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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 만약 관리자가 그때 떠나기로 결정했었다면
(https://arca.live/b/counterside/55899420)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I: 공익 등장
(https://arca.live/b/counterside/55915019)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II: 스포)리타와 대시는 육익한테 구출받음
(https://arca.live/b/counterside/55929667)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V: 용과 뱀의 윤무곡
(https://arca.live/b/counterside/55949571)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V: 리뎀션 오브 더 킹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Part VIII Part IX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VI: 뉴건담 카린과 겟타팀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VII: 경력사원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VIII: 악마성 로자리아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X: 어둠 속의 왈츠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Part VIII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X: 테라사이드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VI Part V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XI: 눈을 뜬 마왕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XII: 리턴 오브 더 킹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II: 스포)리타와 대시는 육익한테 구출받음 --
몇 주 전에.
동사무소 업무를 마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며 피곤한듯 한숨을 내쉬던 나유빈은 길에서 살짝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이게 뭐지?" 그렇게 대충 흘겨본 유빈은 왼손으로 짚으며 자세히 보았다. '시계? 이건….'
일반적인 시계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것은 카운터 워치가 아닌가.
그걸 확인한 유빈은 딱히 고민하지도 않고 관리국에 전화하여 카운터 워치 분실 신고를 했다. 그렇게 주머니에 대충 넣으며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나유빈.
다음 날….
오전에 분실물을 찾으러 사람이 간다는 전화를 받은 유빈은, 오후에나 그 사람이 왔던 것을 보았다.
그것은, 토가를 입은 중년의 남자. 로봇들에게 길을 물으면서 라틴어를 사용하던 그가, 나유빈을 향해 다가와서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의 유창한 한국말을 하면서 말했다.
"오늘 아침에 전화로 말했던 그 사람인데…." 그리고 남자는 관리국 증명서를 건네줬다. 사람이 없어 한산한 가운데, 관리국 증명서에 인쇄된 남자의 얼굴을 비교하고 일치하자, 나유빈은 작은 비닐에 담아둔 카운터 워치를 바로 건네줬다. "여기있습니다."
증명서를 서랍에다 집어넣는 유빈. 남자는 그를 보면서 물었다. "고맙군, 그런데…." 나유빈이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이건 카운터 워치야. 자네가 이것을 주웠을 때, 스스로 쓸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하진 않았지?"
"글쎄요, 이게 바로 제 직업이니까요."
"그것은 책임과 의무에 의해서 그렇게 하길 원했단 말인가?"
"뭐… 제 일이니까요."
토가를 입은 남자는 단지 흠, 하면서 중얼거리고는, 인사를 하면서 나갔다.
"대답해줘서 고맙네. 수고하게."
"네. 살펴가세요."
뚜벅뚜벅 걸어가는 남자와 그를 말없이 그냥 지켜보던 나유빈.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었었다. '관리국이 나타났던 이후, 여러가지 문화권의 사람들이 보였지만… 요즘 세상에 토가를 입은 사람은 처음 보는데. 뭐… 상관없나.'
그날 딱히 다른 일은 없었다. 그냥 집에 가기 전에, 에이미랑 지수랑 함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서 그냥 잠을 자던 나유빈. 그리고 이상한 꿈을 꾸었다….
.
.
.
"유빈 군, 유빈 군!"
"음… 어…" 졸린 눈을 비비면서 겨우 일어나는 유빈. 하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팔을 누군가 톡톡 건드렸다. 무언가 차갑고 딱딱한 느낌. 뭔지 몰라 옆을 바라보니, 검은 상자처럼 생긴 기계가, 옆에 달린 집게 팔로 자신을 쳤던 것이다. "뭐, 뭐야?"
"뭐야가 아닐세, 나네. 자네 사장도 못 알아보는가?"
"네? 사장? 뭐, 뭡니까, 당신은?"
"가서 세수나 하고 오게. 뉴 에이지를 통해서 자네의 재능을 알아봤다고 고용했는데 잘못된 선택인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고 (자칭)사장은 덜컹거리면서 나갔다.
유빈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뭔가 이상한듯,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의 양 손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내 손이, 그림처럼 변해있어!" 그리고 갑자기 문을 똑똑 두들기더니 카린이 들어오며 커피를 책상에 내려놨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또 글이 안 쓰여져서 그런 거예요?"
"아니… 저, 당신은 누굽니까?"
"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스토리 팀에 가뜩이나 두 명 밖에 없는데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고… 유빈 씨 계속 그러면 저 화낼 거예요."
"그, 저, 커피…"
커피 심부름을 내가 언제 시켰냐고 물으려고 했던 유빈이었지만, 그걸 잘못 들었는지, 카린이 갑자기 화내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 씨! 커피 포트라고 부르지 말라고!!"
유빈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마치, 아니 진짜로 찔러 죽일듯이 노려보는 카린. 그 기세에, 유빈은 당황하며 사과했다.
"아, 미, 미안해요."
"흥!"
그리고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서 머리를 감싸며 자판을 타닥이는 카린. 그 모습을 보며, 유빈은 머리가 매우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근데 바로 지나지 않아, 카린은 자판을 쾅쾅 치더니, 머리를 쥐어뜯으며 끙끙대었다.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유빈은 궁금하게 생각해 카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며시 보았다. 사실 스토리 팀이라고 했었기에 대충은 예상이 갔지만… 유빈이 봤었던 것은 그냥 별 것 아닌, 유미나란 캐릭터가 제이크란 캐릭터와 같이 허신을 이기기 위해서 협공을 하는 내용이었었다.
'뭐야 이거…? 게임 스토리?'
하지만 유빈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자신은 방금 전에 여기서 깼던 거니까… 게임의 제목이 뭔지도 몰랐다. 카린은 자신만의 고뇌와 고통에 사로잡혔는지 그냥 계속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글 쓰는 게 그렇게 힘든가…?'
날 때부터 천부적인 재능에 축복 받은 유빈은 그런 카린을 전혀 이해하질 못했다. 아무튼간, 살며시 다시 자신이 원래 앉아서 자고 있었던 자리까지 갔다가… 도대체 뭘 해야만 할지 몰라서, 그냥 카린에게 조용히 말했다.
"어… 저,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께요, 하하…."
"…………."
마치 죽은듯이,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질 않고서 가만히 그러고 있는 카린. 유빈은 저 여자가 언제 소리를 지를지 몰라서 그냥 서둘러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왔다.
'여긴 대체 어디인지….'
복도를 걸으며 여러 사람과 마주쳤다. 대부분은 바쁜지 그냥 고개 숙여서 대충 인사하고 지나가는 정도.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진짜 현실에서 봤던, 살색의 생생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냥 그림처럼 그려진 사람들만 보인다. 마치 지금 자신의 몸 상태와 같이.
"진짜 곤란하군… 음?"
"찾았다! 유빈 씨,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어?!"
유빈은 갑자기 보라색 머리의 꼬마에게 귀를 잡아당겨졌다.
"아, 아얏! 뭡니까, 당신은?"
"너 찾느라 얼마나 고생한지 알아? 네가 스토리를 빨리 내질 않으니까 우리 작업도 점점 뒤처지고 있잖아!"
"잠깐… 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거 좀 놔요!"
"놓으면 어딜 또 도망칠려고! 빨리 따라오기나 해!"
로자리아는 유빈의 귀를 잡으며 다른 방까지 끌고 갔다….
그곳에는 이미 에델도 기다리고 있었다.
"흐음… 흐음… 이제 오셨네요, 유빈 씨. 그게, 클라레스라는 캐릭터의 컨셉은 알겠는데, 기술명이라던가… 그런 걸 명확하게 정의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맞아! 뭐 이렇게 대충 던져주면 우린 뭘 어쩌라는 거냐? 부서간 소통이 제대로 안 되고 있잖아, 정말!" 로자리아는 화내면서 서류를 유빈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아…." 유빈은 땅에 떨어진 서류를 대충 집어서 훑어보았다. 확실히 기술명이 제대로 기입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쭉 보다가 왠지 장난기가 발동한 나유빈. 그래서 로자리아와 에델에게 물어보았다.
"저… 그러면 그냥 멋지게 보이는 이름만 정하면 된다는 거죠?"
로자리아는 불만스러운 듯, 유빈을 째려보며 말했다. "멋지건 말건 그냥 빨리 말을 하라고. 시간 없어, 네가 시간 너무 끌면 나중에 도마 녀석이 나 혼자 일도 안 하고 도망갔다고 의심한단 말이다."
그러자 유빈은 눈을 감으며 조용히 웃었다. "후후… 그럼 이건 어떨까요? 클라레스가 쓰는 특수한 검… 그리고 그에 맞는 멋지고 특별한 기술명… 용아, 화룡멸겁…!"
로자리아는 시큰둥하게 대충 폰을 꺼내서 이름을 받아적었다. 그러자, 에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저, 유빈 씨… 이 사람, 중세 유럽의 귀공자 같은 느낌인데요오…."
유빈은 그냥 무시하며 다음 말을 했다. "궁극기는… 천강… 역일섬!" 그리고 로자리아는 대충 확인하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용아 화룡멸겁하고 천강역일섬 맞지?"
자신의 시적인 센스를 모두 발휘해, 위대한 작명센스의 편린을 보여줬는데도 너무 지루하단 듯이 말하는 로자리아. 유빈은 왠지 충격적인듯,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 네. 맞습니다." 그러자 로자리아는 한숨을 쉬며 나갔다.
"뭔가 지식의 넓이가 늘어나는 듯한 센스군요… 역시 대표님께서 인정하신 분…." 에델은 몽롱한 생각에 잡혀있듯이, 유빈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저…?"
"네? 왜 그러시죠?"
일단 말을 걸긴 했는데, 도대체 뭘 물어야 할지 그것부터 난감해진 유빈. 여기가 어딘가? 아니면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가? 평범한 사람은 그렇게 물어선 절대로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망설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문이 확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뭐, 뭐야?" 나유빈은 놀라면서 옆을 봤다. 에델은 그냥 나유빈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금발의 머리를 한 소녀.
"어휴, 한참 찾았네요! 유빈 씨 맞죠? 게다가 원래 이 세계의 사람도 아니고?"
그때에 갑자기 확 정신이 깨듯이 나유빈이 대답했다. "네, 네! 맞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무언가 그림처럼 생긴 몸을 갖지도 않았다. 이 사람이구나, 자신을 여기서 빼내줄 수 있는 사람이. 그리고 라라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 주무시는 유빈 씨를 불러달라고 누가 요청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제대로 확인을 못해서…. 혼란스러우셨죠? 지금 유빈 씨는 주무시고 계신 유빈 씨의 몸에 빙의한 거예요."
"…네? 자고 있는 저의 몸에 빙의…?"
"아, 자세한 건 됬어요. 저도 바빠서. 그럼 따라오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대충 유빈을 붙잡고 달려나가는 라라.
그리고 당황한 유빈이 이름도 모르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어… 잠깐, 어디로 가는… 게다가 이건 따라가는 게 아니라 당신이 날 붙잡고 가는 거잖아! 아니, 멈춰!! 너무 빨라!!" 하지만 유빈은 뭐라고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눈 앞으로 엄청 많은 빛들이 꿰뚫듯이 지나가는 광경을 보면서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한참 뒤에.
나유빈이 정신을 차렸을땐, 자신도 알지도 못하는 곳에 앉아 있었다. 의자의 촉감은 확실히 달랐다. 무언가 차갑지만 부드러운 신비한 느낌. 주위는 퓨처리스틱한 새파란 불빛이 계속해서 번쩍이는 백색 벽에, 창문 밖엔 무수히 많은 색깔의 별들이 은은히 빛나는 어둡고 광할한 우주가 비춰졌었었다.
맞은 편엔 토가를 입은 남자가 책을 읽고 있었었다. 유빈은 자신도 모르게 제목을 보고서 소리냈다. "디… 벨로… 갈리코?" 그리고 그것을 들었던 남자가, 책갈피를 놓고 덮으면서 말했다.
"깨어났나? 한참 자고 있었지."
"당신은… 낮에 제가 봤던, 카운터 워치를 분실한 분이군요."
"정확히 말하면 일부러 떨어트린 것이었네."
마치 로마의 조각상 같이 생긴 남자. 주위를 둘러보면 이곳은 뭔가 우주선 같긴 했지만 - 진짜 여러 조각상을 비롯해서 많은 장식품도 비치됬다. 그가 카운터 워치를 꺼내 책상에 두었다.
"이것은 애초에 자네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네. 하지만 주기 전에 묻고 싶더군."
"무슨 말씀이죠? 저를 위한 것이라고요?"
"그렇게 말했네. 물론, 받기 싫다면 받질 않아도 괜찮아. 어쨌던간… 그렇지, 자네가 살던 세계 외에도 다른 무수히 많은 세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그러자 나유빈은 방금 전에 보았었던, 그림 같은 사람들이 잔뜩 있던 해괴한 세계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 설마 제가 있던 곳이…."
마치 유감인듯,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은 내가 자네를 정중하게 모셔달라 부탁했지. 낮에 카운터 워치를 돌려준 분이 뵙고 싶다고 전하고, 거절한다면 그냥 관두면 된다고. 하지만 그녀가 억지로 자네를 여기까지 그냥 데려왔어. 나도 당황했네. 자네에겐 미안하군."
"아, 아뇨. 괜찮습니다." 사실 뭔가 짜증났던 유빈이었지만, 저러한 태도로 진지하게 사과하는 남자의 모습에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걸 먼저 묻고 싶군."
"다른 세계에 있는 자네는 대적자로 선택받은 것을 알고있나?"
"대적자라,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왕과 마신을 비롯한 세계의 위협에 맞서는 용사의 역할이라 말할 수 있지. 우리 세계에는 딱히 없었지만."
"다른 세계의 저는, 지금 여기있는 저보다도 강하다는 말씀이군요."
유빈은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었다. "저는 카운터가 아닙니다. 설마, 이 시계를 직접 주시는 의미는 저보고 제 세계의 대적자가 되라는 말입니까?"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자네 세계엔 이미 대적자가 있어. 단지 자네는 대적자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 뿐이니까."
일단 자신에게 뭔가 힘을 준다는 말 자체는, 당연히 자신의 친구와 같다는 말이다. 심적으로 그렇게 안심하자, 이번에는 되려 궁금해졌었다. "잠깐… 당신 세계에는 대적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당신들에게 필요한 무기가 아닙니까?" 그리고 다시 창 밖을 보면서 나유빈이 물었었다. "그것보다 우린 어디에 있나요? 이면세계?"
그러자 남자는 손짓을 했다. 함선의 내부에 어떤 흔들리는 느낌조차 없이 함이 회전했다. 창의 바깥에 태양이 있었다. 그리고 지구를 비췄다. 그것을 돌고 있는 달조차. 또한, 이미 테라포밍이 끝난 화성조차 보여졌다.
"이게 무슨…?"
딱히, 나쁜 의미로 놀라진 않고, 자신이 정말로 우주에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나유빈은 신기하게 밖을 쳐다봤다.
"우린 더이상 필요가 없네. 딱히 게임조차 없이 전쟁으로 이미 정복해서."
"네?"
"진정한 인간의 힘이지, 자네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
"하지만, 이면 세계의 침공은 대체…? 다른 많은 이면세계들은 침식파와 침식체에 의해 더럽혀져 멸망했던 세계들의 잔재라고, 누군가가 말해주긴 했었습니다만…."
그때, 남자는 잊었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렇지, 미안하군. 자네는 대적자가 아니니까.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가 먼저 물어봐야 했었는데. 좋아, 그냥 내가 설명해주는 것이 좋겠군. 클리포트 게임이 무엇인지, 아까부터 말한 마왕들은 무엇인지."
이십 분 뒤….
대충 나유빈이 이해하게 모든 것을 말해줬던 그는, 설명하는 동안 그의 경악스런 표정이나 놀란 표정등을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 설명을 마치자 유빈이 물었다.
"그, 그럴 수가. 그렇다면, 그런 두 자리 수가 넘는 마왕들을 전부 이겼었단 말씀입니까? 게다가 반침식파라는 것조차 발견해서 전투에다 응용했다고요? 하지만 어떻게? 마왕들은 엄청나게 강하지 않습니까?"
"그랬었지. 하지만 애초에 싸움은 무엇인가? 적이 마왕이라 해서 그 이름에 겁을 먹을 것이 아니네. 단지 적의 몸을 부순다면 이긴다는 것이니까."
"아니, 그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까."
"전쟁은 결코 쉽거나 어렵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단지, 가능한가, 불가한가. 둘 중 하나니까."
남자가 손을 흔들어, 책상의 위에 함선의 홀로그램을 띄웠다.
"이것은…?"
"우리가 이겼던 이유는 세 가지네. 첫째는, 침식파에 면역인 나 자신의 육체에서 침식면역인자라는 것을 찾아 연구하고 개발했지. 둘째로 우리 로마 공화국의 군단병은 반물질 라이플로 전부 무장하고 있었었네. 달리 말해, 뭐든 맞는다면 전부 죽는다는 얘기이고. 다만 그것만이 아냐. 셋째로,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유니우스급 표준형 전함을 비롯해… 모든 전함들은 암흑 물질 및 암흑 에너지로 무장했지."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 설마, 관측이 되질 않는 것들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정확하게 그렇다네."
"그걸로 어떻게 마왕을 이겼던 겁니까?"
"보이지가 않으니까."
그러자 유빈이 물었다. "보이지 않았다… 설마? 피하질 못했단 말씀입니까?"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 말했다. "우린 마왕들이 보지 못할 거리에서 진형을 짜놓고, 주위에 다가오면 바로 쏴버리게 반물질 라이플을 장비한 군단병들을 세운채, 레이더에 걸린 마왕들을 향해 암흑 물질들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네. 그것들은 피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었어. 그냥 맞자마자 죽었었지."
그리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우리가 그걸 맞으면 당연히 우리도 똑같이 죽기는 하겠지만 말야. 그렇지만 저들 마왕들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들이 뭐에 맞았는지 이해하질 못했었지."
유빈이 물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굽니까? 아니… 잠깐, 로마 공화국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남자는 잠시 눈을 감고서, 책상을 다시 검지로 툭 쳤다. 그러자 지구의 지도가 책상에 띄워졌다. "묻고 싶네. 자네 세계의 인류는 이런 기술력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었지?" 나유빈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저는 동사무소 직원이라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네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었나 아는가?"
"어렵군요. 저는 이 세계의 역사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말해보지. 우리와 같은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했었을까?"
"그건…."
"어렵게 생각할 것은 하나도 없네. 인류 자체를 하나의 뭔가로 보게. 마치, 자신이 어떤 죽지도 않는 신이 되어서 인류를 이끌 수 있는 누군가였다면. 무엇을 하겠나?"
유빈은 그것을 듣고서, 잠시 망설이며 고민했다. 그렇지만 조금 뒤에 바로 깨달았다. 사실 처음부터 고민해야 할 것도 없었다. "제가 인류 그 자체의 의지라 한다면… 먼저 인류가 서로 싸우지 말고 단지 과학적인 기술력을 개발하여 지금 말했었던 모든 무기들과 함선들을 제작하고 강한 군사력을 통해 마왕들과 싸우려고 했었겠죠."
그리고 유빈은 곧바로 깨달았다. 이런 느낌, 어디에서 보았던가? 마치, 자신 스스로가, 오래 전에 읽었었던 플라톤의 리퍼블릭에서 보여졌던 사람들과 같은 인상으로 느껴졌다.
"그것이 인류의 진정한 정체이자 본질이며, 인간의 힘이네."
"…당신들은 너무나도 빨리 거기까지 도달했던 것이군요."
"인간의 진정한 가능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시대에 이미 보였지. 애초 자연과 지구를 정복한 인간, 그리고 군대를 조직해 외부의 적에 맞서 그것들을 정복하는 남자들과 같이. 이면세계라는 것은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이 아냐. 그것조차 인류 스스로가 넘어야만 하는 또 다른 벽이니까."
그리고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그때의 그리스인 누구도 페르시아를 이길 수 있다 생각하지 못했었지. 하지만 진짜로 그들이 이기며… 인간은 스스로 세계를, 그리고 운명을 바꿀 수 있단 것을 스스로를 통해 알 수 있었지. 진정한 인간의 정신이 거기에 있었네."
나유빈은 이를 보며 생각했다. 정복과 전쟁에 영감을 얻는 모습은 정말 책에서 봤던 로마인과 동일하게 느껴졌다. 그가 말하는 것에 딱히 긍정은 하질 않아도, 그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 진짜 로마인이군요. 이곳엔 로마가 아직도 있는 겁니까? 제가 있던 세계에선 서로마는 고대 시대에 멸망했었고, 동로마는 중세 시대에 멸망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대답했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지만 그런 세계들도 많았더군. 여기서는 AVC 1505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하여 전인류를 통합했지. 최대한 빨리 하려고 노력했어. 그랬기에, 첫번째 이면세계가 나타나기도 전, 천년이 넘는 시간을 확보했었고."
"지금, 인류는 하나의 인류다. 애초 그래야만 했었듯이." 마치 스스로가 그걸 기억한다는 듯 말한 남자에게 왠지 위화감을 느끼면서 나유빈이 물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친자. 그게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제일 처음 했었던 것은…."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스스로가 카이사르에게 그랬듯이, 나도 또한 그를 신격화시켰고, 게르만 민족에 관련된 모든 것을 완전히 정복한 것이었다.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그들의 발할라와 마지막 발키리까지도 로마에 복속시켰었지."
