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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 만약 관리자가 그때 떠나기로 결정했었다면

(https://arca.live/b/counterside/55899420)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I: 공익 등장

(https://arca.live/b/counterside/55915019)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II: 스포)리타와 대시는 육익한테 구출받음

(https://arca.live/b/counterside/55929667)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V: 용과 뱀의 윤무곡

(https://arca.live/b/counterside/55949571)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V: 리뎀션 오브 더 킹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Part VIII Part IX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VI: 뉴건담 카린과 겟타팀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VII: 경력사원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VIII: 악마성 로자리아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X: 어둠 속의 왈츠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Part VIII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X: 테라사이드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VI Part V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XI: 눈을 뜬 마왕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XII: 리턴 오브 더 킹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 카운터:사이드 IF - 에피소드 IV: 용과 뱀의 윤무곡 --




 "그래서, 지금 그렇게 됬다는 거야? 결국 운 좋게 구조대가 와줬다고?"


 누워있다가 방금 일어난 리타는 멍한 눈으로 대시와 저편의 유빈들을 보면서 자신의 손으로 몸을 주물렀다.


 오메르타를 꺼내 칼로 변신시켜보고, 창으로 변신시켜보고, 활로 변신시켜보고. 고개를 양 옆으로 돌리면서 몸을 풀며 대시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요, 리타 언니! 저분들, 육익이라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며 그렇게 강력한 침식체를 일격에 죽인 거 있죠? 엄청! 멋있는 거 있죠?!" 이터니움을 주사 받았던 대시는 이제 활력을 완전히 되찾은듯 깡총깡총 뛰었다.


 왠지 부끄러운듯, 리타는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 대시를 손으로 밀면서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흥분하지마. 정말…."


 "아구구…."


 대시는 뭔가 아쉬운 듯이 강아지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곤 킥킥 웃으며 다가오는 에이미.


 "이터니움 주사를 놨는데 몸은 좀 어때? 네가 리타라고 했었던가?"


 리타는 그녀를 보고서, 말투와는 달리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구해준 건 고맙지만, 내가 댁한테 반말을 들을 정도로 어리진 않은 것 같은데."


 "와, 그래보여?"


 에이미는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좋네, 동안이라고 말해준 거 아니야. 그럼 언니라 불러도 돼?"

 "…편할대로 불러도 상관없어. 그냥 해본 소리야."


 후, 하고 한숨을 쉬면서 등을 벽에 기대는 리타. 유빈도 다가와서 그녀에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리타. 다행히 늦지 않게 찾아올 수 있었군요."


 리타는 유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관리국의 직원인가? 아냐. 프라이베잇 컴퍼니의 직원인가? 도대체…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지?'


 "이딴 저주받을 곳에 내려와 우릴 구해주다니, 당신도 참 한가한 사람 같군."


 "……."


 "…고마워. 그것만큼은 정말 말하고 싶어."


 고맙단 말을 하는 게 왠지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리타였다.


 온갖가지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군상을 보면서, 남에게 기대는 것이 약점을 보인단 행위라고 굳게 믿고 있던 그녀에겐 오직 자신의 고집하고 독선만이 친구였다.


 그 지옥에선, 순수하게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도구로서 사용해 남을 속이려는 그런 가증스러운 무리가 혐오스러웠다.


 그러니까….


 마음 한 구석, 이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것이다.

 이게 마치 달콤한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빈이 물었다. "몸은 이제 괜찮나요? 혼자 걸으실 수 없다면…."


 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쓰지마, 괜찮으니까." 하지만 현기증이 느껴져, 일어나려는 순간에 비틀거렸다. 리타를 계속 보고 있었던 대시가 짙푸른 머리카락을 흔들리며 달려와 그대로 부축했다.


 "뭐 하는 거야, 꼬맹아."


 "부끄러워 하실 필요는 없어요, 가끔은 절 의지해도 좋으니까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너도 지쳤을텐데….'


 뭔가 불편한 표정으로 대시를 쳐다봤지만, 리타는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지수가 유빈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대장, 코핀의 사장에게 보고를 마쳤습니다. 마타도르를 추적할 방법이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건 희소식이군요. 서둘러서 돌아가죠."


