


  “신을 보여줄까?”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