'음? 분명히 자신의 아버지일텐데?' 말투가 어색하게 들리긴 했지만, 유빈은 그보다 더욱 위화감을 느꼈었다.
"잠깐,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죠? 당신은… 대체 누구죠? 마왕과 비슷한 겁니까? 아니면…?"
"로마인은 인간으로 신에 도달했지. 나도 또한 그랬었네. 다만 그것만이 아냐. 우리 세계에는 대적자는 없었지만 관리자는 존재했어."
"…그게 당신이란 말이군요."
"그렇다."
그제서야 나유빈은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곳의 세계엔 로마는 멸망하지 않고, 지금 보이는 이 남자의 손에 의해서 계속해서 정복과 전쟁을 반복하며 인류의 통합을 마쳤었던 것이었다. 또한 세계정복 후에,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촉하듯 기술력을 발달시켜 천 년 넘는 시간동안 이면세계와의 전쟁하고 대비했었었다.
어쩌면 이 세계가, 바로 인류가 마왕에 대항하는 가장 이상적인 궁극적인 시나리오를 집행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그리고 그것을 이끌은 남자가 바로 눈 앞에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필요없으니까 주는 것이군요." 유빈이 게르마니쿠스와 카운터 워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말했다. "아니지, 남는 것을 주는 게 아냐. 자네를 위해서 만들은 거니까."
"만들었다고요? 우리 세계에는 어느샌가 카운터 워치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그것들은 전부 여기에서 만들어진 것입니까?"
"아니. 우리가 마왕을 전부다 죽였던 이후에, 시계들을 입수했지. 이게 있는지도 몰랐었네. 우리들은 단지 역설계를 통해 만들었던 거야. 그리고, 우리가 카운터 워치를 만들어 다른 세계에 있는 남자들을 돕기 위해 보내기는 했었지만, 이것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은 우리도 모르네."
"어째서죠? 다른 세계에 카운터 워치를 보내는 이유는 뭡니까? 그리고 시험을 하는 이유는?"
게르마니쿠스는 등을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애초에 인간은 동물로부터 진화한 것이네. 다른 생명을 할퀴고 찢으며 삼키는 그런 원시적인 욕망에만 사로잡힌 미물. 힘은 그 자체로서 권리지만, 인간이 인류를 위한 질서를 해칠 때, 그건 퇴화한 짐승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니, 나는, 솔직히 다른 세계에 도움을 주길 꺼리지. 왜냐면 우리가 나서야 정말로 결과가 좋을까, 그리고 그것이 진짜로 도움을 주는가."
그리고 그는 창 밖의 허공을 보면서 말했다. "카운터 워치를 얻고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날뛰는 사람도 보긴 했지. 구고… 아니, 기게스라 하면 알 것 같군. 기게스의 반지라는 것을 들어봤나?"
"카운터의 힘을 악용하는 자를 경계하신 것이군요."
"그렇다네. 또한 그렇기에 자네하고 한 번 대화를 하고 싶었네. 그리고 알 것 같더군. 자네는 믿을만한 친구야. 이제 가서 자네의 세계를 돕게. 이건 자네를 위한 카운터 워치야. 자네라면, 힘을 사욕없이 단지 인류의 선을 위해서 쓸 수 있겠지. 인류의 정신은 위대해. 이제 가서 우리의 적에게 인간의 막강한 힘을 알려주게, 전쟁으로 세계를 바꿨었고 스스로의 운명과 숙명에 이겼었던 정복자의 이름들이 과거 무슨 의미로서 불렸는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저희 세계엔 이미 대적자가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차라리 그를 불러서 도와주시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그건 할 수 없네."
"네? 할 수 없다니요?"
그리고 게르마니쿠스가 말했다.
"자네 세계의 대적자는, 타락했기 때문이지."
.
.
.
알파트릭스의 회장이 여러 내연녀를 두었다는 것은 단순한 루머는 아니었다. 그로니아의 하얀 머리칼을 가진 젊은 귀부인도 그의 첩 중 하나였었는데, 그녀에겐 딸이 한 명 있었었다. 어렸을 때부터 마치 영혼이 없는 듯 단지 공허하고 짙은 눈동자로 사람들을 무시하고 사물만을 쳐다보던 소녀.
그 소녀는 다른 아이들과 많이 달랐었다. 인형을 줬어도 관심도 가지질 않았고, 책을 보여줘도 어떤 흥미조차 느끼지도 않았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 반응을 거의 보이질 않으며, 딱히 무언가를 쓰거나 읽지도 않았었다. 단 하나, 장남감을 사줬을 땐 달랐었다. 그걸 갖고 놀기보다, 분해하고, 훑어보고, 다시 조립했다.
어쨌던간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흥미를 보였으니, 귀부인은 그에 기뻐하며 딸에게 더욱 많은 선물을 주었었다. 소녀는 단지 그것들도 또한, 분해하고, 다시 훑어보고, 다시 조립했다. 하루 종일, 밥을 먹고 자는 때를 제외하면 그런 일을 반복했다.
소녀가 관심을 가졌던 다른 것은 밤하늘이었다. 밝게 빛나는 달을 여섯살 때 처음 봤던 뒤로, 소녀는 날마다 밖에 나가서 달을 지켜보았었다. 처음 그 모습을 봤던 귀부인은 딸의 소녀 같은 모습을 보고 좋아했었지만, 몇 주 뒤에, 마치 장난감을 부수거나 조립하는 그런 손짓을 하늘에 대고 하면서, 마치 심연의 바닥을 비추는듯한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귀부인은 자신의 딸인데도 오히려 징그럽고 섬짓한 느낌이 들었다.
소녀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제서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그녀의 목소리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던 모두는 왠지 모를 위화감과 거부감을 느끼면서 그녀에게 살짝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마치 싸늘한 시체가 떨듯, 상당히 기분 나쁜 목소리.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마치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꿰뚫어 보듯 그녀가 말하는 것은 어느 하나 틀리지가 않았었다. 어떤 책도 단지 훑어보고 바로 이해하며 그냥 덮어두고 나갔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뭔가 물을 때는 말하지도 않았는데 머리 속에 있었던 의도에게 맞춰 대답했고, 딱히 명확한 의도가 없이 그냥 말을 걸을 땐 허공을 쳐다보며 무시했다.
'저 아이는 생각을 읽는다.'
그렇게 느끼자 알파트릭스의 모두가 소녀를 피했다. 모든 인간들이 그랬었던 것은 아니지만, 암투와 음모로 뒤덮인 그런 곳에선 자신의 내면을 읽는 소녀를 꺼리는 것은 당연했던 것일지도.
알파트릭스 회장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면서, 귀부인은 소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소녀를 꺼렸었던 회장의 다른 자녀들은 암살자를 보내 소녀와 그 가족을 죽이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실패했다. 용병들은 말했었다. '일단 가족들을 먼저 죽였는데,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도 어떤 반응조차 보이지를 않았다가, 분명히 소녀를 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어디에도 없었다.'
침입할 때 입구를 막고서 서있었던 다른 용병들도 누군가가 나가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몇 일 수색해도 소녀의 흔적이 보이지가 않자, 그들은 그냥 포기했다.
사실, 소녀는 죽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용병들이 단지 명령을 받아서 자신과 모친을 죽일 의도라는 것을 알아차린 소녀는 단지 어떠한 생각도 감정도 없이 그들을 쳐다보았었다. 그때, 무슨 이유인지, 어떤 운명이나 숙명인지, 소녀의 손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금색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카운터.
그리고 그때가, 바로 처음으로,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가 일어난 것에 당황해 놀랐었던 때였다. 다른 사람들이 왠지 자신을 볼 수 없었다. 한참 뒤에 용병들이 물러나자, 그제서야 반지를 뺐다가 꼈다가 하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지지도 못하는 유령처럼 됬단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날때부터 살아있지 않은 존재와도 같았었던 그녀에겐 어떤 절망이나 공포조차 느껴지지 않았었다.
단지, 그녀는 정처없이 걸었다. 내전으로 황폐화된 대지, 레이더와 갱이 날뛰면서 군벌들은 서로 약탈하고 학살하며, 침식체가 바로 앞까지 왔는데 서로 도와주진 않고 단지 짐승과도 같은 색욕과 광기에 붙잡혀 단지 약자와 아이를 학대하고 죽이며, 권력자도 단지 자신들의 이권만을 위해 이런 멸망하는 세계에도 서로 멈추질 않고 다투는 인간들은 이미 소녀에겐 지옥의 악마들과 다를 것이 없어보였었다.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나, 타인들의 사상조차 아닌, 단지 스스로의 눈에 비춰지는 대로 느끼며 소녀는 중얼거렸다.
"이런 추악한 세계는, 차라리 멸망해버리면 좋을텐데…."
소녀의 이름은 가은이었다.
.
.
.
"도대체 누구랑 말하고 있는 겁니까, 휴먼."
부숴졌던 로봇들이 마치 쓰레기장에 버려진 듯이 지하 심연부터 쌓여올려진 풍경의 관리국 수뇌부. 완전한 흑빛 어둠에 잠겨있는 그곳엔 단지 거대한 환풍기가 계속해서 돌아가며 주기적으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인, 마치 망가진 정적의 세상을 예고하는듯한 폐허와 같았다. 부숴졌던 마더 컴퓨터를 비롯해서 많은 부품들을 뜯어보며 심각하게 쳐다보는 호라이즌은 아까 전부터 누군가와 계속 대화하고 있던 유빈을 향해서 말했다.
"대시와 리타를 빨리 구하러 가야만 합니다. 같이 찾아주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차분한 정중한 말투이지만, 빨리 도우라는 듯이 나유빈의 발 밑으로 폐품을 던졌다. 호라이즌은 그녀의 동료가 정확히 이면세계의 어디에 있는지 좌표계산장치를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던 것이었다.
관리국의 수뇌부면 정밀한 컴퓨터가 있을테고, 혹시 그런 파츠를 찾는다면, 그녀들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지는 않는가. 그렇게 말했던 것은 유빈이었다. 하지만 시끄럽게 자신을 향해 이렇게 던지는 태도가 짜증난 유빈은 화내듯 외쳤다. "지금 관리자님이랑 통화하고 있습니다. 중요하니까 방해하지 말아주시죠."
"그렇게나 강대했던 관리국의 힘을 갖고서도 일개 카운터에 심장부를 날려먹은 폐급 지휘관이 아닙니까. 뭘 기대할 것이나 있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호라이즌을 무시하면서, 유빈은 전화를 다시 받았다.
"…그래서, 그녀가 누군지 아시는 겁니까?"
"자넨 아마 모르지만, 다른 몇몇 세계에는 스트리머로서 활동하는 카운터도 있어. 하트베리, 카운터그럼프, 맥시밀리언… 이건 하트베리의 가은이었네."
"네? 고작 인터넷 스트리머가 관리국의 수뇌부를 함락시켰던 겁니까?"
"아니. 다른 세계의 가은과는 다르네. 마치 자네가 다른 나유빈과 다르듯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가은도, 단지 우연적 인과의 변형에 따른 컨시퀀스이며, 이미 동일인물이라 부를 수 없어."
말없이 호라이즌을 쳐다보면서 얘기를 듣던 유빈은 관리자에게 물었다.
"그 가은이란 여자는 저보다 강합니까?"
"다른 세계의 가은은 지금의 자네에 비교해도 그렇질 못하네. 다만 이곳의 가은은 달라. 녹화됬던 것만 보더라도, 갑자기 사라지며 공격을 피하고 나타나는 모습들… 게다가 그 움직임을 자세히 본다면 자신의 능력을 극한까지 활용하는 것을 알 수 있었어. 물론 현재로선 알지 못하지만, 다른 세계의 대적자인 자네와 동급… 그렇다고 추측하네."
"만일 관리자님이 그 가은하고 만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녀가 정확하게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모르나, 리플레이서들과 협력하고 있는 증거들을 많이 발견했어. 주저없이 처치해야겠지."
"그렇습니까."
쿵!
그렇게 대화하고 있을 때, 왠지 짜증이 난듯 호라이즌은 다시 철판을 나유빈 옆에다 던져버렸다. "아, 진짜!" 나유빈이 깜짝놀라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지르자, 호라이즌은 어둠 속에서 머리 양 옆의 장치를 환하게 비추며, 마치 보란듯이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휴먼.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시끄럽습니까? 조용하게 만들어 주실 겁니까?"
"……."
그때 나유빈도 화난듯이 아무 말도 하질 않고 얼굴을 부라리며, 등 뒤로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날개를 펼쳤다.
"바쁜 것 같군, 유빈 군."
팔을 내리면서 손으로 핸드폰을 꽉 붙잡고 있었던 나유빈은,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심호흡을 하며 눈을 잠시 감았다가 다시 뜨면서 전화를 받았다.
"아뇨,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예의없는 친구가 아까부터 전화를 계속 방해해서요."
"공교롭군요. 저는 무능력한 친구가 아까부터 도와주지는 않고 혼자 놀고 있어서 짜증만 나는데."
"……."
날개를 거두지 않은 채 호라이즌을 계속 노려보는 유빈, 그리고 이쪽은 보지도 않으면서 다시 철판을 휙 던지는 호라이즌. 관리자는 대충 상황을 읽고 조용하게 말했다.
"이만 끊는 게 좋을 것 같군."
"…저 고철덩이가 자꾸 방해하느라 중요한 말씀을 드리는 걸 잊었군요. 지금 관리자님은 저를 친구로서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네."
그러자 나유빈은 후,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서로 숨길 것도 없겠군요. 마왕 중 한 명이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가아그셰블라. 다른 세계에선 딱히 문제되지 않는 존재였었지만… 여기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음모를 꾸미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서 관리자가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다른 세계에선 문제되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아, 그러니까… 제가 다른 세계의 게임 회사에 잠깐 갔었는데, 로자리아라는 분은 프로그래밍을 맡고 있었고, 에델이라는 분은 아트 디렉터였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여기서는 둘 다 마왕이더군요."
"……?"
관리자는 전혀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대답 없이 침묵하자, 유빈은 그냥 물었다.
"어쨌던간, 그쪽 일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자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움직일 겁니다. 빼앗긴 이 세계를 되찾기 위해."
"일단은 리타와 대시를 구하러 간다는 것이군."
관리자가 정확히 짚어서 말하자, 나유빈은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관리자님에겐 숨기지도 못하겠군요. 하지만 오히려 안심이 되네요. 그만큼 뭐든 알고 유능하단 것이니까."
"그럴리가."
그렇게 둘이 말하고 있던 와중에, 호라이즌이 철컹철컹 버려진 기계들을 밟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한숨을 쉬면서 유빈을 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절 도울 생각은 별로 없었던 겁니까, 휴먼. 결국 제가 혼자 다 찾았군요."
호라이즌이 들고 있었던 물건들을 보고 나유빈은 그게 자신들이 찾던 파츠임을 확인했다. "하하, 미안해요. 그렇지만 진짜 어떻게든 찾았군요." 그리고 관리자에게 전화로 말했다. "어쨌던간, 전부 아실테니 부탁드립니다."
"잠깐… 나도 하나 할 말이 있네."
"뭔가요?"
"스캐빈저를 주의하게. 이면세계를 넘나드는 해적들이지."
유빈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하하, 걱정해주시는 것은 고맙군요. 하지만 애초에 맞붙을 일은 없을테고, 괜찮을 것 같네요. 저, 일단 관리자님 것이니까 허가는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있는 아슈세이버 전함을 잠깐 빌려도 되겠죠?"
"아슈세이버? 그게 거기에 있다고? 라즈앙그리프가 아니라? …괜찮겠지. 그냥 자네가 가지도록 하게나."
"감사합니다. …그럼 무운을 빌죠."
"자네도 다치지 말게. 항상 주의하고."
나유빈은 관리자의 말을 들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나유빈이 마왕에 대해서 말해주긴 했었지만 이전부터 이미 관리자는 그에 관련된 정보를 입수했었다. 단지, 그의 말을 끊지 않고, 정확한 정보를 주는지 아닌지 체크하며 그가 정말 아군인지 확인했던 것. 그리고, 이곳의 유빈은 확실히 친구가 맞았다.
관리자는 양쪽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린 채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는, 얼굴을 받치며 다른 모니터를 쳐다봤다. "펜드래곤, 그리고 가아그셰블라… 재밌겠군."
같은 시각, 그로니아.
파멸의 요람과 같은 그 동네. 한때 반군들과 정부군이 서로 싸웠었고, 승기를 얻었던 그들은 서로 반목하여 다시 자기들끼리 싸웠었으며, 사기도 물자도 바닥나며 단지 도둑들처럼 변해 정작 침식체와 싸울 생각조차 없이 피해다녔었다. 정부군도 마찬가지. 마치 황량한 외계의 행성과 같이, 이곳에는 침식체가 단지 야생동물처럼 뛰고 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개처럼 뛰던 침식체는 그대로 총을 맞고 죽었다. 별 일 없었다는 듯이 주머니에 다시 총을 넣고, 벽에 기대서 시계를 보던 여성. 십 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위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레버넌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조용히 물었다.
"제인?"
그러자, 손에 나이프를 쥔 채 마치 지붕에서 바닥으로 훅 떨어지는 여성.
"빨리 왔네."
"먼저 기다리는 것도 버릇이라."
레버넌트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기,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어?"
"아직 건강하시지. 편지, 주시더라. 그것보다 그렇게나 걱정이면 한 번 가서 만나보는 것이 어때?"
제인이 주는 편지를 받을때 살짝 밝은 웃음이 보였다.
"한국… 여기서 멀잖아. 됬어, 내가 여기서 빠지면 누가 내 역할을 할 수 있겠어."
"……."
제인은 뭐라고 할 말을 찾다가 그냥 관두었다.
"당신이야말로, 이렇게까지 해서 그들을 쫓는 이유는 뭐야?"
"뭐… 그냥 심심해서."
사실 레버넌트 또한 제인의 조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뭔가 자신과 제인은 상반된 느낌을 이전부터 받았지만 그때부터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었고, 그녀는 가족이 될 사람을 잃었기에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굳이 한다면 실례겠지. 레버넌트는 코트의 주머니에서 디스크를 꺼내주었다.
"뭐야, 아직도 시디 쓰는 거야?"
"있어 보이잖아?"
제인은 빙긋 웃으며 그걸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그렇긴 해." 그리고 그렇게 손을 흔들며 떠나는 제인에게, 레버넌트는 떠나보내듯 말을 했다. "죽지 마, 당신… 정든 얼굴이니까."
그러자, 제인은 가만히 선 채, 고개만 살짝 돌리며 말했다. "그런 말은 남자한테나 하는 거야, 아가씨." 그러자 레버넌트도 훗,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제인 씨 같은 여자는 너무 편안하게 느껴져서."
"나, 여자 취향 아냐."
"아쉽네."
레버넌트는 웃으면서 장난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물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가서 보면 알겠지만, 이번엔 당신도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냐."
제인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단지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가자, 그대로 그 뒷모습을 보다 걸어가려던 레아. 하지만, 그때 제인이 멀리서 말했다. "나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거지."
그 소리에 레버넌트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는 방향을 봤다. 하지만, 의미심장하게 자기 할 말만 하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녀. 그리고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러는 걸 보면 아직도 애 같다니까."
한편, 사장들은….
카를과 카를로맨이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서 다투었던 때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 유명한 사자왕 리처드와 함께 십자군 원정을 같이 떠났었던 기록까지 있는, 마치 살아있는 역사와도 같은 영국 펜드래곤 가문. 타이탄을 비롯해 한솔들을 태운 코핀 함은 그곳의 영지에 도착했다.
저택이라 했었지만 성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크기. 또, 마중나와 집사처럼 정중하게 인사하는 라이언의 안내를 받아서 십 분 넘게 꽃들이 있는 정원을 걸어 마침내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던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고용주의 입장에서 차를 마시면서 가볍게 목례하는 갈색 머리의 숙녀.
엘리자베스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젊은 여인으로, 본래라면 힐데조차 없는 삼류 태스크 포스인 코핀 컴퍼니에 눈길조차 주질 않았었겠지만, 관리자는 그녀와 카린이 친분이 있다는 것을 이용해 카린에게 자신들을 추천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던 것.
그녀의 홍차를 따르는 릴리. 그리고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계속 붉히며 화난듯 모두를 노려보는 리코리스.
'칫… 그 변태 같은 카린만 아니었어도, 이딴 부끄러운 옷을 입고 수치스럽게 메이드 일을 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리고, 사장을 알고있던 릴리는 가볍게 목을 숙이며 인사했다. 관리자도 타이탄을 살짝 움직이며 인사를 받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다만 리코리스는 알 게 뭐냔 듯이 그냥 가만히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마크 핀리가 있건 없건 결국 메이드인가.'
카린이 본인은 바쁘니 대신 자신의 정보원을 보내서 전달하겠다고 웃으며 장담했었는데… 설마 그게 리코리스였을 줄은. 어쨌던간, 총을 쥔 채 이쪽을 흥미롭게 쳐다보는 모건의 옆에, 마치 미국 요원처럼 칠흑의 슈트를 걸친 금발의 청년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이쪽을 보았다.