 이젠 마치 밤과 같이, 여러가지 별빛들이 오색으로 펼쳐지는 하늘. 이곳 이면세계 또한, 원래는 그런 평범하고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을까. 여기 들어올 때 느꼈던 그런 절망이나 불안들은 모두 어느새 잊혀져, 리타와 대시는 유빈들과 같이 절뚝거리며 이제까지 전혀 본 적 없던 아슈세이버함에 승선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운명의 머리부분이라 할 수 있을지도.


 창 밖으로 자신들이 신세진 주둔지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대시는 뭔가 슬픈듯한 눈을 지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리타가 물었다.


 "꼬맹이, 뭘 그런 눈으로 밖을 쳐다봐. 뭐 놓고 온 것이라도 있어?"


 "아뇨… 저 건물, 이젠 완전히 잊혀지는 거잖아요, 왠지 쓸쓸하겠다 싶어서…."


 "자꾸 이상한 소리 하기는…."


 리타는 몸을 기울여, 콩하고 대시의 머리를 살짝 쳤다.


 "아, 아하하… 역시 이상한 생각을 했던 걸까요? 죄송해요."


 "뭘, 평소대로의 너인 걸. 신경쓰지마."


 "우우… 저, 리타 언니의 눈엔 뭘로 보이는 걸까요…."


 리타는 뭐라고 중얼거리려다 그냥 그만두었다.


 그때, 조리실에서 냉동피자를 몇 판이나 돌렸던 나유빈이 그걸 접시에 담아 들고 오며 큰 상에다 전부 놓았다. 대시가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봤다가 황급히 떼었다.


 "뜨, 뜨거워! 으아, 유빈 오빠는 안 뜨거워요?"

 "저도 일단 카운터니까요. 이 정도는 살짝 따뜻한 정도네요."

 "우와… 저도 카운터인데 저는 엄청 뜨거운데요…."


 리타는 젓가락으로 피자 조각을 잘라 먹으려던 유빈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젓가락을 써서 먹나? 아, 당신… 일본인이었던가?" 


 유빈이 먹으며 말했다. "한국인입니다."


 "동료 분은 일본인 같이 보여서." 리타가 지수를 힐긋 보면서 말했다. 왠지 엄근진한 지수와 눈이 마주쳐, 날카롭게 노려보는 것 같이 보이자 리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실례, 멋진 사무라이 같이 보여서 말이야."


 지수는 우안의 안대를 벗으면서 말했다. "제가요? 일본인? 척 봐도 한국인 같지 않습니까?"


 '……?'


 리타는 의아한듯 쳐다봤다. '눈이 괜찮은 것 같은데… 안대는 뭐하러 쓰는 거지? 설마 왼쪽 눈으로 집중을 하기 위해서라거나?"


 에이미가 리타 대신에 말했다. "아니, 전혀 아닌데…."


 "너한테 물은 거 아냐."

 "굳이 따지면 대만인 같이 보이기도 하고…."


 "너한테 물은 거 아니라니까."

 "아니, 애초에 한국인 같단 건 뭘까? 그냥 한복 입거나 태권도 하는 것 정도?"


 대화하길 좋아하는 에이미는 지수가 조용히 시키려고 해도 산만하게 계속 혼자서 말했다. 근데, 처음에는 그냥 조용히 시키거나 무시하려 했었던 지수였지만, 의외로 그 질문이 묘하게 꽂혔다.


 '…그러게? 대장은 확실히 그런 느낌이 있어. 내가 다른 건 뭘까?'


 그렇게 골똘히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는 지수와, 계속 떠벌떠벌 유창하게 한국어로 뭔가 말하는 에이미.


 어쨌건 둘이서 자기들만의 얘기에 빠지자, 리타는 신경 끄고 피자를 한 입 베어서 먹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대시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보던 대시도 손으로 잡고선 후후 불어 먹기 시작했다.


 '…….'


 리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맛있진 않네….'


 그래도, 따뜻한 온기 자체는 맘에 들었다.


 그리고 먹으면 먹을 수록 느껴지는 포만감도….


 그녀는, 평소의 시니컬한 태도에 의해 속으로 불평은 했어도, 정작 자신의 표정은 왠지 웃고 있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였다. 계속 꾸역꾸역 입에 밀어넣는 대시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맛있게 느껴졌던 것일까?


