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채널

아에사는 옷조각을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정원을 감싼 담벼락 모퉁이에서 문쪽을 내다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아빠는 저택에 경비를 두명씩 세우기 때문에 도리스가 아니더라도 한명이 더 있을 확률이 높았다. 평소때라면 상관없겠지만 윗도리가 찢어져 겨우 가슴만 가리는 상태론 도저히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녀의 흰 상반신의 나신은 애매한 반달임에도 밤 속에서 푸르게 빛났다. 이때만큼 자신의 흰 피부가 야속한 적은 없었다. 아에사는 조심스럽게 종종걸음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틀림없이 아무도 없다고 한 판단에서였다. 그때, 정원으로 통하는 대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고 미처 멈추지 못한 그녀는 그와 부딪혀버렸다.


  “아얏!”

  “윽, 누구냐!”


  아에사는 뒤쪽으로 나동그라졌지만 상반신만 가죽갑옷을 입은 사내는 뒤로 멈칫하고 끝났다. 남자는 재빨리 자세를 추스르며 자신과 부딪친 자의 정체를 파악했다. 다름아닌 자신이 일하는 저택의 주인 아가씨인 아에사였다. 그는 당황해서 그녀를 일으키려 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녀는 상의는 완전히 ?겨져 유두가 드러나고 있었고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속피부가 드러나 있자 당황했다. 짧은 치마로 허벅지 일부만 가리는 다리는 팬티조차 입지 않아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경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에사의 긴 금발은 바닥까지 흐트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에사는 울상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가슴만 가리고 일어서려 했지만 경비병의 시선이 신경이 쓰여 제데로 일어 날 수 없었다.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경비병의 눈 속에서 탐욕과 놀라움을 읽을 수 있던 아에사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손으로 가슴을 감싸 쥔 채 몸을 웅크리고 겨우 비틀비틀 일어서 달려갔다. 


  경비병은 놀랐지만 그가 뻗던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긴 머리가 스쳐가자 자신도 모르게 왠지 모를 아쉬움에 탄식을 흘렸다. 평소에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방금 그 모습은 꿈에도 잊혀지지 않을 듯 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은 경비병 말고도 정원에 더 있었다. 



  자신의 방에 겨우 도착한 그녀는 침대에 쓰러져 하염없이 울었다. 왜 하필이면 오늘, 이런 일들이 생기는가. 내일이면 오빠를 찾으러 갈 수 있는데.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던 탐욕스러운 도리스의 눈동자와 피부를 훑는 거친 손길이 아직도 자신의 가슴 위에 남아있는 듯 했다. 아직 결혼 상대는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이미 자신의 몸은 유린당했다. 비록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가슴 깊이 느껴지는 혐오감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들어오면서 만난 경비병은 틀림없이 그 소문을 떠들고 다닐 것이다.


  자작가의 귀공녀, 아름다운 그 미소녀가 상반신을 완전 알몸으로 다니더라. 거기다 치마도 팬티도 안 입고 내 앞에서 마치 박아달라는 듯 벌리더라니까. 응? 그년이랑 했냐고? 아니, 나는 점잖게 귀족가의 자제가 이러면 안된다고 얘기했지. 그러니까 그년도 부끄러운 듯 도망가버리더라고.


  평민들 소문은 으레 과장이 붙기 마련이니까 


  이미 그녀와 안자본 하인은 없고 병사들과도 모두 한번쯤은 붙어먹어봤다더라. 어린나이에 남자 맛을 알아버렸으니까 가서 한번만 달라고 하면 벌려줄거다. 화장실이나 다름 없는 몸이다. 애도 있었다더라.


  아에사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 배게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절망적이다. 만약 그 소문이 아빠의 귀에 들어간다면 단박에 대륙에 보내 버릴테고... 아, 어차피 내일 대륙에 가니까 상관없는 걸까.


  하지만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은 아에사도 원치않았다. 그런 소문은 자작가의 명예를 실추 시킬테고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경비병을 만나봐야겠어.”


  아에사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흠칫 놀랐다. 남자들이란 탐욕에 찬 존재다. 이름도 모르는 경비병이 자신을 음흉스러운 눈길로 훑던것을 보았지 않은가. 어쩌면 그녀의 몸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이대로 둔다면 소문이 퍼져버리겠지.


  아에사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다른 옷을 입었다. 그리고 아끼는 보석 몇 개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치마대신 바지를 입고 상의도 팔을 완전히 덮는 긴 옷으로 입었다. 금발도 질끈 묶었다. 최소한 성적매력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에사는 비척거리며 다시 그 악몽같은 정원 입구로 다가갔다. 밖은 악마의 입처럼 벌리고 아에사를 삼켜버렸다.


  아에사는 남자가 벌써 술집에라도 가버렸을 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남자는 보기보다 성실했던 모양인지 창을 차고 어깨를 벽에 기댄 채 외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에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정말 다행인지 고민했다. 왼손은 오른팔을 꾹 쥐고 긴장된 걸음걸이로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천천히 다가갔다.


  경비병은 뒤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아에사는 이미 마음을 잡고 있었지만 흠칫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경비병은 경비병대로 놀라 바라보았다. 방금 알몸으로(치마를 입고있었지만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저택으로 들어가버린 저택의 아가씨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에사가 다가올수록 경비는 아까의 그 모습이 지금과 오버랩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은 제데로 차려입고 바지까지 입은데다 머리를 뒤로 묶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치마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바지는 꽉 끼어 허벅지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머리를 뒤로 묶어 단정하고 색달라보이는 매력이 있었다.


  아에사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꺼냈다.


  “저... 아까 그...”


  경비병은 아에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까 그 일 마, 말이죠. 무, 무슨일로?”

  “...잊어줬으면 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줬으면 해서.”


  죽었다 깨어나도 그 모습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그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 요점이라고 생각했다. 사내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자 능청을 떨며 말했다.


  “잊으라고 해도...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사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에사는 울상을 지으며 그의 손을 쥐고 말했다.


  “제발 부탁해. 그런 소문이 퍼지면 내 아버지는 고개를 못 들고 다니니까... 무슨 부탁이든 들어드릴테니까, 조용히...”


  경비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좋습니다. 딱 두가지 소원만 들어주십시오.”

  “두가지? 그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