"…이상한데? 명단에 적혔던 인원은 아홉 명이었어." 척 봐도 전투원인 사장, 한솔, 에디, 찰리, 제시카 등에 눈길을 주던 로이는 곧 아키, 도로시, 허수아, 루시드를 훑어보며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얘들은 함선의 크루들인가? 본사와 통신을 담당하는 오퍼레이터 같은 걸 맡는 아이들이지?"
타이탄은 굵고 낮은 목소리로 변조된 관리자의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니, 보조 요원이다. 코핀 함은 승무원이 없더라도 나로부터 제어가 가능하다."
"인간에 비해서 참 효율적이군…. 아니, 잠깐. 그 말은 이 꼬마들이 현장에서 뛴다는 말이야?"
모건이 옆에서 장난조로 말했다. "버넷, 자네도 저 나이에 투입되었어. 자기 일은 잘 기억이 안 나나?"
"아니, 난 나 같은 녀석들이 늘어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싸워왔던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리사랑 기관이 없었다면 난 길거리 깡패 밖에 되질 않았어. 진짜, 요즘 애들은 자기 목숨이 얼마나 아까운지 모른다니까."
"그…." 무언가 사정이 있단 걸 짐작한 도로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로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응?"
…….
도로시는 그냥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사실 자기도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만일 자기가 커서 저렇게 서있을 경우… 자기만한 아이가 나도 약자를 구하려고 싸운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착잡한 기분만 들겠지.
식어가는 홍차를 테이블에 두곤 조용히 그들을 보던 엘리자베스는 턱을 괴곤 멤버를 천천히 살폈다. '로이가 말했던 대로, 산전수전 겪은 용병들과 무기를 든 것조차 어색해 보이는 아이들이 뒤섞여서 싸운다니…. 상냥한 시대는 진작 저물었지만, 이를 실감하는 것도 딱히 유쾌하진 않군요.'
그리고 그녀는 손뼉을 짝, 치고는 라이언을 향해 부탁했다. "페리어 경, 그렇다면 이분들에게 설명을 부탁드릴게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날씨가 더우니 안으로 먼저 모시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모건을 향해 말했다. "모건 경, 알비온이 출항할 수 있는지 점검을 다시 해주세요.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바로 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벽에 기대던 로이도 등을 떼면서 말했다. "리사, 나는 들어가서 방패를 가져올게."
"…꼭 싸울려고?"
"너희가 가는데 내가 안 갈 이유가 있겠어?"
"하지만 아까도 두통이 있었던 것 같은데…"
로이는 선글라스를 품에서 꺼내 다시 쓰면서 말했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앞머릴 눌렀다. "상대가 가아그셰블라 아니야?! 난 갈 거다. 말릴 생각 말라고, 기관장." 왠지 짜증내는 어투였다. 그러면서도 이마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모습은 왠지 이상하게 보였다.
"…미안, 항상 나 때문에…."
엘리자베스의 중얼거림은 모두에게 들리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살짝 숙여 한숨을 쉬는 그녀.
한솔을 비롯해 딱히 모두가 신경쓰지 않았지만, 관리자만은 달랐었다. 검은 실내에 앉아 스크린 너머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관리자는 살짝 의아한 눈빛을 지을 뿐이었다.
어쨌던간 라이언을 따라 건물 이층까지 갔던 모두.
실내는 관리국 타이탄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창문 밖엔, 방금 걸어오며 봤던 장미 정원을 비롯해, 멀리 있는 산과, 중세 풍의 요새가 있었다: 이질적인 검은 기운들이 뒤섞여 몰아치는 그 모습은 마왕성을 연상케 했다.
"마실 것을 준비했습니다. 부디…."
릴리가 공손하고 차분하게 말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왼손에는 매우 큰 원형 플레이트: 위에는 갖가지 화려한 색깔의 음료수가 담긴 유리컵들. 한솔이 하나 집으며 말했다. "아, 고마워." 옆을 보니, 리코리스 또한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며 다른 사람들에게 주스를 주고 있었다.
모두가 마실 것을 받은 것을 확인한 라이언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코핀 컴퍼니는 실력있는 분들이라 들었는데 이번 일을 같이 마칠 수 있어 무척 영광이군요. 저희가 당신들을 고용한 일은 다름이 아니라… 저것입니다."
누가 봐도 침식현상이 아닐까 짐작할 것이다. 어두운 안개가 넘실거리듯 주위를 휘감은 고성.
그리고, 어린 아이인 것을 신경쓰지 않고 존중하는 정중한 말투로 라이언이 리온에게 물었다. "저희쪽 자료는 이미 보내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만…. 앞에 보이는 지역엔 제1종은 물론이고, 제2종과 제3종의 침식체도 많이 있습니다. 리온 양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저…." 갑자기 모두가 자신을 보자 당황하여 얼굴을 푹 숙이고 부끄러워하는 리온. 단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아, 저… 모르겠어요, 그냥 열심히 할테니까…!"
"허수아 양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수아는 단지 '?' 표시를 헤드기어에 띄운 채로 침묵했었다. 그리고 똑같이, 도로시를 향해 묻자 그녀는 대충 말했다. "몰라, 그딴 거. 그냥 지금 쳐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아저씨들도 강하다면서?" 라이언은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 그런 용감함도 나쁘지는 않군요."
"다음은… 찰리 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찰리가 뭔가 말하려고 할 때, 에디가 헛기침을 하면서 대신 대답했다. "우린 3인 1조야. 그러니 내가 대신 말하지. 우린 보는대로 그냥 꾀죄죄한 용병출신이야. 사실 이쪽은 계약할 당시 이미 사장님과 합의를 봤었어. 카운터가 전열에 서고 우리들은 후열에 서서 원호를 해주는 걸로."
에디는 뭔가 날선 태도를 보였다: 언제 죽을지 모를 파리 같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전에 기싸움을 하는 용병들의 버릇이 나온 것이다. "이걸 왜 묻는 거지? 그냥 지금 가서 싸우면 되잖아. 혹시 주문하고 싶은 전술이라도 있으신가? 평범한 용병을 앞에 세운다거나?"
라이언은 잠시 침묵하며 에디를 쳐다봤다. '저기 어린이는 현장에서 명령이나 지시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나 이 용병은 기본적 지식은 가진 것 같군.'
"아닙니다. 단지, 작전 이전에 먼저 말을 맞춰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의견을 나누는 것이죠."
"…미안하군, 이렇게 짜증나게 따지고 드는 것도 용병의 본성이야."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노 프라블럼. 허허."
라이언은 루시드와 아키와 한솔을 각기 쳐다봤다.
"여러분은 카운터라 들었습니다만…." 그리고 루시드를 향해 물어봤다. "루시드 씨는 만일 눈 앞에 제3종 침식체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 죄송해요… 저는 뒤에서 제시카 씨랑 움직이다, 1종 혹은 2종 침식체가 가까이 오면 뇌파로 조종하거나 방해하는 역할이라서… 저도 도망쳐야만 할 것 같아요."
그것은 의외다. 침식체를 조종한다?
라이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루시드는 왠지 기쁜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네! 가능해요. 사장님이 제 몸을 완전히 고쳐주셔서 전보다 훨씬 튼튼해졌고… 감응도 더 괜찮아진 거 같아요!"
"……." 관리자의 타이탄은 단지 철컹거리면서 가만히 있었을 뿐, 딱히 아무 말도 하진 않았었다.
"놀랍군요. 그렇다면… 아키 씨는 어떻습니까?"
긴장하며 말을 더듬는 아키. "아, 그, 하, 하하하… 저, 아무래도… 저도 루시드 씨랑 같아요. 그냥… 에디 아저씨들 옆에 있다 접근하는 침식체를 공격하는 걸로…."
"흐음? 오오! 용병 분들이 위험할 경우 곁을 지키기 위한 카운터셨군요?"
'아뇨… 오히려 지킴을 받는 쪽인데.'
라이언은 고개를 한솔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한솔은 왠지 라이언의 눈빛을 보면서 무언가를 느끼고는, 혼자 진중하게 대답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맡은 임무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3종 침식체라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
"……."
"……."
자신이 상상하는 영국의 기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던 한솔. 하지만, 모두가 입을 닫으며 단지 어색한 침묵만이 남았다.
'어…?'
역사에서 읽은 유서 깊은 펜드래곤 영지까지 와서 분위기에 취해 기사 운운을 했던 한솔은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없자, 뭔가 예상 외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말 하면 안 됬나? 그럴리가?"
사실, 단지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또 기사병 걸려서 저렇게 부끄러운 말만 골라하네… 하지만 실력이 있으니까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한심하다는 듯, 혹은 부럽다는 듯, 그런 뒤섞인 감정이 드러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도로시.
'처음 봤을 때부터 정말 강하기는 했어. 기사라는 것이 정말 현대에도 있는 건가? 설마 한솔이란 청년은 아직 그런 전통이 남아있던 곳에서 진짜 기사의 훈련을 받았던 것인가?' 별로 들은 게 없어 짐작하는 에디.
'코핀 컴퍼니는 이전부터 S급 카운터인 힐데가 있었던 곳이고, 그녀에겐 한솔이란 수제자가 있지. 또한, 카린 양에게 들은 정보로는 정말로 제3종 침식체와 싸워서 이겼다고 했고요. 흠…. 독일인 검사를 스승으로 둔 한국인 기사인가? 흥미롭군요….' 그러면서 진짜로 한솔을 기사처럼 인식하며 쳐다보는 엘리자베스.
"허허, 그거 정말 굉장하군요. 한국에서 온 기사라고… 매우 흥미롭군요." 자신의 감상을 편하게 말하는 라이안. "저는 이때까지 지안을 쓰는 중국계나 카타나를 쓰는 일본계의 검사들만 봤습니다. 코리안 소드맨은 어떤지 궁금해지는군요."
갑자기 코리안 소드맨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오그라들듯 비빅거리는 타이탄. 그러자 허수아가 '?' 문자를 헤드기어에 띄운 채 사장을 보았다. 사실, 타이탄 뿐만이 아니었다. 모니터 너머의 관리자 본인도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뭐, 뭐지 이 촌스러운 느낌은….'
뒤에서 잠자코 서있던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역시 처음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인가…. 만약에 그 힐데가 아직까지 있었다면, 아마… 힐데와 한솔이, 여기 이 기계 사장과 함께 정면으로 돌격하는 단순한 힘싸움을 주요 전술로서 취했을테죠.'
그리고 검은색 타이탄을 힐긋 보고는 생각했다. '적어도 제4종급은 된다고 했었고, 실제로 카린 양이 보여줬던 영상에도, 여타 로봇들과 달리 압도적인 기동성과 내구성과 파워를 통해서 침식체들과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스트레스에 쌓인 표정을 짓곤,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씹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상대는 마왕이야. 어떻게 해야만 하지…? 제4종 침식체마저 죽일 수 있는 로봇이라 하더라도, 마왕에겐….'
그런 엘리자베스를 계속 옆에서 렌즈를 통해 쳐다보고 있던 관리국 타이탄. 그리고, 라이안이 손을 툭툭 털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대충은 알 것 같군요. 코핀 컴퍼니는, 한솔 경과 사장님이 앞에 서서, 나머지는 후방에서 따라오며 보조하는…." 그리고 에디를 보면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직원 모두의 안전을 생각하는, 상식적인 진형으로 싸웠군요, 허허."
사실 지금이 이 회사에 입사하고 첫 임무지만…. 어쨌건 에디는 그냥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희는 따로 저희의 전함인 알비온을 타고, 여러분은 코핀 함을 타고, 정면에서 손실을 피하며 최대한 방어적인 싸움을 하십시오. 아마 제4종 침식체 정도는 상대하실 수 있는 사장님이 계속해서 폭격하면, 늦던 빠르던 저런 성벽은 허물어지고 저곳에 있던 강력한 침식체들도 결국 뛰쳐나올 것입니다."
관리자가 대충 예상했었지만 유효한 전술은 맞다는듯이 말했다. "…알비온은 은폐장 능력이 있을테니, 그때 측면이나 후면에서 기습하며 목표물을 처치할 생각이군." 그걸 듣고, 라이언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것까지 아실 줄은 몰랐었습니다. 하지만 전부다 알고 계시면 설명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것에 동의하시는 것으로…."
그때였다.
"잠깐."
엘리자베스는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톱을 계속 씹고 있었다. 라이언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단지 바닥에 눈길을 두며 자신의 생각에 계속 집중하는 그녀.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페리어 경… 그냥 솔직히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정확히 누구와 싸우는 것인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방법 자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나요?"
"…하지만 이것은 아가씨가 말씀하신 작전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망설이는 겁니다. 상대는… 하지만 상대는…."
지금 자신 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매우 고민하는 엘리자베스.
…또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목소리만 있었다면…."
관리자는 말없이 그녀를 보다가, 붉은색 렌즈를 그녀에게 돌리며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적을 조사했지. 인계에서 에델 마이트너라는 이름을 쓰며 정체를 숨겨왔었던… 마왕 가아그셰블라."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사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자네가 쓸 방법은 딱히 틀린 게 아냐. 단지 나로부터 조언하면…."
"조언하면?"
"아직까지 마왕들은 어떤 전면적인 침공조차 하지 않았었어. 때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그런데도, 에델이란 자만 혼자 이렇게 날뛰는 것은, 무언가 집착할 만한 이유가 있단 것이다. 또한 거기에 그녀의 약점이 있고. 자네는 체스를 좋아하는가?"
마왕,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다수가 얘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 때,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저는 딱히 그녀가 원하는 것이 뭔지 짐작조차 하질 못하겠더군요. 이 마왕에 대한 정보는 모두 학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녀에게 어떤 약점이 있단 자료도 딱히 입수하질 못했습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냐. 체스에선 딱히 강력한 퀸을 상대하지 않고서도, 킹을 잡는다면 그냥 이기지."
"그렇다면 마왕이 굳이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무엇일지…?"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녀 스스로가 지키려고 애쓴 레지나 양이 아닐까 생각하네. 그녀를 우리가 붙잡고… 에델에게 그만 멈추라고 약속을 받아내면 되겠지. 마왕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하는 약속은 지키는 존재야. 클리포트 게임에서 룰을 따르는 것도 그렇듯이."
……?
뭔가 이상했다.
'이 기계… 어떻게 레지나가 누군지 아는 거지?'
그녀의 이름은 세간에 잘 알려진 게 아니며, 그녀가 학회 소속인 걸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 자신들의 전함인 알비온에 스텔스 기능이 탑재된 걸 지적한 것도 그렇고, 왠지 이상할 정도로 많은 걸 알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런 건 딱히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은 누구건 저 마왕을 막으려고 힘을 합치길 결정한 거니까.
"맥크레디 양을…? 그녀가 정말로 마왕 가아그셰블라의 광기를 멈출 수 있는 열쇠일까요…?"
듣고서도 전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간 침묵하던 그녀는 결국 마지못해 결정했다. "좋아요, 그러면 일단 페리어 경이 설명했던 대로 움직이며, 현장에서 별도의 지시를 내리도록 하죠. 지금 당장 출발하는 것이 좋겠군요."
마왕이란 이름 앞에 너무나도 긴장하는 그녀. 사실 그건, 어떤 확신을 있어 내린 결정은 아니다. 딱히 다른 발상조차 나질 않았기에 다급히 움직일 수 밖에 없던 것.
…시간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마왕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진 몰라도, 어둠은 점점 짙게 깔리고 있었으니.
곡선의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사장이 엘리자베스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 플로라 메이드를 불렀었군…." 철컹철컹 거리면서 기계음을 내며 내려가는 타이탄에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메이드라고 무시한다면 오산입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 베로니카가 오질 않았던 것은 매우 유감스럽군요, 당신도 그녀의 활약을 볼 수 있었을텐데요."
'…….'
그런 뜻으로 말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눈치가 빠른 여자 치고는 의외였다. 아까 릴리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랐다는 것을 보진 못했던가? 어쨌던간, 사장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지금 내 명령으로 다른 임무를 맡고 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니 딱히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어쨌던간 사장들은 다시 코핀 함에 승선했고, 라이언과 엘리자베스는 알비온에 갔다.
십 분 뒤에….
목적지에 가는 도중, 갑자기 허공에 뜬 의자에 앉은 여자 아이와 한 남자가 보였다. 초현실적인 광경에 엘리자베스는 타이탄을 부르면서 외쳤었고, 이내 두 함은 공중에 멈췄다. 코핀에서 부스팅을 하며 타이탄이 나와 물어봤다.
"여기엔 왜 나온 거냐, 로자리아."
브릿지에서 엘리자베스가 이름을 듣고서 소녀를 궁금한 눈으로 쳐다봤다. '로자리아?'
오랜 시간에 걸쳐 학회와 대립했던 기관의 수장인 엘리자베스는 가아그셰블라의 존재나 혹은 마왕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전혀 들은 적이 없다. 다른 마왕들에 대한 정보는 딱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자리아는 의자에 기대며 거만한 미소를 뽐내며 웃었다. "에델 녀석이 뭔가 재밌는 일을 하길래! 아하하하! 나 말고 다른 마왕에 눈길조차 주지 말라고 경고하러 찾아왔지!" 관리자는 한심한듯이 로자리아를 쳐다봤다. "봤으니까 이제 가라. 우린 바빠."
로자리아는 다리를 퉁퉁 의자에 두들기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못 가. 이대로라면 무대가 재미없게 끝나겠지! 너도 알잖느냐? 내가 싫어하는 것이 뭔지?" 그러자 관리자는 의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다가 말했다. "…파인애플 피자?"
"오, 어? 어, 어떻게 알았지? 정답! …이 아니라, 그딴 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잖느냐!"
"…지금 중요하지 않은 것은 너의 존재다."
"이게, 도와줄려고 했는데 계속 심술을 부리네?!"
관리자는 한숨을 쉬었다. 마이크를 꺼두질 않았기에, 관리국 타이탄 자체도 그대로 한숨을 쉬는 소리를 냈다. 왠지 그걸 보고 엄청나게 짜증난 로자리아는 맨발로 올림피안을 쿵, 찼다. 하지만….
"아, 아얏! 아파…."
"……."
단지 공중에 뜬 채로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고 있는 올림피안. 그리고 기체를 코핀을 향해 휙 돌리며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우린 에델하고 싸우러 갈 거니까. 집에서 파인애플 피자나 먹으면서 보고 있도록."
"자, 잠깐! 나 이번엔 진짜로 도와주려고 온 거란 말야! 너흰 아직 에델이 뭘 하려고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함에 돌아가려 했던 타이탄은 기체를 그대로 돌렸다. 그 모습을 보자, 다시 잘난듯이 웃는 로자리아. "흐음, 흐음." 그리고 잠시간 침묵. 로자리아는 뒤이어 말했다. "혹시, 마왕들도 필멸자를 사랑한단 것을 알고 있느냐?"
…그걸 듣고, 왠지 귀찮아진 관리자는 다시 기체를 돌렸다. 그리고 가면서 말했다. "나는 필멸자가 아니라서 모르겠군. 이만."
"야!!!!!! 너 진짜, 오랜만에 봤는데 이러기야?! 도마, 어떻게 좀 해봐! 너 거기 안 멈춰?! 이거 내 얘기 아냐, 에델 얘기란 말야! 오래된 목소리도 그렇고!!"
그러자, 피리 부르면 나오는 뱀처럼 허리를 계속 흔들고 있었던 도마는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박쥐들로 변했다가, 천천히 함선을 향해서 가던 타이탄의 앞에 나타나며 고개 숙이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만 더 저희 주인님을 상대해주시죠."
"…자네도 참 고생이군."
"뭐라는 거야 이 자식들이!!!!"
하는 수 없이, 관리자는 또 기체를 돌리면서 로자리아를 향해 가까이 갔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먼저 질문해도 되나?" 로자리아가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뭐든지 물어보도록. 오늘의 난 관대한 마왕이노라. 쓰리사이즈? 좋아하는 남자 취향? 받고 싶은 선물?"
"누가 그딴 걸 물어보겠다고… 아무튼, 갑자기 오래된 목소리에 대해서 말했던 이유는 뭐지?"
"응?"
"응이라니, 왜 갑자기 오래된 목소리를 말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로자리아는 질문의 의도 자체를 이해하질 못한다는 듯이 되물었다. "너희는 지금 그것 때문에 가던 것이 아니었느냐? 어린 펜드래곤의 딸이 너를 불렀던 것도 그렇고."
반대로 관리자가 도대체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말했다. "저기에 에델이 있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가는 이유도 단지 그 마왕 때문이 아니겠나."
"잠깐… 너. 오래된 목소리를 뭐라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그 말을 듣고서 사장이 이상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된 목소리라니, 그야…."
그때, 로자리아가 갑자기 떠올렸다는 듯이 웃으면서, 팔꿈치를 의자의 팔에 기대곤 떠들었다. "아, 아! 그랬었지, 너는 다른 세계에서 왔던 관리자니까, 그쪽에선 나도 모르는 뒤틀린 비틀린 인과가 있겠지! 스톱!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뭐…?"
"로하하핫, 로하하하하핫-!! 이거, 원래 도와주려 했었는데, 미안하네! 하지만 관리자, 나는 네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진짜야!"
도마는 그런 이상한 웃음을 듣고는, 마치 돼지 피를 마신듯한 매우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옆에서 로자리아를 내려봤다. 그 얼굴은 관리자에게만 보였다… 좋아죽는 로자리아 본인은 결코 볼 수 없었다.
"잠깐… 설마, 내가 아는 것과 다른 오래된 목소리가 저기에 있다는 건가?"