 '…맞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대체…?


 처음에는 조사대가 아닐가 했었지만 복장도 장비도 일반적인 태스크 포스의 사원들과 달리 너무나도 캐쥬얼한 복장하고 태도였다. 카운터인 것은 당연히 알지만, 그렇게 외딴 지역에 이들 셋만 이런 강력한 전함을 끌고 나타나는 것은 대체 뭐였던가?


 아니….


 애초에 리타도 알고 있었다. 말은 고심도라 불렀지만, 사실 시간이 흐르는 속도 자체가 다른 허수차원이랑 같은 세계였다. 처음부터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고 움직였단 느낌이다.


 리타는 먹다 말고 손을 놓으며 물어보았다. "유빈 씨에게 하나 묻고 싶은데…."


 "뭔가요?"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그 구조신호가 멀리 퍼졌을리가 없고, 마치…."


 자신도 짐작하질 못해서 말을 흐리던 리타. 유빈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리타 아르세니코. 호라이즌 파이낸스 소속. 몇 달 전에, 윌버 웨이틀리라는 남자하고 다른 용병들과 함께 특정 이면세계까지 갔죠."


 뭐…?


"잠깐. 나는 윌버라는 쓰레기와 같이 가줬던 건 맞지만…." 리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날카롭게 뜨며 말했다. 그게 몇 달 전이라고? 우린 떨어진지 몇 일 되지도 않았어."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먹고 있던 대시도 갑자기 머리를 치켜들면서 말했다. "맞아요! 그렇게 시간이 빨리 지날리 없는데?"


 유빈은 평범한 어투로 말했다. "애초에 시간의 속도는 빛의 속도하고 관계있습니다."


 "…뭐?"

 "이면세계들은 평행세계이죠. 모든 세계들이 전부 같은 물리적인 법칙을 가질리가 없으니까요."


 리타도 대시도 딱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질 못했다.


 유빈은 잠시 창 밖을 힐긋 보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어쨌던간, 몇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

 "제가 말하는 것보다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어느새 자신들이 있었던 지구까지 도착해, 상공에 떠있는 전함. 리타는 밖을 보았다. 그곳에는….


 "저기 이탈리아, 그리고 저쪽엔 터키가… 저게 뭐지? 이스탄불에 이상한 전함이 박혀있잖아… 게다가 무슨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고 있어. 게다가 그런 게 한 둘이 아냐. 뭐야, 저것들은?"


 유빈은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리플레이서, 테라사이드, 인공침식파… 이 세계는 지금 종말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지옥에서 벗어난 당신들이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게 새로운 지옥이라니, 안타깝지만 현실입니다.



 .

 .

 .



 검은 하늘의 위에 떠있는 리플레이서의 사령함.


 과거 도미닉이란 이름을 가졌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이제 갑옷을 입곤, 마치 중세의 기사나 마왕과 같은 폼으로 밑을 내려보는 그의 옆으로 퀸이 또각또각 걸어왔다.


 "부사령관님."

 "…자넨가."


 제이나도 도미닉이 내려보는 밖을 같이 쳐다봤다.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 짐작했던 것일까.


 계속 침묵하던 킹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제 한 달… 아니, 그보다 더 지났나."


 "곧 있으면 우리의 세상이 오겠군요." 퀸은 묘하게 흥분된 소릴 내었다. "세 달 내에, 인공침식파에 의해서 전 인류는 리플레이서와 같은 반인반침식체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킹은 정정했다. "우리의 세상이 아니지, 새로운 인류의 세상이다."


 "아… 죄송합니다."

 "……."


 킹이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프티 바이오테크의 윌버는?"


 제이나는 빠르게 손을 튕기며 문 너머를 향해 명령했다.


 "하! 지금 여기에. 어이, 데려와라!"


 그러자, 전선의 빛이 라인을 타고 감도는 문이 양 옆으로 열리며, 비숍이 겁에 질린 윌버의 목덜미를 잡은 채로 데려왔다.


 "이, 이거 놔라…! 오해다, 분명히…!"


 계속 발버둥치는 윌버. 건방진 태도를 버리질 못하고 계속 날뛰었지만, 킹을 보자마자 매우 놀란듯한 표정을 지으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다, 당신은…!"

