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채널

TIME STREAM

시간의 강물



막간

~임계점(critical point)~



  ‘내 이름은 이젤바야. 이젤바 엘리에솜. 이젤바라고 부르면 돼.’


  요정은 자신을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공허한 눈빛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지고난 뒤 바싹 말라있던 섬의 해변가는 어느새 떠오른 월광에 창백한 푸른 빛으로 물들어갔다. 사각사각 모래알이 발가락 사이로 스쳐지나갔다. 달이 푸른빛으로 밝아 바다고 해변이고 모두 파란색을 띄고 있었다. 나의 피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은 조금 이질적인 경외감마저도 들 정도의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다.


  그 색을 보며 나는 유년기의 한 소녀에 대해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소녀는 파란색 옷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드레스도 대개 파란색, 하늘색이 아니면 연녹색과 같은 푸른색 계열이었다. 그 아름다운 드레스들은 그 작고 귀여운 아이와 참 잘 어울렸었는데. 그녀가 차려입고 들판에 뛰어들면 들판의 꽃들은 몇배 더 아름다워졌고 해변가에서 태양과 함께 물장구 치는 그녀를 보면 태양은 몇배 더 밝게 빛났다.


  찬란한 금발과 지금은 기억 속에밖에 남지 않은 아름다운 내 동생.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억도 없이 그저 입에서 멋대로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눈물 속에서 흔들리는 미소는

시간의 시작으로부터의 세상의 약속

지금은 혼자지만

두 사람의 어제로부터 

오늘은 다시 생겨나 반짝여요

처음 만났던 날 처럼

추억 속에 당신은 없어요

산들바람이 되어, 뺨에 스쳐와요

나뭇잎 사이로 빛이 비치는 

오후의 헤어짐 후에도

결코 끝나지 않을 세상의 약속

당신이 가르쳐 준, 밤에 숨어있는 따뜻함.

추억속에 당신은 없어요

시냇물의 노래에-  

이 하늘의 빛깔에-  

꽃의 향기에-

언제까지나 살아요


  “네 노래는 아름다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요정, 아니. 이젤바는 날개를 흔들어 내 어깨에 다가와 앉았다. 그녀의 숨결이 들릴 정도로 가까이, 내 귓가에 앉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달은 마음에 들어?”


  그 순간 나는 뭉클한 감정에 가슴이 쓰라려졌다. 달은 마음에 드냐구? 그 말에 내포된 수많은 의미들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해는 회피의 대상일 뿐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 아니다. 이제 어둠과 달, 저 창백한 푸른빛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동요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전부터 울렁이는 느낌을 얘기하기로 했다.


  “뭔가가... 가슴 아프게 내 심장을 자극해. 토할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 뭔가 귀중한 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그냥 방관하는 것 같아.”


  이젤바는 다리를 꼬고 내 목에 기댔다. 나는 그 느낌이 드는 동쪽 바다 너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나로선 고향 미노타 섬을 두고 한 이야기였지만 이젤바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이해했다.


  “동쪽이면 메사해안인데. 그곳에 너를 두렵게 만드는 게 있어?”


  이젤바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는 이제 왕이야. 모든 죽은 자들의 왕이야. 어떤 살아있는 것도 너를 해칠 수 없어. 죽은 자들은 모두 너의 말을 들을거야. 나는 너를 살려내면서 그렇게 했어. 태양이 아닌 어떤 것도 너를 다치게 하지 못할거야.”


  나의 몸은 조금씩 허공에 떠올랐다. 이젤바가 내 몸을 띄우고 있겠거니 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어떤 이름모를 어둠의 형체들이 휘감겨 내 몸을 감싸 위로 띄우고 있었다. 이젤바가 다시 속삭였다.


  “내 피가 그렇게 만들었어. 너는 네 불안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이 있어. 봐, 모두 너에게 복종하고 있잖아.”


  어둠이 그를 추종하듯 떠받쳐 들었다. 밤이었다. 밤이었다. 밤은 칠흙같은 안개의 형체로 에이멘을 짊어지고 왕의 가마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자. 가장 불안한 공포를 털어 버려라. 바다너머로, 바다너머로. 내 가슴을 아릿하게 괴롭히는 고통을 파괴하라.


  어둠에 사물이 녹아드는 그 임계점 속에서 나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메사 해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