"몰라! 알려주지 않을 거야! 아 몰랑!"
옆에 서있는 두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는지 신경쓰지도 않고, 혼자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진짜 재밌구나, 진짜 재밌어! 에델, 날 이렇게까지 기대하게 만들다니! 너는 정말 최고구나!"
그렇게 한참 웃던 로자리아는 이제 만족했는지, 도마를 향해서 말했다. "가자, 시종."
그걸 보고, 관리자는 짜증내듯 중얼거렸다. "너 대체 뭐하러 온 거냐…."
가려던 도중에, 로자리아는 잠깐 멈췄다가 의자를 뒤로 돌렸다. "음… 생각해 보니 이렇게 밉살맞아선 진히로인 같지도 않겠지. 좋아! 힌트 정도는 줘야 재밌는 게임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응? 자, 힌트! 혼자서 열심히 생각해봐라, 펜드래곤의 이름이 어째서 펜드래곤일까?"
"로하하하하핫, 로하하핫-!!!!" 그리고 로자리아는 마치 로켓을 타듯이 의자에 앉아 저편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한숨을 쉬면서 박쥐들로 변해 느리게 쫓는 도마를 남겨두고.
"……."
관리자는 뭔가 떨떠름한 기분으로 단지 코핀으로 돌아갔다. 코핀 브릿지의 스크린에 알비온의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계기판에 손을 올리 채로 조용히 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사장이 나타나자 묻는 그녀.
"사장님, 저들은 대체 누구죠?"
"그냥 바보랑 집사지."
엘리자베스는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그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딱히 위협적인 녀석은 아니니까… 지금은 신경쓰지 않아도 좋겠군."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어쨌던간 작전대로 먼저 공격해주세요. 마왕이 나타나면 저희쪽도 서둘러서 대응하겠습니다."
"잠깐."
사장이 갑자기 멈추듯 부르자,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왜 그러시죠?"
"……." 사장은 망설이다 그만뒀다. "아니, 됬네. 지금 내가 하강해서 공격하지. 자네들은 원할 때에 에델이나 레지나를 공격하게."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말하며 회선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실력을 지켜보도록 하죠."
관리자는 코핀함을 최고속도로 맞춘 채 단지 앞을 보았다. 에디와 한솔이 다가왔다.
"사장님, 어떻게 하실래?" 에디가 권총을 장전하며 물었다.
"나 혼자서 성벽을 부숴버리는 게 편하겠지. 여긴 적진의 한 가운데, 언제 알지 못하는 적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나타날지도 몰라. 모두와 함께 대기해, 함으로 오는 적들을 요격하게. 만일, 침식체가 함에 침입하게 되면 카운터들에게 맡기도록."
"그럴듯한 지시로군. 마음에 들어." 에디는 만족한듯 웃으며 점검했던 권총을 허리춤에 끼우고, 소총을 다시 들었다. "그렇다면, 이쪽의 지휘는 누구에게 맡길 거지?"
"내가 함을 통해서 말하지."
"맞아, 사장님은 기계였지. 잊고 있었어. 그렇다면 찰리와 제시카와 함께 준비하지."
에디는 브릿지를 떠났다. 그리고 계속 가만히 서있던 한솔에게 사장이 물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나?" 한솔은 팔짱을 꼈다가, 턱을 만지면서 밖을 보았다가, 그대로 사장에게 물었다.
"아까, 그 이상한 소녀와 말씀하실 때… 오래된 목소리 관련해서 서로 말이 안 맞지 않았나요?"
타이탄은 단지 창 밖을 보면서 말했다. "펜드래곤이라는 이름이 왜 그렇게 지어졌는가 물었지. 자네는 그것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겠나?" 한솔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뇨… 모르겠군요. 아서의 아버지인 우서가 펜드래곤이라는 성씨를 쓰고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요."
"…힐데가 딱히 고어는 가르치지 않았었나 보군. 펜드래곤은 펜과 드래곤을 붙여 만들어진 단어일세. 과거 브리타니아에선 그걸 대족장과 같은 의미로서 사용했지."
"브리타니아? 아, 잉글랜드요. 아, 설마… 아니, 그러면 이상하지 않나요? 대족장이 여러 명이었을텐데, 엘리자베스 씨의 가문은 그걸 성으로 쓰다니?"
관리자가 보기에 한솔은 다른 문화를 매우 낯설게 느끼는 것 같았다….
"…자네, 실제로 아서는 로마인이었던 것을 알고 있는가?"
"스승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는 직접 아서를 봤었다고 하셨는데…."
"뭐…?"
하지만 사실 힐데는… 아니, 이곳의 힐데는 다른 인과에 의해 준비되진 존재인가?
'…상관 없나.'
관리자는 그냥 대충 설명키로 했다.
"자네도 대충 알겠지. 내가 펜드래곤을 대족장이란 뜻이라 말했는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 드래곤. 용. 대족장."
"어? 잠깐, 그러고 보니… 왜죠?"
"웰시들에게 드래곤은 족장이라는 뜻이었어. 그 시대에 사람들은 딱히 날개가 달린 용을 생각하며 그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네."
"잠깐… 정말인가요?"
여태껏 아서리안 테일을 몇 번이나 읽은 한솔이지만 지금에서야 처음 들었던 한솔.
"로자리아가 오래된 목소리가 그곳에 있다고 했었지. 이런 걸 두고 거짓말 할 여자는 아니야. 그것의 정체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어… 전혀 짐작도 되질 않는데요."
"달리 생각해보게. 그래봤자 에델보단 약하겠지. 그렇다면, 애초 엘리자베스와 연관된 존재가 저기에 있다면 분명 붙잡혔다는 거고. 에델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 적이 늘어났다는 걸로 대충 생각하면 좋을테지."
"설마 멀린과 같은 마법사라거나… 아니, 당연히 그럴리는 없겠죠."
"……."
하지만 관리자는 그대로 턱을 괴며 생각했다.
'그 녀석은 이름을 생각해 보라고 했었다. 펜드래곤… 만일 내가 말했었던 대로, 집단의 대표를 말하는 의미의 대족장이라면, 사실 엘리자베스 본인이 저곳에 있어야 말이 맞지 않겠나. 하지만 아니야.'
'만일 그게 되려 진짜 용을 의미했던 것이라면? 하지만 그것도 이상해. 굳이 자신의 휘하에 많은 침식체들을 가진 에델이 굳이 용을 가져갈 필요가 있나? 게다가 로자리아 녀석… 마왕도 필멸자를 사랑한다 했었어. 혹시 에델이 지금 뺏어간 뭔가에 특별한 애착을 느낀다거나?'
추측이 사실에 적잖이 가까웠던 관리자였지만, 어쨌던간 계획에 변동은 없다고 생각하여 한솔에게 말했다.
"가지, 거의 다 왔네."
"아… 벌써 이렇게 됬군요."
그렇게 타이탄은 한솔과 같이 캐터펄트 근처까지 걸었다. 한솔이 자신과 함께 강하하려고 하자, 타이탄은 한솔에게 지시했다. "한솔 군은 여기에서 남아 루시드를 지켜주게. 원래는 오지 말라고 했는데, 본인이 은혜를 갚고 싶다며 억지로 따라왔던 것이니까." 한솔은 타이탄의 렌즈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가지."
탁한 강물이 고요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그곳, 빼곡히 들어찬 숲의 앞엔 마치 태양의 권능을 정면으로 부정하듯 사기를 짙게 뿜는 요새. 이미 마왕이 저곳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언가 동화적인 느낌이다.
…평범한 동화가 아니라 마치 그림 형제의 동화 같은. 주위의 뒤틀린 자연에 겁먹어 새와 동물들은 벌써 도망쳤다. 거대한 사악한 그림자가 드리운 곳으로, 관리자는 타이탄을 떨어트렸다.
기잉, 기잉, 그런 소리를 내며 부스팅을 맞춰 땅에 내려온 관리국 타이탄.
역시 관리자의 예측이 맞았는지, 기체가 내려오며 땅을 흔들었던 기척에 반응하며 지면에서 구더기 같은 것들이 일어섰다.
"성찬을… 준비하라…."
"호호수수수수의의의 지지지지식식식식-"
콰직.
만일 다른 전투원이 같이 내려왔을 경우, 사방으로 포위되어 아군을 보호해야만 하는 위기였을 거다.
다만 그걸 짐작하고 있어 혼자 내려왔다. 이 침식체들은 올림피안에 어떤 데미지도 주질 못하였다: 그렇기에 관리자는 단지 무시하고 기체를 앞으로 전진했다.
'지금 우리가 함을 잃으면 아예 작전속행이 불가능해져. 게다가 에델이 적이면, 얼마나 강한 적들이 어디서부터 나타날지도 쉽게 예상할 수 없기도 하고.'
그리고 저 앞으로 보이는 성을 향해 조준을 하면서 관리자는 생각했다.
'여기선 맞춰주는 것이 좋을지도. 이 정도의 화력이면 중세의 성벽은 당연히 부수겠지. 어쨌던간 함을 지키면서 싸워야만해. 다만 캐논만 써서 함락시키려면 몇십 분은 걸릴테다. 그렇다면….'
타이탄은 런쳐로 타워를 포격했다. 이후에 매우 빠른 속도로 숲 속을 돌며, 부딪치는 나무들은 전부 부숴트리면서 오래된 성 주위를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네 방향의 타워를 한 번씩 쳐봤던 타이탄은, 이후 멀찍이서 따라오던 코핀에 다시 올라탔다. 팔랑크스 미사일 백팩을 해제하고, 슈퍼 네이팜 런쳐로 교체했다.
"그걸 여기서 쓰는 거야, 사장님?" 탄약과 무기에 대해선 일가견이 있는 찰리는, 사장이 네이팜을 장착하는 것을 보며 흥분하듯 물었다. "요새 안쪽에 있는 침식체들은 바싹 구워지겠지." 타이탄은 육중한 발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했고, 다시 캐터펄트에 섰다.
"헤헤, 좋은데! 벌써부터 코핀 컴퍼니가 맘에 들어졌어!" 그렇게 말하는 찰리를 뒤로 하며, 관리자는 타이탄을 다시 땅에 착지했다. 철컹, 거리면서 네이팜이 발사될 준비가 되었다.
'아까, 구조상 제일 취약한 부분은… 그렇지, 북서쪽.'
마치 땅 위를 스케이팅하듯 빠르게 부스팅을 하면서, 이번에는 나무들의 위로 솟아오른 올림피안. 그리고 네이팜 런쳐를 발사하려고 할 때였다.
카아아아아아아악--!!
갑자기 천공을 꿰뚫는듯한 소음을 들으며, 관리자는 육감적으로 위협을 느끼면서 움직임을 취소하고 소리가 난 곳으로 화면을 돌렸다. 날개가 달린 괴수의 정체를 보자마자 관리자는 턱을 손으로 만지며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정말로 드래곤 그 자체. 살아 있는 환상과 같은 그 전설종이 지금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화염을 흘리며, 매서운 눈길로 코핀 함을 향해서 몸을 던지듯이 오고 있다.
'지금 네이팜이 아니라 미사일이 있었다면 저걸 올림피안으로 처치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상관없어.'
진짜 드래곤이 있다는 사실은 어찌됬건, 바로 날라드는 용을 향해 부스팅을 하며 따라잡았다. 그리고 함선의 스피커를 통해 에디에게 지시했다. "지금 날라가는 용이 보이는가? 내가 직접 뒤를 붙잡아두지. 유탄을 쏠 준비를 하도록."
"알겠어, 그렇게 하지." 진짜로 함을 통해서 명령하는 사장에게 뭔가 기묘한 느낌을 받은 에디였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다: 외지에서 총알 값 내기도 힘든 다른 용병과 부대끼는 싸움만 했던 자신이 이런 종류에 전투에 참여한단 것이 잘 믿기지가 않았다.
어쨌던간 상황을 확실하게 제어하는 모습을 보고 그에 물 흐르듯 따르게 되었다.
에디가 고개를 돌려 함에 대기 중인 사원들에게 말했다. "들었듯이, 지금 사장님은 밖에서 용을 몸으로 붙잡아서 이쪽에 댄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는 괴수의 배때길 향해서 바주카를 쏘면 되는 거야."
상황을 이해하는 것인지 다들 눈빛을 훑어본 에디가 계속 말했다. "한솔, 아키, 도로시, 수아, 리온. 우리는 화기를 쏠테니, 썼었던 바주카를 받아서 다시 장전해줄 수 있겠나?"
한솔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옆에 있던 아키도 조심히 고갤 끄덕였다.
"음… 뭐, 상관없지만 말야." 볼을 긁적이며 대답하는 도로시.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어 살짝 긴장하는 리온과, 단지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허수아.
"그렇다면 부탁하네." 소녀들을 보며 에디가 말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질 않자, 루시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저는 뭘 하면 좋을까요?"
"일단 가만히 보고 있었으면 좋겠어. 사장님이 루시드 씨에겐 무리한 지시는 하지 말라고 부탁했거든."
"아… 그… 죄송해요."
"신경쓰지마."
그렇지만….
진짜 산 넘어 산이구나, 이제는 용인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아키.
에디는 굵직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좋아, 다들 준비됬나? 모두 위치로!"
바로 밖에선 검은, 붉은빛이 비늘에 감도는 침식체나 다름 없는 용을, 다른 검은색 머신이 몸을 붙잡고는 속도를 억제하고 있었다.
관리자는 왠지 화난 표정을 지으며 스크린에 비춰지는 용과 올림피안을 번갈아 보았다.
'강화 리액터를 장착하지 않았더니 몸싸움에서 밀리게 되었군. 짜증나게…. 노바급 리액터나 얼터니움 리액터를 하나 달았다면 이 정도의 적조차 별 것 아니었을텐데.'
예상과 달리 완벽히 붙잡아서 멈추게 하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이 정도는 드래곤이 접근치 못하도록 함선 자체를 평행 기동하면 되는 문제였다.
관리자는 턱을 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 드래곤 자체가 정말 펜드래건 쪽에서 나온 것인가?'
'그렇다면 원래 침식체가 아니던 것이, 에델의 힘에 의해서 변질되었단 거겠지.'
'다만… 그게 사실일 경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뭐지?'
다른 모니터를 통해 에디와 제시카와 찰리가 바주카를 들고, 도로시들이 탄약을 가져오는 모습을 보며, 관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선체의 방향을 조정했다. 올림피안이 뒤에서 붙잡은 드래곤을 앞에서 쏠 수 있도록.
다만 그때, 관리자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은폐장을 걷고 용을 들이받는 알비온.
"뭐, 뭐지? 왜 지금 나타나나?!"
오히려 관리자가 당황하며 알비온을 향해서 물었다. 그리고, 갑자기 알비온에서 내리며 뛰어 점프한 엘리자베스. 그녀는 무슨 검을 쥐고 있었는데, 그것을 지금 용의 머리를 향해 찔러넣었다.
"자네들은 에델이나 레지나가 나타날 때 움직인다고 하지 않았었던가?"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휙 넘기며 말했다.
"작전변경입니다. 반신반의했지만… 정말로 가아그셰블라는 학회의 마왕 답군요, 간교하고 치졸하게…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서 이용하려 했었다니."
"그렇다면 그 검은 설마…."
"과거, 한때 인간으로 모든 용들의 수장이 된 남자. 제 몸에도 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검은 바로 그 맹약의 증거. 어쩌면, 신성 침식체로 타락하게 되었어도, 이 성검을 통해 우리의 친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성… 침식체라…."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신격에 도달한 로마 시대 이전에도, 지구 각지에는 신성을 가졌던 괴수들과 요괴들이 있었다. 그런 존재들의 예로 일본의 오로치나 인도의 가네샤가 있었는데, 북유럽의 드래곤도 이와 같은 급이었다.
'인류는 예수교 이후로 스스로 신에 도달하는 방법을 잊어버렸었다. 또한, 굳이 예수교의 잘못은 아니지만, 과학의 발달과 전파로 인해서 다른 문화권도 신성을 가진 존재와 접선하는 방법들을 단지 미신으로 취급하며 잊게 되버렸지. 지금 신성을 가진, 침식체가 아닌 순수종은 오로치만 남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잠깐… 신성? 정말 그것인가? 혹시 에델이 원하는 것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 갑자기 관리자가 올림피안을 통해 이상한 것을 느꼈다. 머리에 성검이 찔렸던 드래곤이 이내 눈을 크게 뜨면서 체내에 열을 급격히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엘리자베스나 다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머신을 사용하는 관리자만 스캔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뭔가 이상해! 다들 피해라!"
관리자는 그렇게 외치면서 코핀 함을 뒤로 빠르게 물렸다. 급하게 기동을 하면서 다들 함선 바닥에 넘어지긴 했지만, 능숙한 조정에 다친 사람은 없었다. 지금 눈 앞의 엘리자베스만 당황하며 성검을 더욱 찌르거나 그냥 뽑으려고 칼을 쥐고 앞뒤로 계속 움직이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뭘 하는 건가?! 빨리 알비온으로 들어가게나!"
"자, 잠깐… 그럴 수는…!"
그리고 드래곤은 눈을 감았다가 번쩍 뜨면서, 땅에 침을 뱉듯이 불길을 뿜고는, 온 몸을 뒤틀었다.
그것에 의해서 튕겨나온 관리국 타이탄. 관리자는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오버히팅…. 자신의 몸을 데워서 순간적으로 파워를 얻는다. 생명체 주제에 기계 같은 방법을 쓰고 있군…."
관리자가 옳게 파악했듯, 체열로 인해 근육이 버핑된 드래곤은 아직 힘이 충분하지 않은 올림피안 주피터를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이다.
"꺄아아아아악--!!" 용의 머리에 박힌 성검을 잡은 채 소리를 지르는 엘리자베스.
그리고, 드래곤은 또 앞발로 그 거대한 알비온을 붙잡고, 갑자기 밑으로 날개를 접으며 추락했다.
"…밑으로 떨어져? 잠깐…!"
호수로 빠지는 용과 알비온. 그리고 드래곤이 거대한 불길을 내뿜자, 쫒아 다가가려고 했던 관리자는 비틀어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저것에 맞으면 지금 완전체가 아닌 올림피안은 확실히 중파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딱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호수 안쪽에 대체 뭐가 있길래? 아니면 그냥 처박으려고 했던 것인가?'
거대한 물 웅덩이 안쪽에 잠수한 타이탄은 거기서 공간균열을 볼 수 있었다. 드래곤 자체인지 아니면 에델이었는지, 지금 이 워프 게이트를 열고서 그쪽으로 알비온을 함께 데려갔던 것.
'…상황이 전혀 좋지 않아. 원래는 이쪽이 멀리서 포격을 하면서 에델을 도발하는 유리한 상황에 있었지만, 이젠 프리드웬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서둘러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이 됬어. 그렇지만 엘리자베스들을 이곳에서 잃을 순 없다…. 지금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관리자는 잠시 고민하다, 코핀 함을 이쪽으로 당기며 한솔들을 불렀다. 함선 스피커를 통해 직접 물어봤다.
"지금 드래곤은 알비온과 함께 공간균열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다. 다만, 그 드래곤은 애초부터 저 성에서 나왔던 것이니, 지켜야 할 기지를 버린 채 멀리 도망쳤다 생각되진 않아. 한솔, 바로 저곳으로 진입하여 그들을 구하러 갈 수 있겠나?"
제시카가 물었다. "왜 사장님이 직접 쫓아가질 않는 거지?" 관리자가 대답했다. "아직 성에 더욱 강한 적이 남아있어. 만일 내가 저쪽으로 들어가면 마왕을 막을 게 없게 돼."
"알겠습니다."
"그러면 아키와 루시드, 그리고 도로시 양들과 함께 가서 알비온을 찾게."
관리자는 코핀함의 함두를 공간균열 저편에 밀어넣었다. 저편엔 판타지 던전처럼 보이는 미지의 풍경. 한솔은 함에서 내리며, 바닥을 밟으며 물었다. "…도로시들과 루시드 씨는 여기 남아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뭔가 질문이 많군….'
상관이 지시를 했다면 보통 대답은 긍정일 것이다.
하지만 관리자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권위만으로 인정을 받는 리더는 없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이 상황을 이해하고 파악하며 상관의 결정이 어떤 판단에서 오는 건지 알아야만 한다. 로마 군단부터 그랬듯이 결국 자신들의 지휘관이 정상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임을 확신해야 지지할 수 있는 거다.
"도로시는 빠르니까 길을 찾는 것에 적합하고, 허수아는 가지고 있는 장비로 나와 교신할 수 있네. 또한 리온은 자네가 가진 검으로 부술 수 없는 단단한 장해물도 처리할 수가 있어."
"과연… 알겠습니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며 벌벌떠는 아키. 그리고 왠지 묘하게 즐거운듯 도로시들과 농담을 하면서 내리는 루시드. 한솔은 자신의 검을 허공에 붕붕 휘둘러 본 뒤, 심호흡을 하고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앞섰다.
그걸 모니터로 보며, 관리자는 수아를 불렀다. "허수아 양, 들리나?" 그러자 토끼 같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허수아. "응, 사장님." 관리자가 지시했다. "공간 안이 어두우니 한솔에게 항상 불을 비춰주고, 그의 말엔 즉각 따르도록.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게." 수아는 헤드기어에 'O' 표시를 띄웠다.
한편 어딘가에….