 "딘 코너… 아니, 윌버 웨이틀리."


 그를 내려보는 하늘빛 눈동자가 번쩍 빛났었다.


 "…엘리시움."

 "그, 그게…."


 "학회는 마왕의 수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신인류의 적이 될 수 밖에 없겠지."

 "자, 잠깐! 나는 몰랐다고! 내가 어떤 위험한 친구의 도움을 받건, 얼마나 위험한 실험을 했었건, 당신들은 전혀 신경쓰질 않았잖아! 불공평하다고! 비합리적이야! 당신들도 마왕들과 거래한 적이 있잖아!"


 그러자 킹이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내가 모를 것 같나? 너는 처음부터 우릴 감시하기 위해 그쪽에서 보내졌던 첩자였다. 단지 학회의 *학자*가 무슨 취미를 가졌나 보려고 여태까지 놔둔 것이었지."

 "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그렇자 윌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치 떼를 쓰듯이 말했다.


 "사,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그, 그렇지! 이제 관계를 끊을게! 제발! 뭐든 할게!"

 "…뭐든 한다고 했나?"

 "그, 그래! 진짜, 뭐든 할 게!"


 그러자 킹은 뒤돌아서더니, 그대로 발을 옮기며 말했다.


 "제프티 바이오테크에서 재밌는 실험을 하더군. 창의력은 인정하지. 그를 리플레이서 폰으로 개조하도록."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퀸이 경례를 하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윌버는 단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 뭔지도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로, 단지 비숍에게 다시 끌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홀로 천천히 걷는 킹의 옆에서,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어떤 여자가 말을 걸었다.


 "…진짜 한심하군."


 애초에 영혼이 비어있는 듯이 단지 공허함만이 들어차있는, 마치 차가운 시체와 같은 목소리. 남자는 등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너는 정말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 같군."

 "그것이 나의 존재다… 그리고 그렇게 되겠지."


 "대적자."

 "가은이라고 불러도 되는데."


 그리고 등을 돌려서 마치 별이 얼어붙은 듯한 그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가은을 향해 말했다.


 "우리 세계의 마왕을 없애기 위해 너와 손을 잡았다. 그건 알고 있겠지?"

 "그렇지 않으면 굳이 날 옆에 두려고 하지도 않았었겠지… 넌 지금도 날 매우 기분 나빠하고 있으니까."


 생각이 읽힌 킹은 잠시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말했다.


 "감정은 하찮다. 애초 군인은 모두가 그렇듯 성과로 대접을 받는 것이니까, 우리와 협력하는 아군을 굳이 적대할 필요는 없지."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내가 한 번 맞춰볼까?"


 여자와 남자는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고, 딱히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언제 배신할지 재는 이런 상황… 다른 인간들과 다를 것도 없어. 그리고 나쁘지 않아. 재밌으니까." 가은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허공에서 바로 사라져버렸다.


 "……."


 킹은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았다.


 분명, 싸우면 질 것 같은 상대는 아니나, 그렇다고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상대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왠지 모를 이질감을 스스로의 감정을 통해서 느꼈었다. 지금 자신은 왜 저 여자에 대해 이렇게나 강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그녀는 딱히 어떤 잘못된 행동도 하질 않았다.


 …어쩌면 이것조차 그녀의 어떤 카운터로서의 영향력이던가?


 킹은, 대적자를 볼 때마다 불길한 느낌만 받았지만, 어쨌던간 그녀가 필요할 상황이 곧 올 것이라 짐작했다. 그렇기에 지금은 무시했다. 다른 해야할 것도 많기에.


 같은 시각….


 아침. 코핀과 알비온 및 아슈세이버 세 전함이 착륙한 비행장에 모두가 모였다.

 새벽에 스캐빈저를 추적할 수단과 방법을 의논했던 유빈과, 눈을 비비고 있는 대시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는 리타. 별다른 무장은 하지 않은 채 미군처럼 선글라스를 끼고 서있는 에디들, 그리고 평소에 비해서 왠지 긴장한 진지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도로시와 허수아, 리온.

