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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강물




~푸른 달은 가라앉아(Blue moon sinking)~


  1.


  태양이 창공 가득한 어둠을 세상 등 뒤로 밀어냈다. 암흑을 집어삼킨 서부 대륙 특유의 맑고 따스한 볕은 오늘따라 지독히도 괴로웠다. 작게 열린 문 틈 사이로 네모진 주홍빛 빛은 낡은 가죽 신발을 밝게 도려냈고 동시에 나는 뜨거운 모래에 갑작스럽게 닿은 듯 한 고통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문을 도로 닫았고 쿵- 하는 커다란 문 울림소리와 함께 작은 먼지가 일어 목이 텁텁했지만 발등의 아픔 덕에 얼굴을 사정없이 구기면서 짓씹고 있는 얇은 입술 사이로 나직한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양손으로 움켜진 빛에 닿은 왼쪽 발은 뜨겁게 달궈진 날카로운 쇳조각으로 베인 느낌 덕에 더러운 쓰레기와 세월에 묻힌 먼지들로 까맣게 그려진 바닥을 마구 굴러야했다. 


  한참을 쓰디쓴 소금절인 상처와도 같은 고통에 시달리던 중에 한 요정이 시끄럽다며 일어나 바닥을 구르는 나를 보고는 급히 달려와 생전 듣지도 못한 이상한 말을 외치자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통증이 가셨다. 탁자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자다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양미간에 살짝 그려진 불안함은 맑은 물감으로 색칠해 놓은 음영이 희고도 맑은 뺨을 타고 내려와 붉게 몽오리져 터질 것 같은 장미 빛 입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조심해. 너에게 태양은 이제 적이야.” 


  그녀의 말은 이해 돼지 않는 복잡한 끈이었고 이해하지 못한 나는 실을 풀지 못해 얼굴 가득 의문 띈 입가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네?” 


  씁쓸히 넘기는 그녀의 흑진주 빛 머리칼은 애처롭게 어깨위로 흘러내린다. 


  “너는 죽었어.” 


  새로운 끈이 알 수 없이 복잡한 끈에 엉키어 더 이상 풀 수 없는 끈이 되어 버려 나에게로 굴러왔다. 하나도 이해돼지 않는 말 중 납득할 수 없는 점은 나는 움직이고 있는데 죽었다는 말이었다. 이 요정이 미친 걸까? 어째서 아까부터 이상한 말만 하는 거지? 난 이렇게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녀는 내 얼굴에 가득 핀 의아함과 의심 어린 표정을 보고서도 불쾌한 억양 하나 없이 차분한 어조로 또렷이 이야기해나가기 시작했다. 


  “너는 그날 밤 그림자가 거꾸로 지는 그 섬에서 차가운 모래바닥과 함께 식어가고 있었어. 나는 너의 노래가 좋아. 노래를 듣고 싶었어. 피로 살려냈어.” 


  네모진 천장이 동그랗게 말아 올라 틀어지더니 갑자기 불빛을 중심으로 찌그러지며 뿌옇게 일렁거리다 차차 어둠으로 물들었다. 곧게 떠진 긴 속눈썹 아래로 맑게 고인 동공은 눈앞에 그려진 그녀를 아름답게 투영하는데 알 수 없는 말들로 뒤죽박죽 된 머릿 속은 모든 것을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검은 안개와 미식거리는 일렁임으로 그려냈다. 


  거짓말이야. 

  난 살아있어. 


  살아있기에 이리 따뜻한 뺨에서 요정의 고운 눈동자처럼 투명한 눈물이 흐르고 살아 있기에 앞에 앉아있는 그녀의 보드라운 숨결이 내 머릿결을 타고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것이다. 


  아니라고 말해줘. 


  난 살아있잖아. 이 요정을 보고 있잖아. 이 요정도 날 보잖아. 난 말하잖아. 이 요정도 말하잖아. 왜 아니라고 말하지 않아? 금방이라도 그 예쁜 입술로 웃으며 장난이었다고 말할 것 같은데. 왜 말하지 않아. 말해줘 요정아. 



  난 살아있지? 



  곧게 흘러내린 따스한 눈물 한 방울 속에는 슬픔 가득 담긴 간절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깍지낀 두 손은 미세히 떨리며 무릎 위에서 불안하게 뛰고 있는 심장의 느낌을 전해 주었다. 변하지 않는 눈동자는 언제나 흑색의 맑고도 짙은 동공으로 깊게만 나를 바라보아 가슴을 저려오게 한다. 무슨 말이든 이리 내 머리를 망가트리는 얼음 조각 같은 비수는 늘 같은 입술로 흑 빛 동공을 일렁이며 말한다. 