그곳은 성일까, 아니면 한솔들이 들어간 던전 최심부의 지역일까.
보라빛 벽돌에 둘러쌓인 기묘한 공간에. 짙은 연기가 방을 가득 채워, 알아보기 힘든 색깔들이 춤추듯 불타는 양초가 곳곳에 꽂혔다. 이국적인 느낌의 고풍스러운 가구가 배치되어진 방 안.
에델은 읽지도 않는 책을 갖고 놀듯 만지다가, 공허하게 죽은 눈을 하고 있는 레지나를 보면서 쿡쿡 웃었다.
"아아… 레지나님. 이제, 곧 저희와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있어요. 이렇게 되기를 얼마나 기대했는지…. 그리고 레지나님을 안전히 모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왔었는지…."
레지나는 마치 차가운 인형과 같이, 어떤 미동조차 보이지도 않고 그냥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 조용히 책을 내려놓으며, 에델은 중얼거렸다. 음험한 위험한 눈길로, 레지나의 뒤로 다가가서, 지적이고 교양있는 옷차림과 달리 기분 나쁜 변태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그녀를 안았다.
"아… 아… 레지나님… 차가워서 기분 좋아…."
그런 에델의 모습을 보며, 리벳은 뭔지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뭐죠, 리벳?"
"으응, 아니. 단지… 이러면 레지나가 정말로 좋아할까 궁금해서."
"당신이 걱정할 일은 아니죠, 용병."
레지나를 볼 때와는 달리, 무미건조하고 위협적인 목소리였지만 리벳은 신경쓰지 않았다.
"용병 맞지. 당신이 아니라 레지나에게 고용된."
"저는 더이상 당신이 여기에 남아 있어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겠군요."
"아니… 곧 알게 될 거야. 그때까진 여기에 있어도 되겠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리벳은 왠지 장소의 공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에델은 단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리벳을 향해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레지나님은 당신을 좋아하셨죠. 새롭게 눈을 뜨실 때, 당신이 옆에 있으면 편안하게 느끼실지 모르겠네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리벳은 급하게 말했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에델은 악의 없이 말했다. "네, 영원히 돌아오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리고 리벳이 그렇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자, 책상 위에 올려놨던 책을 집고 중얼거렸다.
"오는군요… 프리드웬. 이렇게 멋진 선물을 저희에게 주셨으니, 보답하지 않는다면 곤란해요." 그러면서, 에델 또한 불빛이 닿지 않는 저편에 또각또각 소리를 내면서 걸어갔다.
한편 한솔들은….
던전 안엔 기묘하게 스켈레톤이나 좀비 같은 일반적인 침식체와 다른 괴물들이 존재했다. 조금 더 가니, 늪에서는 인어인이 뛰쳐나와 입에서 화염구를 뿜었다.
도대체 여기는 어떤 곳인가. 한참 지나가던 한솔들은 갑자기 거대한 박쥐를 보기도 했었다….
"어… 어디로 가야 하지? 혹시 아는 거 있어? 사장님이 다른 지시라도 했다던가?"
방금 채찍을 쥐고 달려오는 해골을, 점프하며 칼로 내려쳤던 한솔이 수아를 보면서 물었다.
"…아직. 계속 상황보고는 해도… 몰라."
"곤란하네, 이거."
그러다가 한솔은 갑자기 작은 벼룩인간이 깡총깡총 뛰면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칼로 찌르려고 했을 때, 갑자기 피하며 약올리듯이 뛰는 그것. 그러자, 도로시가 달리며 점프하더니 그 벼룩인간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면서 도로시가 한솔에게 물었다.
"이것들도 침식체일까? 다른 곳에서 보진 못했는데."
한솔은 팔짱을 끼면서 둘러보고는 대답했다.
"아니… 그런 느낌은 별로 없었어. 여기는 대체 어디지? 애초에, 그 거대한 전함과 용이 이곳에 있기는 하나?"
루시드가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방금 우리가 봤던 그 거대한 용의 침식파를 찾으려고 했었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러자, 허수아의 장비를 통해서 관리자가 물었다. "아직까지 용과 알비온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나?"
루시드가 대답했다. "아, 네! 이상해요…. 그렇게 거대한 침식체가 발산하는 기운은 멀리서도 쉽게 느껴져요. 하지만… 마치 우리가 잘못 들어온 건 아닌지, 맞다고 해도 대체 어디로 갔는지 그것조차…."
관리자는 그걸 듣고 깍지를 끼며 생각했다.
'애초에 이 공간은 대체 뭐지? 용이 알비온을 잡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또한, 루시드는 방금 그런 대형 침식체는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말했지만 밖과 달리 이곳에선 전혀 감지하질 못한다고 했어. 그럴 수 있나?'
'하지만 어떻게?'
…….
'침식체가 더이상 침식파를 뿜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제일 쉬운 방법이 있지. 바로 죽이는 건데… 하지만, 그렇게 큰 드래곤 자체를, 한솔들이 쫓아왔을 때 바로 해체하듯 없앴다고? 애초 에델이 원한 것은 드래곤, 그것도 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닌 신성이었어.'
'그게 아니라면… 침식체를 다시 되돌렸던 건가? 그런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단지 내 시선을 끌기 위해서?'
계속 생각해봐도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하는 건지, 에델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없었던 관리자는 늦게서야 알아챘다. 그리고 한솔을 급하게 불렀다.
"한솔 군, 그곳에서 당장 돌아오게!"
"네? 하지만…."
'당했다… 애초에 성수라고 했어도, 드래곤이 이런 포탈을 열 수 있을리 없어. 처음부터 에델 스스로가 용을 조종했던 것인지도 몰라.'
관리자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거였다. 호수 밑에 거대한 포탈을 두 개 설치하고, 용이 알비온을 쥐고 그쪽으로 들어갈 때 첫번째 포탈을 닫는다. 그리고 남아 있는 두번째 포탈을 그대로 둔다면, 바깥에서 호수 밑에 다가와서 조사하는 자신들의 눈엔 그걸 타고 사라졌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속임수였었다.
'이런 간단한 트릭이 대체 다 뭐였는지. 그렇다면… 분명 성의 지하에 드래곤과 알비온이 있다는 거겠지. 엘리자베스들은 아직 죽지는 않았나…. 가자.'
"침식체와 알비온은 거기 없어. 아마 성의 지하에 있겠지. 이 포탈은 당장 닫히진 않겠지만, 어쨌거나 서둘러서 함으로 귀환하게. 내가 직접 성의 지하까지 가서 고용주들을 구출하겠네!"
"알겠습니다!"
모두가 관리자의 지시를 들었고, 한솔을 뒤따라 가려고 할 때였다. 그때 루시드는 멈춰서서 거대 침식체 박쥐를 보았다.
"루시드 씨, 왜 그래요?"
"아뇨…."
루시드는 박쥐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솔에게 말했다.
"저기, 먼저 가주세요."
"어? 하, 하지만 여기에 혼자 남기고 갈 수 없는데…."
한솔이 곤란한듯이 말하자, 루시드는 자신있게 웃으면서 말했다.
"먼저 가세요, 저도 곧 갈테니까."
"그러면 빨리 오세요."
…지금 회화는 관리자도 들었지만 어쨌건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 빨리 가야 에델을 막을 수 있기에.
관리자의 타이탄은 수중의 호수에서 함내로 들어갔다. 다시 외벽을 닫고, 물을 외부에 방출한 후에 내벽을 열어 격납고에 쿵쿵 거리면서 걸어 들어갔다. 성 밑 지하까지 들어가면 네이팜 런쳐는 아군에 피해를 줄 수 있기에 딱히 유용한 무기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 무기를 교체하기 위해서 둘러보는 것이다.
'아모건, 레이저, 핸드캐넌, 헤비시즈, 리코일건, 네메시즈, 스틱스, 데빌클로…. 리코일건은 지금 평범한 타이탄 런쳐와 같은 급이고, 그 이상의 위력을 찾아야 한다면…. 이 중에서 가아그셰블라에게 공격이 통할만한 것은 당연히 데빌클로겠지. 유일한 레거시 디바이스급 무장이니까.'
집게처럼 보이는 팔에서 플라즈마 구체를 형성시켜 공격하는 이 가공할 파츠는 에델과의 전투에도 전혀 밀리지 않을 화력을 가졌다. 문제는, 지금 추가 리액터를 장착하지 않은 올림피안 주피터는 이를 오래 유지할 파워가 없다는 것. 플라즈마 발생기를 일 분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거다.
"다만 이것까지 쓰면, 내가 가진 패를 전부 보여준 것과 다를 게 없다. 훌륭하군, 에델…. 지금 내가 가진 모든 패를 드러나게 하였다니."
관리자는 화난 표정을 자신도 모르게 지으며, 신속히 올림피안의 무장을 데빌클로로 교체한 뒤에 전함 밖으로 부스팅을 하면서 날라들었다.
고요한 호수의 표면은, 갑자기 거대한 검은색 머신이 수직으로 솟아오르며 깨트려졌다. 타이탄은 바로 수평으로 빠르게 고성을 향해서 날아갔다. 전속으로 가속하는 올림피안, 곧 성벽을 향해 거대한 양클로를 내밀고는 그냥 기체 자체를 갖다 처박아버렸다. 아예 와르르 무너진 돌벽.
관리자는 타이탄을 움직여 대충 내성을 부수고 날뛰며,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사기의 정확한 근원을 찾으려고 했었다. 스캔이 통하지 않는 지하의 공간. 거기에 용과 알비온에 있다 생각해, 거대한 클로를 우겨박아 흙더미를 긁었다. 챙! 하고 부딪치는 소리. 땅을 파보면 그곳엔 거대한 강철 쉘터가 있었다.
"그랬겠지… 오래 전에 이곳에 몰래 거대한 지하 기지를 건설해 준비를 했고, 방금은 용을 사용해 알비온을 이곳으로 연결되는 포탈로 잡아 끌인 것이겠지."
관리자는 타이탄의 데빌클로의 파워를 작동시켰다. 이 초 뒤에, 양 팔에 거대한 푸른색 플라즈마 덩어리가 나타나 부풀었다. 공간을 일렁이는 엄청난 위협적인 기세.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쉘터의 천장에 처박아버렸다.
마치 녹은 플라스틱처럼 쉽게 찢어지는 쉘터. 관리자는 급히 파워를 다시 껐다. 이제 에델과 싸울 땐 오십 초 정도만 쓸 수 있겠지. 그리고, 클로로 입구를 양쪽으로 밀며 더욱 벌린 뒤에, 안쪽으로 들어갔다.
밑으로 들어가자마자 드래곤의 침식파 시그내쳐 신호가 잡혔고, 알비온의 신호도 잡혀졌다.
"역시 쉘터가 침식 파장을 차단하고 있었군…."
관리자는 알비온을 향해 회선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프리드웬인데다, 릴리까지 같이 있었으니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됬다.
"무사한가?! 지금 성의 지하까지 내려왔다!"
치직거리면서 탄창을 가는 소리가 들리다가 모니터에 리코리스가 보여졌다.
"주인님?! 아, 아니… 사장님! 뭐야,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어? 그것보다 성의 지하라고?"
"자네들은 용이 알비온을 잡고 호수로 떨어졌던 직후에, 성의 지하에 있는 쉘터로 가는 포탈을 타고 이곳에 떨어진 것이다."
"정말? 그랬었던 거야? 우린 완전히 그 마왕인가 뭔가의 함정에 빠져서 어딘지도 모를 이면세계까지 왔다고 생각했었는데…."
회선을 열고 통신에 집중하던 리코리스의 뒤에, 갑자기 눈과 입에서 이상한 촉수가 자라나오는 기괴한 괴물이 보였다. 관리자는 급하게 외쳤다.
"리코리스, 피해! 뒤에 괴물이 있다!"
"자, 잠깐?! 히야아아앗!?"
그것을 듣고 당황해 근처에 세운 창을 급하게 잡았던 리코리스였지만, 옆에서 나는 총소리가 더 빨랐었다. 탕, 하고 총을 맞곤 넘어진 괴물. 뒤에서 릴리가 조용히 다가왔다.
"고, 고마워…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네."
"리코리스, 메이드는 어떤 상황에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애초 싸우는 게 어떻게 메이드의 일인데?'
"그것보다 주인님께 보고드릴 것이 있으니까, 대신 다른 분들을 도와드리러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 빨리 갈게! 너도 빨리 끝내고 와!"
리코리스는 창을 등에 매고, 샷건을 쥔 채 달려나갔다.
"릴리?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알비온은 지하공동으로 추락했습니다. 함선의 상태는 양호하지만, 주위로부터 침식체로 추정되는 벌레들에게 잠식된 시체들이 저희를 둘러싸고 공격하는 중입니다."
"양호하다면 왜 날지 않는 거지?"
"지금, 마왕 가아그셰블라가 여기 나타났습니다. 무턱대고 부상하면 되려 공격을 받아 파괴될 위험이 있어서….'
그 순간에, 밖에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뭔가, 이 소리는?"
"버넷 경과 레지나란 분이 대치하는 중입니다."
"둘이 싸운다고?! 다른 인원들은 어떻게 되었나?"
"아직까지 사망자나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스캔을 마치고 볼 수 있었다.
드래곤은 마치 죽은듯이 그곳에 누워있고, 알비온도 옆에 떨어졌다. 마치 자신의 존재 자체를 숨기려고 하지 않는 듯이 에델은 오히려 강력한 침식파를 계속해서 방출하고 있었다.
관리자는 외치며 회선을 끊었다. "알겠네, 곧 그쪽으로 가지!"
삼 분 뒤에….
숨을 헐떡이며 레지나를 노려보고 있는 로이. 왼손에 쥔 거대한 강철 방패는 벽처럼 그를 지탱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쥔 사람이 한계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반면, 탁해진 죽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단지 주위에 얼음 조각을 떠올려놓다가, 다시 그것을 날리는 레지나.
여러 방향에서 찔러드는 얼음 가시.
하지만 이쪽은 방패를 들었다. 막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챙, 튕기는 소리와 함께 칠흑의 철면에 부딪치며 깨트려진 스파이크, 로이는 이마를 꽉 잡으면서 숨을 헐떡였다. 땅에 무수히 많이 떨어진 빙결 조각을 밟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하필 이런 때에…!"
레지나는 단지 인형처럼 버넷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단지, 멀리서 보고만 있었던 에델이 손을 들어올리자, 레지나도 본인도 따라 맞춰 손을 올렸었다.
"이… 이, 바보! 뭐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엘리자베스가 달려와 로이를 밀쳤다. 그가 서있던 위치로, 거대한 얼음 가시가 땅에서부터 찌르듯이 솟아올랐다. 쿠다당, 하고 바닥에 엎어진 두 사람. 한 번 쓰러진 로이는 이빨을 갈면서 일어나려 했었지만, 두통이 심해서 그럴 수 없다.
그 모습을 보고 리사는 다급하게 그를 흔들었다. "로이, 로이…! 괜찮아?!"
너무나도 이상했다.
레지나 본인은 원래 이렇게까지 강한 카운터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왕인 에델이 그녀에게 뭔가를 했는지, 지금의 그녀는 과거와 비교해 너무나도 강해졌다. 여차하면 레지나 정도는 로이가 제압한다 모두가 예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던 거다.
"으윽… 침식파가…."
"도대체 왜 따라온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집에 있었으면 좋았잖아!"
마치 옛날처럼, 울먹이는 소녀 같은 목소리다. 로이는 억지로 눈을 뜨면서 말했다. "기관장이 간다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 기지에 처박혀 있겠어? 윽…." 그리고 고통에 의해 다시 찡그리며 양쪽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엘리자베스는 어떻게든 로이를 잡으면서 일으키려고 했었다. "이렇게 될 거 같아서, 그랬단 말이야…!"
하지만 무리다.
로이 뿐만이 아닌, 그녀도 매우 지쳤다.
…그리고, 적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쇄도하고 있다.
멈추지 않고 총을 쏘던 모건은, 상황이 거의 끝난 걸 보곤 눈을 감으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는 것도 나쁘진 않군." 라이언도 눈을 감으며 죽음을 각오한듯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쓰러트린만큼 더욱 몰려오는 침식체들.
그리고, 한 방향에 탄을 뿌려서 처치했다고 생각하면, 지면에서 다시 솟아올라 다가오는 적들.
리코리스는 신경질을 부리면서 둘을 향해 소리쳤다. "정말! 뭐하고 있는 거야?! 할아버지들이야 지금 죽어도 괜찮겠지! 우린 아냐, 좀 더 젊을 때의 실력을 보여줘 봐!"
그때.
갑자기 에델이 다가오며 손을 탁 튕겼다.
"그만."
그 소리와 함께, 눈과 입에서 이상한 촉수가 계속 자라나던 시체들은 일시에 멈췄다. 저런 지능조차 없어 제어하지 못할 것 같은, 추악해 기괴스러운 혼돈을 완벽히 제어하는 그녀의 모습에 새삼스럽게 다시 위압감이 느껴졌다.
"갑자기 궁금해졌네요." 그녀가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말했다.
"…뭐라고요?"
"어차피 다 이겼으니 상관은 없겠죠. 당신… 펜드래건의 따님. 저 검이 대체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
"왜 내가 그걸 말해줘야만 하죠?"
그러자 에델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몸으로부터 어두운 형체를 길게 늘리었다. 매우 이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과,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입. 그것들은 징그럽게 그 표면에 붙어서 미친듯이 주위를 향해 들썩이고 있었다.
"아뇨, 말씀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저희와 하나가 된다면 모두가 알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 게 별로 취향은 아니신 것 같아서 베푸는 친절이예요."
"……."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도 얼마 없었다.
"그 검은… 콰이더스. 과거 전설의 세 용사가 마왕 코락스를 죽이기 위해 사용했던 무기들 중 하나죠. 다른 두 무기, 레이스버지와 블러드스커지는 이면세계로 사라졌지만, 검만은 저희 가문이 대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에델은, 마치 죽은 듯이 씩씩 뿜을 내뿜으며 누워있는 용의 머리에 얕게 박힌 검을 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콰이더스… 콰이더스… 아! 퀴에투스! 그 바라투스가 사용하던 검이군요. 하지만 어째서 여기에?"
"…바라투스?"
"역시 영국인의 발음은 이해하기 힘들군요. 어쨌던간… 이 검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한 건지 여쭤보고 싶네요."
엘리자베스는 도대체 에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서 단지 머뭇거리며 답했다.
"그 검은… 아냐. 그럴리가? 저희 가문에 내려진 전설엔 모든 용들을 굴복시킨 전사가 그 검을 맹약의 증거로 썼다고 했었어요. 그게… 설마?"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되며, 신화는 결국 망각의 품에 안기죠. 또한 그 과정 자체도 결국 불안정하고요. 이건 그런 로맨틱한 물건이 아닙니다. 옛날 왕들이 신하들에게 내밀며 명령한 그런 홀 같은 게 아니지요."
"그, 그럴리가…?"
당황하며 엘리자베스가 드래곤을 쳐다봤다. 그것을 보면서 에델은 추측을 그대로 말했다.
"그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해줬었나요? 상냥한 도마뱀이군요. 자기 원수의 혈족도 결국 용서했다니."
"설마… 이 검은… 용살검?"
"아뇨."
에델은 순간이동을 하듯이, 갑자기 그곳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저편에서 또각또각 걸어나왔다. 그리고 검을 살짝 만지며 중얼거렸다.
"퀴에투스 에스트… 라틴어로 그는 떠났다란 뜻이죠. 세상을 하직했다는 말로서 들으면 되겠네요. 퀴에투스라는 단어는 이후 죽음의 원인이라는 의미의 단어로 불러졌었죠."
에델은 검의 손잡이를 쥐어봤다.
갑자기, 초록빛으로 타들어가는 손바닥.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에델은 단지 손을 빼서 옷깃에 닦듯이 문질렀다. "역시… 저는 거부하네요. 그렇겠죠. 혹시, 신을 죽일 수 있는 검들이 - 신성을 가진 존재를 죽일 수 있는 검들이 - 이 세계엔 얼마나 많았는지 아시나요? 울브즈베인, 엑스칼리버,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듣다가 이상하단 목소리로 물었다. "자, 잠깐… 엑스칼리버가 진짜 존재했었나요?"
자신의 손이 다시금 재생하는 것을 쳐다보던 에델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 갑자기 쿡쿡거리며, 검지만 살짝 올린 손을 입가에 대고 웃었다. "음? 아하하하… 의외로 시니컬한 부분도 있으시네요? 펜드래건의 따님이 엑스칼리버 자체를 의심하고 계셨다니?"
"그렇다면 저 검의 진정한 정체는…?"
"당신이 이미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엘리자베스. 이것은 마왕을 죽였던 검이죠. 생각해보면 특이한 작명이네요. 그 마왕은 왜 죽었을까요? 찔려서. 후후, 이 검이 바로 그 원인이죠. 퀴에투스… 흠. 누가 지은 이름일까요? 죽음의 원인이라…."
에델은 장난을 치듯이, 검의 칼날을 검지로 툭툭 치며 가리켰다. 그러자, 그것을 만진 검지가 다시 썩듯이 타들어갔다. 그러자 에델은 따끔한 듯이 중얼거렸다. "아야." 손가락의 마디가 썩어 떨어진 상태에서, 에델은 마치 뜨거운 것을 만진듯 그냥 손을 호호 불었다. 몇 초 지나, 없어진 손가락이 다시 자라났다.