 모건하고 라이언이 알비온을 점검하는 동안 로이하고 대화하는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옆에서 쟁반을 들고 서있는 릴리. 무언가 차갑고 근심하는 표정으로 모두와 떨어져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레지나와, 누군가와 통화하는 리코리스. 린은 팔짱을 끼곤 서로 대화하는 아키와 루시드를 쳐다보고 있다. 지수는 한솔이 가진 검이 대체 뭐냐고 묻고, 에이미는 지루한지 한 곳에서 졸고 있다.


 그리고.


 철컹거리면서 관리자의 타이탄이 지아하고 같이 걸어왔다.


 "늦었잖아, 사장님!" 도로시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가 코핀의 기계 사장이 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보니, 지아가 옆에서 관리국 타이탄에 마치 팔짱을 끼듯 완부에 팔을 겹치며 나긋나긋 걸어오고 있었다.


 "…지아 회장, 그만 놓게."

 왠지 곤란한듯 들려오는 관리자의 변조된 목소리.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은데…."

 "기체가 기동하기 불편해."


 "음~" 지아는 고민하듯 검지 손가락을 뺨에 대다가, 달콤한 소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등에 태워주실래요?"


 "뭐?"


 …모르겠다.


 영국에서 돌아오자마자 회장은 이런 태도를 보였다. 옆에 계속 따라오거나, 차가운 검은 기계에 뭐가 좋다고 계속 들러붙거나, 혹시나 비싼 오일은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어보거나.


 스크린 너머로 자신을 기대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지아. 관리자는 그냥 그에 응해줬다.


 "…괜찮겠지. 상관없다."


 그리곤 포신을 내려놓고, 지아가 위에 앉더니, 검은색 타이탄이 몸을 일으키며 그대로 미끄러지듯 지아를 두부 위에 태웠다.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녀는 마치 빗자루 위에 탄 마녀처럼 빙긋거리며 즐거운듯 웃었다.


 "후후… 재밌어라. 상냥하시네요."

 "……."


 관리자는 피식 웃었다.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어쨌건 지아를 태우고 온 타이탄. 특이한 눈으로 쳐다보자 관리자가 말하였다. "회장이 다리가 아프다고 하더군. 신경쓰지 말고 듣게."


 도로시가 말했다. "아… 그래서 아까 전부터 부축해줬던 거구나.


 "……."


 그렇게 보였나?


 어쨌던간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지아 회장의 정보원인 제인 도우가 레버넌트와 접촉해 도망친 마담 헤론과 위저드의 베이스를 드디어 찾았다고 전달했다; 또한 그것만이 아닌 일본에 치명적인 침식현상이 일어났기에 나나하라 가문이 협력을 요청했다.


 어느 쪽이건 빨리 끝내야만 했다. 리플레이서가 지구에 박아뒀던 로스트 쉽과 인공침식파. 시간이 얼마 없었고, 관리자가 떠난 직후 방관하며 움직이던 마왕들도 군을 일으키는 정세가 보였다.


 그들과 전면전을 치루는 때가 머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각지에서 저런 적대적인 세력들이 게릴라 작전을 펼치며 날뛴다면 꽤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둘을 동시에 처리한다는 속전을 성공시켜야 하는 거다.


 타이탄이 엘리자베스에게 요청했다. "펜드래건 양, 부탁을 해도 되겠나?"


 "무엇을요?"

 "위저드에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많은 적이 있단 정보를 입수했네. 릴리와 리코리스를 그쪽에 보낼 수는 없겠나?"


 이 대화가 나오는 이유는, 형식상 릴리와 리코리스 둘 다 엘리자베스와 계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릴리는 표정의 변화가 없이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리코리스가 그 말을 듣곤 관리자와 리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엘리자베스는 곤란한 목소릴 내었다. "나나하라의 당주는 과거 전설의 성수였었던, 타락한 고대종 오로치하고 싸워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저희쪽 전력이 감소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은 일인데요…."


 에델 사건의 직후, 코핀 컴퍼니와 함께 협조할 것을 결정한 프리드웬. 관리국이 유명무실해져 최소한의 기능만을 하는 지금, 나나하라 치나츠는 오로치가 봉인에서 풀려나는 것을 보고, 급히 접선했던 것이었다.


 '…성수라고.'