  진실을. 아픔을. 슬픔을.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살짝 기울어진 요정의 고개와 하얀 목덜미 사이로 푸른빛과 은은한 보라 빛 감도는 머리카락이 유수처럼 흘러내려 테이블 위에 잡을 수 없는 꿈처럼 어지럽게 수놓아 미치도록 나를 바라본다. 


조각 같은 그녀의 얼음장같은 차디찬 손결은 따스한 내 뺨의 눈물을 흠처 간다. 너무도 차갑고 외롭고 춥기만 하다. 반쯤 잠긴 눈동자는 살짝 감겨진 눈꺼풀 아래로 길게 그려진 새카만 속눈썹에 아른아른 가려져 손끝에 묻어난 맑은 눈물 한 방울을 입으로 훔친다. 


  “에이멘 드 미노타.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꾸는 나약하고 맑은 자.” 


  살짝 침 넘어가는 소리가 빈 방안에 커다랗게 울린다. 내 것. 


  가까이 온다. 커다랗고도 아름다운 눈 속에 박힌 검은 동공은 미세한 검은 줄을 사방에 둘러쌓고는 천천하고도 조심스럽게 내 눈과 가까워진다. 머리카락에서 풍겨져 나오는 달콤하고도 청아한 향은 태어나서 한번도 맞아 보지도 못한 그런 향인데, 꿈에서도 볼 수 없던 맑은 빛 간직한 연녹빛 초원을 떠오르게 한다. 오똑하게 솟아오른 코는 점점 가까이 뜨거운 숨소리로 볼가를 간지럽히며 세월만큼이나 당연하게 다가와 색 바랜 메마른 내 입술과 촉촉히 젖어 빛나는 붉은 입술을 서서히 감기는 눈동자와 함께 살며시 포개졌다. 


  넌 죽었어. 


  예전의 너는 이미 세월의 풍파 속에 묻혀 청 빛과 녹 빛을 수없이 반복하여 뿜어내는 깊은 바다 속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 


  넌 살아있어. 


  나를 위해 노래 불러줄 너는 나로 인해 살아있어. 끝없이 방황하는 나의 길잡이가 되어준 너는 나를 위해 살아있어. 


  미지근한 것이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부드럽게 핥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더니 안으로 들어와 내 모든 것을 음미한다. 


  알아요. 세상 모든 것의 나는 시간 속으로 사라졌지만 당신을 위한 나는 영원할 테지요. 


  입 안 구석구석 퍼지는 그것은 겉칠은 내 숨결에 아랑곳하지 않고 향기로운 숨결로 희미하고도 몽롱한 기억을 잡아 놓아주지 않는다. 본능적인 신음은 몸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고 나도 그녀도 어둡게만 비춰지는 암흑의 조명에 취해 어머니의 바다를 헤엄쳤다. 


  나는 멀어지는 의식속에 아주 오래전, 자신의 아릿한 추억 속에만 남은 한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이제는 볼 수 없겠지. 희미한 추억 속에나 존재했던 태양의 영광의 빛을 머금은 아름다운 머리카락도. 짙게 감겨진 감정 없는 고목같이 조용히 잠들어 버린 작은 얼굴과 희미한 숨결로 꿈속을 방황하는 얼굴을. 탁자에 엎어져 머리채를 휘갈긴 소녀의 이마를 살짝 집어 본다.

  햇빛아래 서서 누구보다도 밝고 아름다웠던 너에게. 

  산 자이어도 안되고 죽은 자이어도 안돼는 나이기에 미안해. 


  죽지 않고 살지 않은 자가 머무는 집밖에서 소리 없이 천천히 세상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소년의 머리 빛 석양은 과거를 등지고 새로운 밤을 위하여 오색 빛 가루들 속에 홀연히 빛나는 그의 동생을 떠올린다. 죽음 빛에 물들은 암흑은 아름답던 태양의 영광을 집어 삼켜 새카맣게 물들인다. 


  다시는 볼 수 없을 테지.

  그 영광의 빛을 머금던 찬란한 너의 과거에서나 볼 수 있었던 태양의 금빛 머리를. 





  아에사가 미노타 섬을 떠난 개국력 525년 9월 7일.

  아에사 드 미노타의 오빠 에이멘 드 미노타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