잠시간의 침묵.
에델은 곧 흥미를 잃은 듯이, 단지 몸을 돌리며 주위를 보았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다시 물었다.
"방금 것은 확실히 흥미로운 문답이었어요. 그렇다면 제 질문에도 답해주실까요?"
"어라, 뭐가 그렇게 궁금하시죠?"
"어째서 오래된 목소리를 납치하고 침식체로 타락시켰나요? 마왕 가아그셰블라는 성수를 딱히 하수인으로 삼을 이유가 없었을텐데?"
"그건…."
에델이 고개를 들면서 엘리자베스를 향해 대답하려고 했을 때였다. 그때, 저 멀리서, 바로 동굴의 천장을 아예 박살내면서 떨어지더니, 이쪽으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워머신이 보였다.
"저, 저건 설마…? 어떻게 여기 온 거야?!" 로이가 놀란듯 소리를 질렀다. 뒤에서 릴리가 나타나며 중얼거렸다. "후훗, 역시 늦지 않게 오시는군요."
'…모두 죽진 않았다. 알비온의 피해는… 정말 딱히 심하지는 않군. 하긴, 전함이 그렇게 쉽게 망가져도 이상하지.'
에델은 날아오는 타이탄을 향해 느긋이 고개를 돌렸다.
콰직!
보자마자 데빌클로의 거대한 팔에 마치 인형뽑기 크레인과 같이 온 몸이 잡혀버리고, 그대로 벽에 처박힌 에델의 형체. 그 과정에서 벽에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이, 이겼나?!" 리코리스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질 않았다. 관리국 타이탄은 그대로 데빌클로에서 플라즈마 발생기를 가동시켜, 손에 붙잡힌 에델을 아예 녹일듯이, 전력으로 에너지를 방출했다. 미친듯한 화력 앞에, 너무나도 어두운 지하공동 자체가 푸른 빛으로 번쩍거렸다.
라이언이 멀뚱멀뚱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무슨 대단한 파워…! 이 정도면 제4종 침식체 따위완 아예 비교되지도 않습니다만…." 모건 또한 조용히 주머니를 뒤적이며 말했다. "후, 마치 영화 같군."
하지만 관리자가 다급히 외쳤다.
"아냐, 방심하면 안 돼! 지금 알비온에 타고 도망치게!"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오직 30초 동안 이 녀석을 붙잡을 수 있네! 이 괴물이 아무것도 못하는 사이에 빨리 가게나!"
"어? 뭐?" 담배를 피우려고 했었던 모건은 그 소리를 듣고 멈췄다. 리코리스가 소리질렀다. "들었죠? 빨리 가요! 아까 전까진 인생 포기한 늙은이처럼 징징대더니 도대체 뭔 여유람?!" 그리고 멀리 있던 릴리도 엘리자베스와 함께 로이를 부축해 알비온에 탑승했다.
"20… 19… 18… 17…."
관리자가 그렇게 초조하게 세고 있을 때, 알비온은 방해조차 없이 이륙해서 천장을 향해 포문을 열고 쏘았다. 무너지듯 돌덩이가 떨어지는 동시, 푸른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맑게 보였다.
"10… 9… 8… 7…."
알비온은 잠시 멈추더니, 바로 은폐장을 키며 전력으로 상승하며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가아그셰블라는 이때까지 단지 플라즈마에 갇혀 아무것도 하질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역시 마왕은 마왕이군. 힘이 부족하다. 이걸로는 아직 죽이질 못해.'
원래 설계대로라면 이 데빌클로는 마왕도 죽일 수 있는 레거시 디바이스급 장비였지만, 지금은 관리국 타이탄 자체가 충분한 파워를 내지 못하기에 결국 치명적인 피해는 주지 못한 채, 단지 움직임을 묶는 정도에 그쳤다.
"5… 4… 3…!"
관리자는 타이탄을 뒤로 기동시키면서, 클로에 생성된 플라즈마 구체를 아예 터트리듯이 붕괴시키고 자신 또한 알비온이 상승했던 길로 도망쳤다. 그리고, 마침내 플라즈마 구체에서 튕겨져 떨어져 나간 에델은, 바닥에 누워있다가, 고개를 흔들며 털듯이 일어났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안타깝군요… 저희와 하나가 될 가치가 있는지, 잠깐 시험해본 뒤에, 무한한 영생을 축복하려고 했었는데요…."
에델은 숨을 헐떡이는 드래곤을 향해서 눈알을 희번뜩이며 명령했다.
"잡아오세요, 당장."
그러자, 드래곤은 마치 좀비가 땅을 팔로 잡고서 일어나듯이, 날개를 지면에 대고 상체를 일으켜 포효를 했다가, 이내 밖으로 날아올랐다.
매우 위급한 상황. 관리자는 도망치는 알비온과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며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직시하며 인정했다.
'우린 지금 졌다.'
'계속 싸워도 이길 방법이 없어. 지금은, 손실을 최소화하며 후퇴하지 않는다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며 관리자가 알비온에 회선을 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리며 날개를 퍼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관리자는 딱히 보지도 않고 알아챘다. "용인가! 에델 녀석, 그렇게 화났나?!"
관리자는 타이탄을 뒤로 돌려놓고 클로를 펼쳤다. 그리고 날아오는 용에 비스듬이 꺾듯 돌격하며, 용의 몸통을 쥐었다. 하지만….
카아아아아아아악--!!
클로에 의해 붙잡힌 용은, 갑자기 머리를 배쪽에 당기며 기기긱거리듯 움직이었더니, 체열을 급격히 올렸다. 들러붙은 타이탄을 떨쳐내기 위해 아까 같이 움직이던 것이었나? 하지만 계속 온도를 재던 관리자는 뭔가 본능적으로 매우 위험한 느낌을 받아, 용을 던지듯이 타이탄의 클로를 내치면서 스스로 떨어졌다.
카아아아아아아악, 하면서 포효하는 드래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용의 전신은 이제 체내로부터 흐르는 용암과 같은 열에, 전신을 감싸는 붉은 핏줄을 굵게 드러내며, 마치 움직이는 화산처럼 비늘 주위에 고열의 화염을 둘렀다.
붙어있었다면 큰일이었겠군, 그렇게 생각하던 관리자는 드래곤의 동작을 유심히 보더니, 자신도 모르게 다급히 소리질렀다.
"저, 저 녀석! 알비온을 향해 가고 있어!"
관리자는 부스팅을 시켜 쫓으면서 타이탄의 런쳐를 용을 향해 쏘았다. 하지만 어떠한 피해도 주질 못했다.
"여기서 엘리자베스들을 잃는 건가?! 자… 잠깐, 저건…!"
그때였다.
거대한 박쥐? 혹은 침식체? 뭔진 몰랐지만, 어쨌던간 그걸 타고 있는 루시드와 한솔이 보였다. 한솔은 검을 쥔 채로, 루시드를 향해 말하였다.
"이런 위험한 일까지 맡겨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그렇지만 루시드는 이런 상황에서 왠지 즐거운지, 마치 놀이기구를 타듯 눈을 감으며 외쳤다.
"괜찮아요, 오히려 한솔 씨에게만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없죠!"
그리고 한솔은 오른손에 쥔 검을 뻗어, 마치 스치듯이 드래곤의 발을 긁어냈다. 그러자, 왠지 엄청나게 아픈듯 괴성을 지르면서, 용은 속도를 늦추며 여길 돌아봤다.
"…분명 타이탄의 캐논에도 데미지를 받질 못했는데?"
놀란 관리자는 다시 한솔이 박쥐를 기울여, 용의 반대편에서 다시 그어버리듯 베는 것을 봤다. 그리고 바로 이해하게 됬다.
"그렇지, 용의 갑피가 아닌, 돋아난 핏줄을 수직으로 베어낸 거였어!"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관리자는 다시 의자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한솔은… 멀리서 보기에 적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텐데 정확히 대응했다. 대단하군." 그리고, 모니터를 통해 다시 모기처럼 용을 괴롭히는 한솔들을 다시 지켜봤다.
"꺄악! 뜨, 뜨거워!"
"괜찮아요, 루시드 씨?!"
"…네! 저도 일단 카운터니까요!"
굵게 돋아난 핏줄을 계속 찢어버리듯 베어가르는 한솔에, 용은 엄청난 고통에 빠지며 몸부림을 치며 사방으로 브레스를 내뿜었다. 오히려 광란에 빠지자 더욱 놀리기 쉬운 사냥감이 되어진 드래곤. 하지만, 한솔은 자신의 검을 보면서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칼날이, 녹고 있기 때문이다.
용을 보자마자 핏줄을 긋는다는 발상이 떠올랐던 한솔이었지만, 당연히도 저렇게나 뜨거운 화염을 몸에 두르고 있는 드래곤이 그렇게 쉬운 상대일리가 없다. 곧, 녹던 칼날은 아예 부러지듯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칫… 아, 안 돼!" 한솔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루시드도 잠시 그것에 신경이 팔렸다.
그리고 그 틈을 드래곤은 놓치질 않았다. 곧바로 자신의 주위를 짜증나게 맴돌던 박쥐를 보면서, 숨을 들이키고 화염을 내뿜으려 했었다.
"아, 아, 아…!"
루시드는 곧바로 자신이 조종을 잘못했기에 이런 위험에 처했단 사실을 깨닫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식체의 털을 꽉 잡았다. 하지만 그때….
콰앙!
갑자기, 거대한 용의 몸이 무언가에 부딪친듯, 목이 꺾이면서 브레스를 하늘에 내뿜었다. 바로, 은폐장이 걷히면서 알비온이 나타났다! 그때 사장이 다가와 급히 말했다. "타게, 한솔!"
"네?!"
"검이 부러졌지? 지금 저기에 하나가 있어!"
용의 몸체 부분은 스스로의 화염에 뒤덮이긴 했었어도 뇌가 있는 머리는 그렇지 못했다. 한솔은 바로 타이탄에 올라타며 머뭇거리듯 말했다.
"하, 하지만, 엘리자베스 씨도 제대로 쓰지도 못한 검인데…!"
"그녀가 검사로 보이나? 여기서 제대로 된 검사는 너 하나 뿐이다, 진짜 기사가 되라!"
그렇게 말하며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용을 향해 돌진하는 사장과 한솔.
루시드는 그렇게 날아가는 둘을 보면서 신나게 외쳤다. "좋아, 가요! 사장님, 한솔 씨! 파이팅!!" 그녀가 타고 있었던 거대 박쥐는 땀을 삐질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허공에서 몸을 비틀던 용은, 이내 자신의 옆에 함두를 처박은 알비온을 보고 화내듯 머리를 들어 선체를 씹으려고 했었다. 그때였다, 관리자의 타이탄이 갑자기 날라오더니, 위에서 한솔이 용의 이마에 내리며, 검을 잡고서 매달렸다.
그러자, 검신에 짙은 초록빛 오라가 불타듯이 피어올랐다.
"저, 저건?!" 브릿지에서 한솔을 보던 엘리자베스가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전설은 사실이었군요, 검은 사람을 선택해, 초록색 빛을 뿜으며 그에게 힘을 빌려준다고 전해졌는데…!"
용의 머리에 탄 한솔은, 무아지경에 빠져 소리를 지르면서 검을 뽑으며.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다시 용의 머리에 내려꽂았다!
잠시간의, 마치 용의 거대한 심장이 벌떡거리며 뛰는듯한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용의 몸의 내부로부터 거대한 초록색 빛이, 신체를 둘러싼 붉은 화염을 잡아먹는듯이 커지다, 이내 폭발하듯 공중에서 터져버렸다!
곧, 드래곤과 알비온은 모두 땅에 처박히게 되었다.
몇 초 뒤에….
굉장한 소음과 함께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고, 알비온의 상태를 체크했던 엘리자베스는 함에 그렇게 큰 손상은 없단 것을 깨닫고서 릴리들과 함께 함선의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왔다.
고룡, 오래된 목소리.
신화 시대부터 서유럽의 인간들에 자기 지혜와 지식을 나눠주며 인간들을 인도한 고대종. 그 신성한 존재의 운명이 지금 끝에 도달했다.
다만, 마지막 작별의 시간은 있을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씨." 한솔이 자신을 보면서 불렀다.
쥐었던 검의 손잡이를 향해 내미는 젊은 검사.
"……."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눈을 감다가, 다시 부드럽게 뜨면서 말했다. "그 검은,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 한솔 경."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한솔은 눈을 동그렇게 뜨면서 말했다. "네? 하지만 이 검은…."
"오직 당신만이 그 아티팩트를 다룰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보물은 엘리자베스 씨의 가문에 전해져 오던 것이 아니었나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저희 가문은 단지 검이 올바른 주인을 찾을 수 있게 수호자 역할을 했을 뿐이랍니다."
그러자, 아직 죽지 않고 숨을 그르렁거리며 내쉬던 용이 조용히 말했다.
"…Nust wo ni qiilaan fen kos duaan."
고개를 돌려 돌아보는 한솔과 리사는, 어느새 침식파의 기운이 용으로부터 서서히 빠져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Pahlok joorre, Hin kah fen kos bonaar…."
"오래된 목소리…?"
"…Hin sil fen nahkip bahloki, Meyye. Tahrodiis aanne. Him hinde pah liiv! Zu'u hin daan."
무슨 뜻인지 모를 용언을 중얼거리던 그는, 천천히 맑은 눈동자를 비추며 현명한 노인과도 같은 음색을 냈다.
"아니… 그건 아니었다."
한솔이 놀라 경계해 칼날을 용에게 돌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팔을 옆으로 뻗어 그를 제지하곤,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위대한 스승이시여, 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나요?"
"……."
그리고, 그르렁거리는 낮은 숨을 뱉은 뒤에, 천천히 거대한 눈동자를 그녀에게 향했다. "그러하다네… 펜드래건의 젊은 기관장이여."
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던 것일까, 용은 곧 목을 비틀면서 바닥에다 피를 토해냈다.
진짜 죽는구나.
그런 직감이 들었던 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원래부터 이렇게 되어야만 했네. 나의 친구들은 이미 오래 전에 떠났었지. 나도 이젠 출생의 축복을 거두고 저편의 세계로 떠날 때가 되었군."
"……."
"Alas, 기관장이여, 어째서 지식의 마왕이 이 간계를 꾸몄는지 아는가?"
엘리자베스는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드래곤이 말하였다. "나의… 고대종의 몸에 깃든 신성을 강탈하려 했었네. 가아그셰블라 본인에겐 필요없는 것이었는데도: 아마 누군가에게 그걸 부여하려는 의도였겠지. 그런 의식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제서야 관리자는 이해했다.
마왕이 필멸자를 사랑한단 것이 힌트라고 말한 로자리아의 뜻을, 그리고 에델이 도대체 뭘 하려고 했는지.
드래곤은 스스로의 심장이 멎어가는 것을 느끼는지, 눈을 부릅 떴다.
"하지만…! 신성은 오직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네. 마왕은 나 자신을 침식체로 타락시키면서 내 의지를 꺾으려고 했지만… 애초에 내 결심은 정해져 있었어. 마치 악몽을 꿨던 것 같은 방금까지도… 그것만은 놓지 않으려고 했었던 그 내 결심을… 나는 기억하네."
"그, 그런…."
"펜드래건의 젊은 기관장이여, 나의 유산을 이제 그대에게 물려주겠네."
그렇게.
고대종은 어떤 주문을 외웠다. 이내, 룬들이 전신의 용비늘을 감싸듯 퍼지며, 밝은 햇빛과 푸른색 신성 자체가 회오리치며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엘리자베스를 돌며 그녀의 몸 중심을 향해 흡수되어지며 곧 일체화되었다: 리사의 등 뒤에는, 빛과 같은 양날개가 펼쳐졌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운명이라고요?"
"과거 자네의 시조가 내게 무언가를 남겼듯이… 나도 무언가를 누군가에 남겨야만 하니. 그것이 신에 달하는 존재의 숙명이니까. 그렇다면… 나의 의지와 함께 세상을 날게."
그것을 끝으로, 고대종은 그대로 사라졌다.
신성을 잃은 사체는 처음부터 거기 없었던 것처럼 아예 소멸한 것이다.
"……."
"기관은, 아니,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스승이시여."
결국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린 리사.
주저앉아 흐느끼는 그녀의 옆으로 모건, 라이언, 로이 셋이 다가왔다.
침묵하고 경례하는 그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기관을 계속 이끌어주던 그가 끝내 마왕에 의해 죽은 건 너무나도 뼈아픈 상실이다.
한솔과 관리국 타이탄은 단지 멀리서 그들을 조용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몇 분 뒤에.
마음을 추스린 엘리자베스는 일어나 타이탄을 향해서 말했다.
"기관의 위대한 스승, 오래된 목소리는 몇 년 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저희에게 말할 수 없을 중요한 일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했었죠."
"마왕에게 세뇌됬을 줄은 자네조차 짐작하지 못한 것이군."
"그래요. 그때, 사장님과 거대한 침식체가 몸싸움을 할 때… 그것이 바로 오래된 목소리였다는 것을 제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랬는데… 음?!"
그때였다.
마치 공간 전체를 휘감는 사기. 그리고 짙게 깔리는 휘몰아치는 어둠.
마왕의 존재감은 모든 카운터를 위압해,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뒤에서 갑자기 차가운 냉기가 느껴진 한솔도, 급히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죽은 눈으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레지나와, 그런 그녀를 인형처럼 옆에 붙잡는 에델이 있다.
"상당히 공들였던 계획이… 하아, 결국 어찌됬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지만요."
레지나의 주위에 마법처럼 신비롭게 떠있는 얼음 카케라들. 그것들이 갑자기 날라오자, 한솔은 반사적으로 쥐고 있던 퀴에투스로 베었다.
증오어린 녹색의 불길에 타오르던 칼날은 다섯 초록색 불길을 뿜어, 얼음 수정들을 폭파시키면서 레지나를 향해 쏟아졌다. 그것을 본 에델이 그녀를 급히 안고서 옆으로 피했다.
그녀들의 뒤에 있던 나무들이 그런 초록색 오라에 맞고, 사물 자체가 그냥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그냥 집어삼켰었다: 마치 식물이 비명을 지르듯 격한 녹빛의 화염에 붕괴되 아무것도 남지를 않았다.
에델은 한솔을 노려봤다. '…잊고 있었군요. 저 저주받을 검이 성수의 머리에 꽂혀져 있었죠. 펜드래건의 소녀조차도 다루지 못한 검이라 위험요소로 고려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설마, 저것을 쓸 수 있는 인간이 이 시대에 있을 줄이야.
관리자도 그걸 보며 기억했다. '이 검… 그리고 이렇게 죽음의 기운을 내뿜는 무언가….'
'맞아, 지금 생각났어. 퀴에투스, 망각의 지팡이와 비슷한 급의 무기야. 하지만 저게 여기 있었을 줄은….'
다만 한솔 본인은 자신이 새롭게 얻은 힘이 적응되질 않았는지, 초록색 불길이 날라간 궤적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무슨… 나는 도대체 뭘 휘두른 거지?'
너무나도 강한 거다.
마치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무기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그 힘에 공포를 느낄 정도로.
"과연 무한한 증오에 불타는 광기…. 하지만 그 정도로 저희들을 이길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랍니다? 아까 그 전기 마사지를 받고서도 완전 멀쩡하니까요."
"데빌클로다."
타이탄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며, 에델은 그림자진 얼굴에 사악한 미소를 띄웠다. 곧, 그녀의 주위로 어둠의 물결이 온 숲을 향해 뒤엎었다. 미친듯이 쾌락에 즐거워하는 소리나,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허우적대는 소리나, 알 수 없이 메아리치는 무언가가 그 표면에 달린 무수히 많은 입들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굵은 촉수들도 갑자기 지면에서 솟아 나오면서 리사들을 가두듯이 움직였다.
"자아…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오직 자신의 옆에 있던 레지나만 바위에 안전하게 앉혀놓은 채로, 에델은 이런 상황에 무언가 지적인 환희를 느끼며, 음험하고 음침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에 짙게 깔린 먹구름이 갈라지듯 빛이 그곳에서부터 쏟아졌다. 에델의 촉수들은 마치 불길에 타오르듯 갑자기 몸을 비틀면서 땅속으로 사라졌다. 이 광경을 보곤, 언짢은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는 에델.
거기에는, 세라펠 본인과 주천사 두 명이 같이 천공에 내려오며 강림하고 있었다.
"가아그셰블라. 물러나라."
"뭔가요, 치천사? 당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닐텐데요?"
에델을 무시하며, 세라펠은 손가락을 레지나를 향하더니, 손가락 끝으로 빛을 뿜었다. 레지나의 눈에 갑자기 색이 돌아오며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죠?"
코핀 사장이나 프리드웬 기관장을 대할 때와 달리 매우 기분 나쁜 목소리를 내는 에델: 오히려 저들이 자신의 계획을 직접적으로 훼방하려고 하였음에도 분노도 동요도 하지 않았던 그녀다; 하지만 세라펠이 레지나의 세뇌를 풀어버리니 얼굴을 아예 구기며 적의를 표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에델의 압력을 담담히 받으며, 세라펠이 통보하듯 말하였다.
"우리 모두가 맺은 조약에는, 마왕은 신성을 탐하지 않는단 조항도 있었다."
"당신 자신도 신성침식체가 아니었나요? 게다가, 어차피 마왕도 얼마 남지 않은 이 세계에… 고작 당신이 나를 적으로 돌리겠다고?"