 리플레이서와의 전투에선, 한솔이 가진 퀴에투스 같은 오버킬 수준의 화력이 필요하진 않을 거다.


 게다가 아직 검의 힘에 익숙치 않은 그가 동료들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 실내전을 하는 것도 난해할지도 몰라.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선….


 "한솔 군과 아키 양을 대신 그쪽으로 보내겠네."

 "한솔 경을…?"


 한솔의 검이 지금도 초록빛 화염에 일렁거리는 것을 보던 엘리자베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는지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군요. 버넷 경과 한솔 경이 함께하면 아마도 이길 수 있을 거예요."


 리사의 옆에서 존재감 없이 서있던 아키는 당혹스러워했다. '…에? 일본에 가는 건가요?'


 성수라니, 무서운데.


 도대체 어느 정도의 괴물일지 이젠 상상도 가질 않았다. 아니, 자신의 상상 자체도 무서워서 싫었다. 적어도 위저드는 무엇을 하는 적들인지 알 수 있었지만, 뭔지도 모르는 것과 싸우러 가라니 꼭 죽으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랬지만, 한편으론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왠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던 아키.


 타이탄이 말했다. "유사시를 대비하여 본부에도 인원이 남지 않으면 안 돼. 회장과 나는 여기서 대기하겠네."


 지아는 뭐가 좋은지 포근히 웃으며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모니터 실에서 잠시 자기가 쓴 종이를 읽던 관리자가 말했다. "그러면 각 작전에 배속된 전투원의 명단을 최종적으로 다시 정리하지."


 (0)본부: 지아, 린, 사장, 에디, 찰리, 제시카, 지수.

 (1)위저드의 기지: 도로시, 허수아, 리온, 루시드, 레지나, 릴리, 리코리스, 대시.

 (2)일본: 한솔, 아키, 엘리자베스, 라이언, 모건, 로이, 에이미.


 그렇게, 다들 코핀과 알비온에 승선해, 두 함은 다른 방향을 향해 출항했다.


 그리고 명단에 없던 두 사람: 유빈; 리타.


 둘은 따로 호라이즌을 구출하기 위해 아슈세이버에 타고 이면세계로 바로 워프했다.


 몇십 분 뒤….


 애초 한국에서 바로 옆인 일본으로 가는 것에다가, 과거 구시대의 배도 아닌 비행전함을 타고 가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도착지는 나나하라 신사.


 무수히 많은 기묘한 돌뱀이 휘감은 토리의 뒤 마당엔, 이면세계의 거대한 공간균열이 있었다.


 "…저건? 벌써 누군가 싸우고 있어." 한솔이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는데, 아키는 둘을 바로 알아봐 외쳤다. "미나토 씨, 마사키 씨? 게다가 분명… 옆에 있는 분은 치후유 씨일 거예요!"


 어둠의 저편에서 계속해 쏟아져 나오는 침식체들을 막기 위한 저항.


 엘리자베스가 그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역시… 당주가 말했던 것은 사실이었군요.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지체했다면 여기가 침식체들에게 떨어졌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빛의 날개를 펼치며 말했다. "한솔 경, 저와 같이 도우러 가죠! 나머지는 버넷 경의 지시에 따라주세요!"


 총을 장전하는 모건, 그리고 장갑을 다시 끼는 라이언. 그리고 방패를 들며 사슬을 붕붕 돌리는 로이. 그들을 뒤로 하고, 한솔은 마치 전투기처럼 튀어 날으는 엘리자베스의 뒤를 그대로 쫓았다.


 쥐었던 검에선 마치 지옥의 불길과 같은 초록색 오라가 무지막지한 기세로 내뿜어졌다.


 멸망을 불러오는 듯한 대재앙의 근원과 같은, 그런 관념의 화신.


 그것이 바로 지금 자신이 든 검이다. 애초에 자기 자신은 왜 불태우진 않는지 이해조차 하지 못할, 그런 과격하고 극단적인 매우 엄청난 증오를 느끼며,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현 시대의 인류가 가진 거의 모든 무기가 통하질 않는, 그 마왕을 죽였던 검….'


 …만약에 전설이 사실이라면.


 적이 누구라도, 뭐든 죽일 수 있을 거다.


 '나만 제대로 잘 싸우면,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 부담감만 아닌 중압감도 청년의 어깨에 짊어지게 하였다.


 알비온이 오기 전까지의 상황은 매우 불리하였다.

 마치 전국시대의 검귀를 연상시키는 발돋움과 움직임을 통해 검은 오니들을 여럿 베어냈던 치후유였지만, 계속해서 몰아치는 저승의 군세에 한 명의 무사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꽃과 같은 모습.


 "풍림화산… 그리고, 일격으로…!" 마치 춤을 추듯이 좌우로 칼날을 들어 베며, 못이 박힌 방망이를 가진 오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공간을 재던 치후유.


 그리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앞을 볼 때에, 미나토의 화살이 왼쪽의 오니를 맞췄었고, 뒤따라 자신의 오른쪽으로, 마사키의 대지를 달리는 보라색 불꽃이 다른 오니에 부딪쳤다.


 하지만 그런 전열을 유지하기 힘들게 됬는지, 미나토가 다급히 외쳤다. "치후유, 도저히 우리만으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줄을 당기는 도중 오니가 다가와 몽둥이를 간신히 피하는 미나토, 그리고 그 뒤에서 달려나와 원호하는 마사키.


 "흥, 침식체 주제에 말이야… 오랴앗!"


 심장에 우겨넣는 불길은 그대로 침식체의 명을 끝내었다.


 치후유는 뒤돌지 않고서, 다른 오니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됬습니다, 미나토 공. 언니에게 최대한 빠르게 지원을 보내달라고 전달해주길."


 "하지만 여기서 치후유를 버리고 혼자만 도망칠 수 없잖아!"

 "적들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도 무사의 수치. 게다가 마을에 피해를 입힐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떠날 수 없는 거 알잖아?! 그러니… 어?"


 갑자기, 위에서 푸른빛의 단검들이 비처럼 날카롭게 떨어졌다.


 방금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오니도 갑자기 뒷통수를 꿰뚫리며 죽었고, 치후유의 주위로 모여들던 적들도 신성력에 꿰뚫리며 전부 쓰러졌다.


 "이건 설마…?"


 하늘에서 용과 같은 날개를 펼쳐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양인 여성.


 치후유는 칼을 검집에 넣으며, 당당히 눈을 치켜뜨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나나하라 가의 차녀, 나나하라 치후유입니다. 귀공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엘리자베스는 땅으로 천천히 내려오더니, 스커트의 양쪽을 잡고 고개를 숙이면서 정중히 인사했다. "펜드래건 가의 가주, 프리드웬의 기관장 엘리자베스 펜드래건입니다." 그리고 말했다. "소문대로 빼어난 검술이군요."


 무언가 말을 하려던 치후유는, 이면세계의 균열로부터 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카타나를 쥐며 경고했다. "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 공, 주의하시길."


 "네? 아직 끝나지 않았다니요?"

 "…옵니다!"


 그리고 어둠의 저편은 다시금 침식체들을 토해내었다.


 아까 전에 그들이 싸웠던 오니 뿐만이 아니다. 상반신은 여자에 하반신은 거미인 요괴들, 여러개의 팔과 눈을 가진 무시무시한 괴물들, 단지 허공에 떠도는 눈알, 손바닥, 그리고 얼굴. 늑대나 새를 비롯해, 꼬리가 여러 개인 여우도 나타났다.


 칠흑의 날카로운 방패를 쥔 로이가 전투원을 최적의 진형으로 배치해 도착했다: 화기를 장비한 건 모건 하나 뿐; 그렇기에 사격 진형을 잡는 게 아닌 근접전을 상정하여 양익은 각각 에이미와 라이언을 주축으로 삼아 앞으로 전진을; 결코 무너져선 안 될 센터에는 로이 자신이 방패를 쥐고 서는 그림이다.


 즉,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 당시에 사용했던 진형이다: 물론 고대전에 이걸 수비적인 목적으로 쓰면 외곽부터 무너지게 되겠지만; 현대 카운터 보병 개개인의 능력의 격차가 존재하는 환경엔 적합했다.


 모건의 옆에 있던 로이가 외쳤다. "이쪽에 오세요!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 앞에 서있던 치후유들 모두 이쪽으로 달려왔다. 잠시 적을 훑어보던 로이가 말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진짜 특이하게 생긴 녀석들 아냐? 여태까지 이런 녀석들은 본 적 없었는데."