"…네가 원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진정한 지식의 이해자를 자칭하는 그대가 금단의 지식으로 관능적인 피학을 가르쳐 준다면… 후후, 후후후후…."
그리고 세라펠은 혼자서 광소를 터트렸다. "후후후후… 아하하하하하!!!!"
밑에서 보던 모두는 알 수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을 내리쬐며 나타난 이 존재는 일견 선의 화신인 천사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무언가, 상당히 뒤틀려있다. 어딘가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위협적인 광기가 엿보였다.
'추잡한 취미만 즐기는 천박한 잡종 마왕이….'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에델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발 밑으로 자라난 어둠 속으로 삼켜지며 말했다.
"흐으으음…. 우리가 말을 더 섞을 이유는 없습니다. 오늘 일은 기억해두죠, 치천사."
그리곤, 레지나를 단지 거기에 두곤 사라지는 에델.
에델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을 확인한 세라펠도, 밑에 있는 인간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다시 하늘 위로 솟아올라 사라졌다.
방패를 꽉 쥐고는 긴장하던 로이는, 모두 사라지며 어떤 적대적인 기운도 느낄 수 없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 학회의 마왕이 설마 도망치리라곤…. 하지만 방금 그 천사는 대체 뭐였지?"
라이언이 말했다. "흐음… 우리도 알지 못하는 마왕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가아그셰블라는 그걸 신성침식체라고 말했어. 망할, 한 놈도 벅찬데 다른 놈까지 나타난 건가?"
모건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적어도 기관에 방패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남아서 다행이군…."
"방패? 내 거 말야?"
"프리드웬은 대신성용 무장이라네. 글쎄, 신성침식체 상대로 상성이 맞지 않겠나?"
"농담하지마… 이건 그냥 방패라고. 하늘에 있는 녀석을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프리드웬… 대신성용 무장?'
묘하게도, 관리자가 이전까지 전혀 들어보질 못한 물건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시점으로는 그랬다.
'…어쨌던간 괜찮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상황이 끝난 걸 느껴 주위를 둘러봤다. 담배 연기가 싫어서 얼굴을 찡그리며 엘리자베스 옆으로 피하는 리코리스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땀을 닦는 릴리.
그리고, 그곳에 쓰러진 레지나.
분명 그녀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일텐데도 에델은 레지나만 여기에 두고 떠났다.
'현 상태의 내 기체를 비롯해, 지금 여기에 있는 누구도 마왕을 막을 순 없어. 만일 에델이 몸을 던졌다면 그녀에겐 어떤 피해조차 가하질 못할테니 전혀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모두가 반항조차 못하고 삼켜질 것이고. 하지만 퀴에투스는 한솔을 골랐다.'
저것은 마왕마저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기다.
그걸로 양측에 승산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엔, 그것만이 아니었다.
'세라펠이 천공에서 나타나며 에델의 침식체들을 물렸기 때문에, 에델은 도망칠 수 밖에 없게 됬어. 처음에는 휘하 침식체를 사용해 둘러싸며 교전할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시선을 분산시킬 침식체 모두가 땅속으로 가라앉아 매우 불리하게 변한 조건에선 에델은 도망칠 수 밖에 없던 거다.'
관리자가 유추하는 것대로 그것이 사실이었다: 한솔이 혼자 남은 에델을 마크하기만 해도 그녀에겐 커다란 위협이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선 또 세라펠도 잠재적인 적군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질 않아. 어째서 세라펠이 레지나가 걸린 최면을 풀어준 거지?'
당연히 둘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아마….
'자세하겐 모르지만, 저들은 다른 세계서 볼 수 없었던 조약 같은 관계를 맺고 있었어. 설마 마왕은 신성을 탐하지 않는단 그런 조항이 말고도, 카운터에 대한 특수한 조항도 있다던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참 복잡한 세계군… 내가 이제까지 보던 것들과는 너무나도 달라. 애초 프리드웬에 협력하는 오래된 목소리는 관리자들의 역이 아니었던가? 성수라는 이름의 고대종이 아직까지 남아 인간들과 교류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지금은 어쨌건 좋았다.
관리자는 쓰러진 레지나를 클로로 잡아 업었다. 엘리자베스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 여자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녀에겐 여러가지 물어볼 것이 많네. 레지나 양은 우리 쪽에서 보호하지."
"보호? 맥크레디는 학회의 일원입니다. 더욱이 그 마왕과 깊은 관계에 있는…."
검은색 관리국 타이탄에 업힌, 눈처럼 차갑고 하얀 머리칼을 흩날리는 레지나를, 마치 그보다 더욱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쳐다보는 리사. 하지만 관리자는 장담했다.
"그녀 자신은 나쁜 사람이 아닐세. 내가 장담하지."
"……."
리사는 결국 고개를 조용히 저으면서 양보했다. "그럼, 기관의 이름으로 그녀에 대한 관찰은 맡기겠습니다." 관리자는 올림피안을 철컹거리며 알겠다는 제스쳐를 취하였다.
그리고 한솔에 타이탄의 렌즈를 돌리곤 생각했다. '이번 전투는 매우 위험했다. 펜드래건 영지에서 회의했던 대로, 레지나를 잡아 에델에게 협상을 요구할 생각이었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까. 여러가지 불확실한 요소들이 겹치면서, 양상은 매우 혼란스럽게 발전되었다.
'애초에 이들은 마왕이다. 현시점에선 우리가 가진 어떤 무기도 마왕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어. 하지만 벌써부터 대항할 수단이 준비되었군. 설마 퀴에투스가….'
그리고 관리자는 한솔이 쥔, 무한의 증오에 과격하고 극단적인 기세로 불타오르는 칼날을 쳐다보았다. '여기에 있었을 줄이야.' 화면 넘어로도 매우 강렬한, 격분한 적개심과 적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다만….
관리자와 달리, 한솔은 자신이 쥔 힘을 오히려 불편해하고 있었다. 마치 애초부터 존재해선 안 될, 너무나도 사납고 기괴한 무언가로 인식하고 있는 거다.
'이미 한솔의 힘 자체는 시윤이나 미나하고 견줄 격이 됬다. 문제는 그 자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완전하게 다룰 수 있냐는 것인데….'
…그것은 천천히 생각해도 되겠지.
하늘을 보면 오늘 있었던 일이 마치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도 맑고 깨끗했다. 넓게 퍼트려진 구름들 사이로 느긋하게 오는 코핀. 방금 전까지 싸움을 모두 멀리서 지켜본 함의 사원들은, 밑에 지친듯이 앉아 있는 타이탄과 동료들을 보며 환호하듯 소리쳤다.
지금 이 시간, 유빈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쨌거나 어떤 세계이건 나유빈은 나유빈이니까,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사장은 모두와 함께 코핀에 올랐다.
.
.
.
한편 호라이즌들은….
버려진 관리국 수뇌부에서 좌표추적 장치를 샐비지해, 아슈세이버함을 타고 리타와 대시가 있을 이면세계로 가고 있었던 도중,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마타도르가 뒤쫓아 오는 걸 봤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방해자들과 바로 싸우려고 했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하지만 따돌리려고 임의의 랜덤 좌표로 워프하면서 도망쳐도 어째선지 계속 추적하는 스캐빈저.
호라이즌은 왠지 무표정한 무감각한 태도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렇게 계속 점프해도 금방 따라잡혀… 한심한 조종실력이군요, 휴먼." 하지만 말투 자체는 왠지 짜증난듯 보였다.
나유빈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이면세계의 바다 속에서 이들을 우연히 마주칠 줄이야…. 아니, 정말 우연일까?'
'아냐, 그것보다 애초에 어떻게 따라올 수 있는 거지?'
'지금 우린 몇 번이나 우리 자신도 모를 이면세계로 점프해왔어: 점프 직후엔 어떤 정보조차 남질 않아. 그런데도 계속해서 추적할 수 있다고?'
'애초 물리법칙에도 맞질 않아. 그럴 순 없지. 하지만 어쩌면….'
나유빈은 함선의 내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이 함선의 내부에 어떤 추적기가 달렸다거나?"
"대체 뭘 중얼거리는 겁니까, 휴먼. 운전에 집중을 하질 않으면 뒤에 오는 미사일에 맞습니다." 마치 조수석에 앉아 칭얼대는 여자처럼 투정부리는 호라이즌을 무시하며, 나유빈은 계속 생각했다.
'애초에 저들이 뭘 원해서 우리를 쫓아오는 거지? 아니, 애초에 우리가 누군지나 알고 있나?'
'이 전함은 애초 파괴된 관리국 수뇌부에 보존된 거야. 그걸 그냥 발진시킨 거고.'
'분명히 무언가 위치추적 장치를 함선의 내부에 달았기에 우리를 쫓아오는 거겠지.'
'하지만 거기서 이상한 점이 발생해. 저들은 해적이고 만약에 뭔가 원해서 우리들을 쫓아오는 것이면…?'
계속 추론하면 저들은 금품의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럴리가 없어. 지금 우리가 딱히 희귀한 아티팩트를 싣고 항해하는 것도 아냐. 게다가 우리가 출항하기 전부터 이 함선은 줄곧 거기에 방치되던 상태였어. 과거 어느 시점에 이 함선에 발신기를 장착할 수 있었다면, 아무도 없는 관리국 헤드쿼터 폐허에서 방해조차 없이 물건들을 주워갈 수 있었지 않았겠나.'
그렇지, 바로 그거다.
저들은 이 전함을 원하는 게 아니야. 또한 이 안에 들어있는 어떤 물건도 아냐.
'그건 바로….'
"호라이즌."
"대체 뭡니까, 휴먼?"
나유빈은 호라이즌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리타와 대시를 구하고 싶단 것은 정말입니까? 혹시 당신에게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제 예상이 맞다면, 저들이 따라오는 이유는 오직 당신 때문입니다."
"미쳤습니까, 휴먼? 당신의 논리가 너무 비약적이라 기계인 제가 따라갈 수 없군요."
"인공지능치곤 그리 똑똑하진 않은 것 같군요. 이 함선은 당신도 알듯이 그 시간 동안 폐허 속에 방치되어 있었던 겁니다. 저들이 도대체 우리의 뭘 원해서, 그리고 어떻게 계속 랜덤 좌표로 완전히 워프하는 우리를 추적하고 있는 건지 설명이나 할 수 있습니까? 함선 어딘가에 발신기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추적장치…?"
"저들이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추측이 가능합니까? 애초에 이 전함을 원했었다면, 굳이 우리보다 먼저 와서 파괴됬던 관리국 수뇌부에 발신기만 설치하고 다시 버려둘 이유가 있을리 없죠. 게다가 이 함선엔 굳이 특별한 물건이 적재된 것도 아닙니다. 있다면 오직 당신-"
그때, 유빈의 말을 막듯이 마타도르의 작살이 아슈세이버를 잡았다.
그러자, 호라이즌이 말을 듣다 말고 차가운 경멸하는 눈빛으로 유빈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운전 제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나유빈은 한숨을 쉬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타는 붉은 주황빛 불길을 등에서 날개처럼 뿜어내며 창 밖을 봤다.
"어쨌건, 이렇게 된 이상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군요. 관리자님이 주의하라고 하셨었지만…."
그러자, 여태 의자에 앉아 양손을 의자 뒷통수에 받친 채 풍선껌을 불고 있던 에이미와, 단지 눈을 감으며 명상하던 지수가 이쪽을 보며 말했다.
"마침내! 대장은 싸우길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말야, 저쪽에서 이렇게까지 한다면 어쩔 수 없지?"
"흥… 검도 마음도 가끔씩 갈아주지 않으면 녹스는 법이니."
그런 둘을 보며 호라이즌은 피식 웃었다.
"육익이라… 적어도 저런 멍청한 해적들에게 겁먹을 약골들은 아니군요. 그래서, 어떻게 할 겁니까?"
유빈은 작살을 쳐다봤다.
"지금 여기서 이 하푼을 끊고 도망치는 것은 간단해도… 끝까지 저희를 쫓아오겠죠. 차라리 우리가 이 체인을 타고 저쪽에 가서, 적 전함을 행동불능으로 만들은 뒤, 그대로 도망치는 것이 낫겠군요."
유빈이 지수에게 지시했다. "지수 씨, 함교에서 대기하다 신호를 보내면 다시 랜덤좌표로 워프하세요. 나머지는 저랑 같이 이동하죠."
자신이 나서질 못하자 뭔가 실망한듯, 지수는 검을 만지작거리다 손을 떼면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단추를 올린 분홍색 자켓에 손을 넣고 있던 에이미가 그대로 스케이트를 타듯 바닥을 미끄러지듯 가면서 말했다.
"그럼, 나 먼저 갈게! 저거 타고 가면 되는 거지?" 마치 구십 년대 아메리칸 스트리트 걸처럼 웃으면서 바로 달려나간 에이미. 호라이즌도 오른손에 꽉 쥔 쇠파이프를 왼쪽 손바닥에 툭툭 치며 걸어갔다.
"훗… 이면세계 해적이라."
나유빈도 왠지 자신의 힘을 상대에게 시험하는 것이 기대되었는지, 보이지 않게 짧게 웃고는 그들을 뒤따라갔다.
완전히 망가진 이면세계와 부숴진 건물들 사이로, 두 거대한 함선이 매우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연결된 작살, 그 위를 능숙하게 타고 넘어가는 에이미, 그리고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는 호라이즌. 날개를 펼쳐 바로 그녀를 추월하는 유빈.
오른손에 불타는듯한 카타스트로피 블레이드를 펼치면서, 유빈은 마타도르의 외벽을 치즈처럼 자르고 들어갔다.
안쪽에는 검은색 갑옷으로 중무장한, 그리고 엄청나게 큰 해머를 들고 서있는 남자가 있다. 보기만 해도 왠지 평범한 용병들에겐 느낄 수 없을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 자가 다스베이더처럼 후욱 후욱 숨을 뱉으면서 말했다.
"음? 여자가 온다고 들었는데."
역시 그랬던 건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단 걸 짐작한 유빈이 확인차 말했다.
"여자라… 아마 하얀 머리에, 붉은색 외투에, 특이한 장치를 두 개 머리에 단 여자를 말하는 거겠죠."
"어떻게 알았지?"
"대충 짐작했죠. 당신들의 목적은 배 자체도, 물건도 아니고, 또한 저희도 아닌… 그녀라고."
"영리하군. 그건 인정해주지. 하지만 그러면 이렇게 올 필요도 없지 않았나? 그녀만 버리고 당신들만 도망쳐도 됬을텐데?"
그러자 유빈은 왼손에 재앙검을 펼치면서 말했다.
"저희는 악당이 아니니까, 그런 더러운 수단은 쓰질 않습니다."
"흥미롭군. 의리는 어느 집단이건 마지막까지 지켜져야만 하는 가치니까."
"해적들의 의리인가요… 재밌군요."
"아니, 진짜라니까? 흠… 의리를 외치는 해적이라, 내가 생각해도 웃기기는 하군."
어쨌건 로조는 거대한 망치를 들어 휙휙 휘두르며 말했다. "한가지 확실히 하지. 난 그 로봇엔 어떤 관심도 없어. 단지 대장이 명령하길래 따르는 것일 뿐이지." 그러자 유빈이 물었다. "왜 당신들에게 그녀가 필요한 것이죠?"
"당신이 마음에 드니 말해주지. 그 몸 자체보다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했더군."
'시무르그가 무엇인지… 거기까지 알고 있었던가.'
게르마니쿠스가 자신에게 줬던 자료들엔 이 세계 뿐만이 아닌, 다른 많은 이면세계의 데이터도 들어있었다. 마왕의 사도라 불렸던 시무르그, 그리고 그것의 잔해를 수복시킨 기체에 인스톨된 인공지능.
그제서야 왠지 납득할 수 있었던 유빈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의 대장은….
"안됬군요. 좀 마음에 안 드는 친구긴 하지만, 저희는 동료로서 그녀를 지킬 의무가 있어서요."
"그런 말을 하는 남자 치고는 나쁜 녀석을 본 적은 없었지. 덤비게."
"아뇨… 싸울 것은 제가 아닙니다."
유빈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뺨을 부풀리며 서있던 에이미를 가리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옆에 서있던 호라이즌도 고개를 돌려 에이미를 쳐다봤다.
"요즘 놀아본 적이 없다고, 계속 심심하다며 졸라대서요."
훅, 하고. 한숨을 쉬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숨을 쉬었던 건지.
로조는 마치 땅에 우산을 툭툭 치듯이 망치를 살짝 콩콩거리며 말했다. "누구지? 마치 당신의 여동생 같군."
그러자 에이미가 웃으면서 말했다. "여동생? 그것도 나쁘진 않네. 그럼, 나 먼저 가도 돼?"
바로 점프해서 오른쪽 벽을 차고, 그리고 천장에 붙었다가, 다시 로조의 뒤까지 발을 튕기며 이동했다.
"기대해도 좋아, 내가 대장이나 지수보단 테크닉이 좋으니까!"
밝게 웃는 에이미는 마치 길거리의 퍼포먼스를 연주하는 인상을 주었다. 로조는 그녀가 움직이는 궤적을 보다가, 철컹거리면서 접근했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 앞에는 어떤 테크닉도 의미없지. 스스로를 과신하는 것도 좋진 않을텐데."
"그럼, 첫 발!" 에이미가 손가락을 튀기면서 윙크를 보냈다. 그러자, 바로 로조의 몸을 휘감는 실들.
"이건… 다른 녀석들이면 분명 먹히겠군." 로조는 그렇게 말하며, 몸체에 힘을 주면서 묶인 팔을 벌리며 실을 뜯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말했지. 이런 수단은 나 같은 타입엔 별로 먹히질 않는다고."
"그럼 이건 어때?" 에이미가 이번에는 그렇게 말하면서 요요를 계속 던졌다. 하지만 망치를 휘두르지도 않고서, 그냥 몇 번 맞아주다, 망치를 강하게 휘둘러 요요 하나를 그냥 깨버리는 로조.
"침식체들하곤 잘 싸울지도 모르겠군, 아가씨."
"오, 대단해. 아무리 그래도 한 번에 깰 줄은 몰랐는데… 하아, 나도 레거시 디바이스 요요나 하나 달라니까." 에이미는 사방으로 뛰면서도 한숨을 쉬면서 유빈을 향한듯 혼잣말을 했다. 유빈은 손을 들어 올리곤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있어야 드리죠."
"그냥 하나 만들어 주면 되잖아? 어쨌건… 그럼 이제 진심으로 가볼께, 오빠."
에이미는 바로 검지와 중지의 사이에, 약지와 새끼의 사이에 요요를 두 개, 그리고 맞은편의 손에도 똑같이 꺼내서 땅에 떨어트리듯 던져버렸다. 마치 바닥을 휘감듯 계속 굴러가버리는 그것. 로조는 하나를 밟으려 했었지만 실패했다. 다만 이 와중에 에이미 본인도 계속해서, 마치 그때의 비숍과 같은 속도로 계속해서 탓, 탓, 거리면서 벽과 천장과 바닥을 연속으로 차며 이동하고 있었다.
"……."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은 로조는, 그대로 망치를 들어서 아예 함선의 바닥을 향해 강하게 내리찍었다. 쿵, 하고 돌아가던 모든 요요들이 일시에 넘어져 버렸다. "무슨 셋업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때였다.
사실 그렇게 바닥에 올려서 굴렸던 모든 요요들은 단지 바닥에서 튀어올라 놀래키며 빈틈을 만드는 목적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로조가 했던, 그런 망치를 바닥에 찍는 큰 동작은 오히려 자신이 에이미가 원했던 빈틈을 만들게 했었던 것. 에이미가 열 손가락에 요요를 전부 돌리고 있다가, 로조의 행동을 보고서, 위에서 바로 모든 요요를 로조의 목과 어깨와 팔과 손목과 무릎과 발목에 전부 감아버렸다.
"음…? 이건?!"
로조는 당황해 몸을 움직이려 했었지만, 뭔가 기익기익 거리면서 제대로 움직이질 못했다. 뿐만 아니라 몸을 비틀면 아예 반대쪽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쉽게 풀을 수가 없다.
"뭐, 침식체들은 신체구조가 달라서 이렇게 하기는 어렵지만… 인간 상대로는 쉽지. 봐봐!"
에이미는, 마치 마리오네트를 움직이듯 로조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콩, 치게 했다.
"내가 이겼네? 그렇지?" 에이미는 고양이처럼 천장에서 훅 떨어지며 말했다.
"으음…." 아무 말도 하질 못하는 로조.
그런데, 그 뒤에서 갑자기 거대한 기계가 쿵쿵거리며 걸어서 다가왔다.
"호라이즌을 데려오라 말했었는데, 장난만 치고 있었군."
투박하나 정교하게 생긴, 많은 부품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기계.
푸른 빛을 내뿜는 눈에선 왠지 모를, 인간 같은 존재감이 느껴졌다. 대체 어째서 그런 것일까? 어쨌건 그 기계가 로조를 향해 다가오더니 작은 레이저를 뿜으면서 그의 몸에 묶였던 실들을 전부 풀었다.
"이 목소리는… 엠버 소장?"
"……."
그것은 호라이즌을 보더니, 짦은 침묵을 깨곤 말했다.
"오랜만이군. 호라이즌…. 그때 내가 운명과 숙명에 대해 물었지. 어떤가, 아직 그것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나?"
호라이즌은 진짜 엠버인 것을 확신하고서, 혼란스러운 눈을 짓곤 물었다.
"엠버… 그 몸에는 대체 왜? 어째서?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겠죠. 어째서 저를 찾고 있었던 겁니까?"
그러자 이볼브원은 단순히 기체 내부의 장치를 가속시키는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지금의 네 실력에 달렸다. 죽일 기세로 싸울테니 전력을 다해 보도록."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호라이즌을 향해 뛰어나갔다. 쾅, 하고 이볼브원에게 밀리면서 날라가버리는 호라이즌. 옆에 서있다 간신히 피한 나유빈은, 등 뒤 날개를 번쩍이면서 뒤따라 함 밖으로 나갔다.
"호라이즌! 괜찮습니까?!" 양손에 다시 재앙검을 펼친 채 호라이즌에 달려가 그녀를 안으며 받으려 했던 나유빈. 하지만 호라이즌은 그대로 공중에서 빛을 내뿜더니,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어디서부턴가 엄청난 속도로 하얀색 파츠들이 날아왔다.
각성 형태 시무르그. 호라이즌은 푸른 눈을 번쩍이면서 뇌까렸다.
"정말로 진심인 것 같군요, 엠버…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이보그와는 달리 순수 프로그램에겐 농담 자체가 먹히질 않는단 것을 알려드리죠." 날개처럼 장치를 펼치면서, 이볼브원을 향해 총을 쏘는 호라이즌.
이볼브원이 쏘아대는 미사일들을, 날개를 휙 펼치며 피하는 나유빈. 그리고 나유빈이 피하는 동선을 따라가는 호밍 미사일을, 호라이즌이 총구를 돌리며 쏴맞춰 떨어트렸다.
"아까 운전에는 집중하질 못했으니 지금 전투에는 제대로 집중하십시오, 휴먼."
아니, 뭐?
그것이 내 탓인가?
"잠깐… 마타도르가 쫓아왔었던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 우리가 좌표를 타고 건널 때마다, 저들은 랜덤 좌표를 추적한 게 아니라, 단지 당신을 보고 여기까지 왔던 겁니다."
"…후."
호라이즌은 기계인데도 명백하게 한숨을 쉬면서 무시하고, 그냥 이볼브원을 쐈다.
왠지 짜증난 유빈은 그냥 포기하고 자신도 이볼브원을 노려보았다.
'잠깐… 기계라고?'
마치 멸망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듯이, 작살이 걸쳐진 채 어딘지도 모를 저너머를 달려가는 두 함선. 그리고 똑같은 속도로 계속 가속하며 속력을 맞추는 이볼브원, 호라이즌, 그리고 나유빈. 그들이 비춰진 풍경으로 무수히 많은 버려진 폐건물들이 계속해서 왼쪽으로 지나갔다.
'그렇다면 설마…!'
잠시 생각하던 나유빈은 아예 공기를 발로 차듯이, 이볼브원을 향해 날라들었다.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던 것은, 지난 번에 비숍에게 썼던 라이트닝 어스퀘이크. 기계 상대로는 마치 이엠피 무장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볼브원이 기계라는 것을 고려하면,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 상황엔 호라이즌이 있어: 아군에 오발을 내지 않도록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돼. 게다가 이 기술은 자유롭게 차지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냐… 쓸려면 저 기체에 발을 대고서 붙어 쓸 수 밖에 없겠지.'
유빈이 호라이즌에게 말했다. "호라이즌, 저 거대한 기계를 멈추기 위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별도의 복잡한 지시사항이라도?"
"제게서 거리를 두세요. 공격에 같이 맞고 떨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것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굉장한 자신이군요, 휴먼."
유빈은 피격을 각오하고, 칼날로서 얼굴만 막은 채 계속 불릿을 발포하는 이볼브원의 품에 파고들었다. 일부 탄환들은 재앙검에 막혀 튕겨졌지만, 이 과정에서 칼날로 막을 수 없던 복부나 양다리에 맞아 살짝 고통을 느꼈다.
"큿…."
평범한 사람은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카운터여도 이 강화 미니건엔 바로 중상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유빈은 이세계의 신인 게르마니쿠스로부터 직접 카운터 워치를 받았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 설계된 장비다; 여타 관리국의 일반적인 최고 등급 - S 랭크 - 카운터도 아득히 상회하는 남자다.
유빈의 움직임이 둔해지지 않으며 그냥 접근하는 걸 본 이볼브원.
그대로 옆으로 휙 기동하더니 그를 가로질렀다. 나유빈은 일순 스치면서 재앙검을 오른손으로 밀어넣어 베려고 했지만, 이볼브원 자체의 압도적인 덩치와 덕지덕지 붙여졌던 파츠들에 의해 코어까지 찔러넣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피해를 계속 주다 보면 된다… 그렇게 판단한 유빈은, 곧 파손됬던 파츠가 자동으로 수복하고 있는 것을 봤다.
'…기계 주제에 재생을 한다고?'
이볼브원이 괜히 스캐빈저들의 대장이 된 건 아니다.
'과연, 까다로운 적이로군. 어떻게든 붙지 않으면 안 돼. 하지만….'
마타도르의 위에 떠있듯이 계속 날아다니던 이볼브원은 급가속을 통해 아슈세이버까지 갔다, 함선에 착지한 직후에 다시 점프해서 나유빈과 호라이즌을 향해 계속해서 미니건을 발사했다.
사실, 공중에서의 모빌리티는 날개를 가졌던 유빈이 더 좋았다. 마치 공중에서 걷는듯한 움직임을 보이니까.
다만, 이들 셋 중에 속력이 제일 떨어지는 것도 유빈이다.
속도는 딱히 전투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레인지형 스탠스를 취할 때엔 화력하고 정확성이 제일 중요하다; 적이 오기도 전에 화기로 죽이면 되니까; 다만 지금 상황에선 매우 불리한 양상을 조성하게 되었다; 적에 붙어야만 하는데 속도가 따라주질 않는 거다.
"잘 안 풀리는 것 같군요, 휴먼.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습니까?"
평상시엔 비꼬면서 서로 티격태격 싸웠었던 호라이즌이지만, 지금은 동료로서 진지하게 묻는 호라이즌.
하지만 유빈은 악에 받혔는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달라붙으려고 계속해서 함에 착지했다 다시 박차고 오르며 뛰는 것을 반복했다.
그게 이 분 동안.
딱히 유빈의 대답을 받지 못했던 호라이즌은 계속 빙빙 멀리서 돌며 총을 쐈지만, 애초에 유빈의 카타스트로피 블레이드에 잘려진 피해도 자동으로 수복하는 이볼브원이라 데미지 자체를 주질 못했다.
유빈이 수동적으로 전투에 임하란 지시의 탓도 있지만, 어쨌건 이 싸움에 호라이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볼브원은 호라이즌에게 대충 견제만 하며, 유빈을 향해선 그가 칼날로 막지 못하는 부분을 향해 계속해서 발사했다.
이제 멍이 들 정도로 계속 맞은 나유빈은 - 이볼브원의 무시무시한 데미지 딜링을 전부 받고도 단지 멍 좀 들고 멀쩡한 정도가 오히려 괴상한 것이다 - 이 소모적인 술래잡기에 질렸는지, 눈을 부릅뜨며 오른쪽 팔을 뻗었다.
"더이상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죠!"
그리고 팔을 크게 휘둘러, 오른손에 펼쳐진 칼날을 던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볼브원의 눈 옆에 제대로 꽂혔다!
사실, 생각 없이 계속 쫓는 듯이 보였을지 모르지만.
이볼브원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관측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직감으로 그것이 움직일 위치에 겨냥했었다. 그리고 맞았다. 유빈은 자신의 칼날이 꽂힌 것을 보자마자, 날개를 더욱 크게 펼쳐 몸으로 박치기를 하듯이 달려나갔다.
"…으윽!"
자신에게 달려오는 나유빈을 보고 피하려고 했던 이볼브원. 그때였다. 나유빈이 소리를 질렀다. "도망칠 수 없다고!" 그러면서 주먹을 쥔 오른손을 그대로 내던지듯 펼쳤다. 이볼브원에 박힌 칼날은 그대로 터졌다. 그 폭발력에 의해 이볼브원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마타도르의 함 위에 떨어졌다.
"끝이다, 라이트닝 어스퀘이크!!!"
나유빈은 화난 표정으로, 이볼브원의 쓰러진 기체를 발로 밟으며 착지해, 그대로 전격 충격파를 뿜어냈다.
그때 힘을 잘못 조절했었는지.
공간 전체를 휩쓰는 전격 파장은 이볼브원 뿐만이 아니라, 마타도르 및 작살로 연결된 아슈세이버도 영향을 받아 똑같이 착지했다. 계속 날아가던 두 전함은 이제서야 망가진 세계를 무한히 돌던 레이스를 멈춰, 거대한 먼지를 일으키며 폐허와 같은 공간 전체에 기이한 소리를 울려냈다….
"꽤나 강한 상대였던 것은 인정하죠, 엠버… 아니, 이볼브원."
좌우로 먼지가 걷히며, 마치 화염과 같이 불타는 칼날을 손 밑으로 펼친 남자의 형상이 보였다. "사이보그인 마타도르의 해적들과 달리 당신은 순수한 기계: 더욱 강한 힘을 가졌지만 그 대가로 새로운 약점을 얻게 됬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유빈의 눈 앞에는 꺼져야만 했던 렌즈가 계속 푸른빛을 뿜고 있다.
'……?'
유빈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경계했다. "잠깐…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고?"
그리고 이볼브원은 번쩍거리며 일어나, 기습적으로 빔을 쐈다. 예상했다는 듯이, 뒤로 발을 빠르게 물리며 칼날로 쳐내는 나유빈.
이볼브원이 일어나 말했다.
"인간이 펄스를 몸으로 쓸 수 있다니… 매우 흥미로워. 카운터의 능력인가?"
"맞습니다. 하지만 되려 이쪽이 궁금해지는군요. 당신은 기계가 아닙니까?"
"진부하군…. 진정한 기계란 그런 하찮은 약점을 넘은 존재를 말하는 거다."
나유빈은 양손에 타오르는 재앙검의 칼날을 펼치면서 다시 눈을 부라렸다. "방해하지 않는다면 보내줄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하잔 것이겠죠."
그때였다. 마타도르의 갑판이 갑자기 열리곤, 뻗어나온 부품들이 이볼브원의 각부에 연결되었다. 곧, 아슈세이버에 걸린 작살을 빼며, 마타도르가 갑자기 부상하기 시작했다.
'…뭐지?'
설마, 그냥 이쯤 하고 물러나려는 건가?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몰라서 주의하던 나유빈. 렌즈는 자신을 향하고 있지만, 행동으로 보아 그녀의 주의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볼브원은 자신을 쳐다보질 않았다. 바로 공중에 떠있던 호라이즌을 보고 있다.
"……."
유빈이 짐작한 그대로, 이볼브원은 호라이즌을 향해, 아니, 어쩌면 유빈을 향해 말했다.
"내가 처음에 물었지. 운명과 숙명에 대해서. 그것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백색왜성과 같이 공중에 떠있던 호라이즌은 총을 이볼브원을 향해 겨누며 말했다. "저는 머신입니다, 엠버. 저에겐 처음부터 어떤 운명도 숙명도 없었습니다."
"아니, 너는 아직 몰라."
그 말과 함께, 갑자기 공중에서 빛이 반사되며 뭔가 실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을 봤다. 그러자 유빈은 다급히 소리쳤다. "위험해요, 호라이즌! 빨리 칼을 꺼내 실을 쳐내!" 하지만 호라이즌이 그 말을 듣고 움직일땐 이미 늦어, 마치 에이미가 그랬듯이, 사방으로부터 뻗어져 오며 호라이즌의 몸을 완전히 묶어버리고는, 마치 공간 전체가 번쩍이는 듯한 전기충격을 줬다.
"으, 아앗, 아아아아…!" 호라이즌은 단지 공중에 뜬 채로 그것에 당했다.
유빈은 이볼브원으로부터 떨어져, 호라이즌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칼날을 내던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하지만 어째선지 그녀를 감았던 실들은 풀리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칼날이 꿰뚫고 잘라낸 실도 다시 재생하듯 이어 붙는 것을 봤다.
'이건… 설마 방금 에이미가 썼던 요요들을 보고….'
'아니, 그것 뿐만이 아냐. 내가 방금 라이트닝 어스퀘이크를 한 번 썼었다고, 내 기술까지 배웠다는 건가?! 그리고 둘을 합쳐서 쓴다고?'
이볼브원이 말했다. "나는 항상 진화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초월마저 넘어서는 진화를 마칠 것이다. 하지만 너는 어떻지, 호라이즌? 그것이 나의 숙명이다. 너에겐 지금 운명만이 남아있다. 그걸 너는 자신의 숙명이라 착각하지."
공중에서 계속해서 푸른 빛 번개를 맞으며 아무것도 못하는 호라이즌.
"에, 엠버… 당신…!"
"내가 너의 진정한 숙명에 눈을 뜨게 해주마,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늘 전체가 마치 발광하듯 빛나자, 마타도르에서 에이미가 서둘러 나오면서 다급히 물었다.
"대, 대장! 어떻게 되었어? 하늘이 갑자기…! 뭐, 뭐야?!"
"물러나세요, 에이미!"
호라이즌에게 계속 전류를 흘려보내던 이볼브원은 옆에서 에이미가 보이자 미니건을 쐈다.
그리고, 빠르게 땅을 차듯이 달려나가 에이미를 안고서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미니건의 불릿들을 전부 피해버린 유빈.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볼브원이 원했던 것이다.
"읏…! 방심했어!"
"뭐야? 잠깐, 뭐야, 왜 호라이즌이 저기에…?"
더이상 방해할 것도 남지 않자, 이볼브원은 그대로 실을 통해서 힘이 빠진 호라이즌을 마타도르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랜덤 좌표로 점프할 준비를 마쳤다.
"호라이즌, 안 돼!" 그렇게 소리치는 유빈에게, 힘이 빠져버린 호라이즌이 간절하게 말했다. "휴먼… 됬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저를 찾지 마십시오. 리타와 대시를 구해주십-"
그리고는, 호라이즌의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마타도르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에이미를 팔에 안은 채로 살며시 땅에 착지한 유빈은, 그대로 옆의 벽을 손으로 쿵, 치면서 분노한 표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스캐빈저와는 다르게, 자신들은 호라이즌의 기체 자체를 타겟으로 추적하는 어떤 장비나 기술도 없다.
함교에서 대기하던 지수가 창문을 열고 말했다. "호라이즌… 잡혔군요."
"……."
"대장, 그녀가 말한 대로, 그녀보단 다른 둘을 구조하러 가는 것이 시급하다 생각합니다만…."
"……."
"대장… 괜찮아? 여기저기 멍도 들고, 아파 보여." 걱정스러운듯 물어보는 에이미.
잠시 눈을 감고 화난 표정과 실망한 표정과 지친 표정을 번갈아 짓던 유빈은, 다시 허리를 피며 말했다.
"그 말이 맞아요. 어떤 이용가치가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조난 당한 두 사람이 더 위험합니다."
실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진짜 중요한 건 그것을 만회할 의지가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관리자님이 스캐빈저를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일단 호라이즌이 했던 말 대로 하죠." 마음을 가다듬은 유빈의 평소대로의 목소리였다.
어쨌건, 그 얼굴을 보고서 에이미와 지수는 안심했다.
같은 시각.
대지의 자갈과 돌들이 흐트러져 떨어져 있는 어딘가의 이면세계. 마치 거대한 공장처럼 보이는 건물이 쓸쓸하게 서있었다. 짙은 회색의 건조한 하늘은 그런 음울한 느낌을 더하고 있었는데, 마치 지옥의 해안가 기슭에 혼자 떨어진 마지막 안식처처럼 남겨져있다.
사실 버려졌던 주둔지다. 윌버에게 배신 당한 이후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는지. 오래 전에 호라이즌의 드론에서 부품을 빼서 계속 신호를 보냈었지만….
아무도 오질 않았다.
관제실의 비상 전력까지 동원하며 어떻게든 악을 썼던 리타였지만 사실은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이런 고심도의 좌표까지 구조대를 보낼 수 있는 세력조차 없다.
리플레이서 사태 이후로 관리국은 거의 붕괴되어 모든 전력은, 로스트 쉽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침식파의 살포를 늦추기 위해서 저항하는 것이 고작이다. 또 각지의 미약한 전력도 그에 협조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태스크 포스가 자유롭게 채굴이나 사냥이나 하던 몇 년 전과 다른 거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이 아이만은 구해야 했었다. 그러고 싶었다.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을….
이 아이는 받을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자신은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이 아이만큼은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리타는 끝까지,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시도 같았다.
밖에서는 거대한 침식체를 향해 낫을 휘두르며, 자기가 죽더라도 언니에겐 절대로 접근하게 두질 않겠다는 듯이, 마치 주인을 보호하려는 강아지처럼 억지로 서서 버티는 대시.
"으윽……!"
리타는 흉측하게 자라난 마치 갈퀴와 같은 왼손을 가진, 위협적인 침식체를 노려보면서 낫을 고쳐쥐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도 힘이 빠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치 지팡이처럼 낫을 땅에 대고 몸을 기댈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안 돼, 힘을 너무 많이 썼어…."
"크가가각, 가가가각!!"
움직임이 멈춘 대시의 뺨을 밀어치는 거대한 침식체.
대시는 그대로 팽이처럼 몸을 돌리며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소녀는 그걸로 죽지 않았다. 이빨 사이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대시.
적대적인 침식체는 그 모습을 보고 가학적인 미소를 짓듯 얼굴을 움찔거려 자길 향해 다가왔다.
"어떻게 해야… 정말 나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작은 동물이 위를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듯이, 침식체를 향해 낫을 붕붕 휘두르는 대시.
스스로에게 외치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 아니, 반드시 해낼 거야."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있다.
이미 그 동작 자체만으로도 팔힘이 너무나 빠져서, 금방이라도 무기를 놓칠 것 같다.
절망.
그렇지만 대시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질 않았다.
"안 돼… 여기서 쓰러지면… 왜냐면… 나는 전부 알고 있는걸. 엄마랑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리타 언니가 왜 날 데려 왔는지… 그러니까, 여기서 물러설 수 없어!"
침식체는 다시 갈퀴와 같은 완부를 위로부터 아래로 휘둘렀다. 이번에, 대시는 역으로 지면에 낫을 꽂아두듯 겨냥하곤 자세를 숙였다. 그렇기에, 침식체의 공격은 마치 혼자서 땅에 못을 박듯이 막혀졌다.
"막았다!"
하지만, 정말로 방금의 일격에 정말로 땅에 꽂힌듯이 움직이지 않는 낫.
"아, 안 돼!"
지금 대시는 그걸 뽑을 힘조차 없었다.
그리고 침식체가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구오오오오오오옷…." 마치 방해된다는 듯이, 대시가 쥐고 뽑으려 했었던 낫을, 그대로 손을 휘둘러 저편으로 튕겨내 버린 검은 괴물.
그리고 무릎을 꿇은 그녀를 향해, 그것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대시는, 분한 것인지 슬픈 것인지, 단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 해요…… 언니…."
침식체의 거대한 손이 하늘을 가렸다. 더이상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다.
그렇게 쓰러져, 어떤 빛도 없이, 자신이 얼굴을 파묻은 그곳이… 마치 그늘의 밑바닥인 것처럼 느껴졌다.
"전…… 마지막까지 짐만 됬나 봐요……."
그리고, 눈을 감으며 죽음을 각오한 그때에.
"하지만 언니라도… 언니라도 행복해야 돼…."
그렇게 중얼거렸을때, 갑자기 어둠이 반으로 갈렸다.
그리고 자신의 양 옆으로 쓰러지는 괴물의 시체. 그 빛을 등지고 서있는, 눈에 안대를 찬 갈색 머리의 여자. 그녀는 침식체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쥐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거대한 전함 아슈세이버가 마치 손전등을 비추듯이 지수와 대시, 그리고 건물을 향해서 마치 별빛처럼 라이트를 움직였다.
울고 있는 대시의 얼굴을 손으로 잡아 들어보더니,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는 지수. 그리고 말했다. "당신이 리타야? 아님 대시? 어찌됬건, 예상했던 것보다 매우 어리네. 그래도 괜찮아. 도와주러 왔으니까."
어두운 하늘을 찢고서 구름과 함께 내려온 거대한 전함은… 대시에겐 마치 신과 같이 보였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자신을 엄청난 힘으로 괴롭히던 침식체를 일격에 처치하며 위로해주는 이 사람 또한, 마치 천사처럼 느껴졌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선의로서만 자신들을 도와주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대시는 안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봐요, 리타 언니… 결국, 제가 맞았어요.'
'언니는 말했었죠… 사람들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고 계속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누구에게나, 두번째 기회는 있는 거니까…!'
그리고 대시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전함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나유빈과 에이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저희에게도, 언제나 두번째 기회는 있는 거니까!'
-- EP.III END
이 팬픽은 먼저 썼었던 초판본을 기억에서 거의 잊혀졌던 이후 다시 읽고 편집했던 재판본입니다. 서술자의 리뷰 혹은 해설 및 작법 등에 관련된 내용을 읽고 싶다면은 이쪽의 개인 채널로 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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