 "지팡구의 귀신이군. 겁 먹었나?"

 "그럴리가, 난 길거리 애송이 때도 겁이 없었어."

 "훗… 사실이지."


 살짝 지친 치후유가 자길 지나치자, 로이가 방패를 땅에 꽝 치곤 외쳤다. "에이미와 페리어는 앞으로! 아키는 에이미를, 새디어스는 페리어를 원호해라! 가!"


 일단 명령을 하는 상황이니 존칭 없이 짧게 부르기는 하나, 자기보다 경력자인 둘에게는 성으로 지시하는 버넷.


 '흐음….'


 로이는 좌익과 우익을 번갈아 보곤, 엘리자베스에 눈길을 돌렸다.


 '나보다도 강해졌어. 리사 녀석, 기관장엔 나 같은 한량이 아닌 너 같은 공주님이 어울린다고 말했는데. 역시 그렇잖아.'


 앞으로 나간 모건이 총을 쏘면서 말했다. "상대가 정말 많군! 여태까지 자네들만으로 이것들을 다 막았나?"


 모건과 라이언의 뒤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마사키가 말했다. "막기는 대체 무슨… 댁들이 안 왔으면 지금쯤 그냥 죽어버렸을 거야. 헤, 고맙다고." 건방진듯 해도 상식적인 태도의 말투다.


 라이언은 호승심이 생기는지, 주먹을 뚜둑 풀었다. "분명 일본의 악마, 오니라고 하는 것이군요. 허허, 언젠가 제 주먹을 시험해 볼 마땅한 상대를 기대했습니다만…." 그리고 달려오는 침식체를 하나씩 눕혀버렸다.


 에이미의 뒤로 가서 안절부절 주위를 둘러보는 미나토. 옆에 아키가 있는 걸 보곤 반가워하며 말했다. "잠깐… 아키?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아…."

 "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일단 내 등 뒤를 맡길께!"


 "…저기…."


 에이미 또한 매우 강력한 기술을 보였다. 손가락에 몇 개나 되는 요요를 감고,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돌리며, 요요 자체가 마치 핵을 도는 전자들과 같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모양.


 날선 요요들은 아예 다가오는 침식체들의 살을 그냥 잘라버렸다.


 "헤에~ 이게 바로 요괴였던 거야? 드라마에서 봤을 때는 무서웠는데." 그리고 여유인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카운터 능력 안 써도 이기겠는데?"


 아키는 혼자 뒤에서 중얼거렸다. "몰랐었어… 에이미 씨도 정말 강하네."


 그리고 점점 더욱 많은 적이 쏟아져, 격렬함이 치솟기 시작하는 전투.


 한솔은 엘리자베스와 동시에 뛰어갔지만, 처리하기 힘들 상급 침식체를 집중 겨냥하는 리사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왜냐면, 이렇게 막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냔 의심이 든 것이다.


 요새 몇 일 사이, 사장인 관리국 타이탄과 함께 싸우면서 식견을 익힌 것이다.


 '…이렇게 싸워서 이길 수 있나? 적들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


 '아니, 잘 생각해봐, 한솔. 애초에 저기 얼마나 많은 적들이 있지?'


 자신도 관리자와 비슷한 눈빛을 지으면서 - 아직 얼굴도 본 적이 없지만 - 저 거대한 균열을 보는 한솔.


 '공세의 흐름을 보면 더욱 많은 적이 나오고 있는데…. 이대로라면 우린 수에 압도될지도 몰라.'


 '진형은 나쁘진 않지만… 음?'


 그때, 자신의 바로 뒤에서 치후유가 다시 달려갔다.


 "무리다! 카운터라고 해도 영원히 싸울 순 없어…!"


 그렇게 보였다.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에 익숙한 여검사. 그렇기에 지금도 나서서 싸우려고 한다. 하지만 그 용맹함 자체가 아킬레스건이 될지도 모른다.


 치후유는 바로 거미 요괴하고 대치하여, 다리를 노리려고 칼날을 휘둘렀지만….


 빗나갔다.


 그리고, 요괴는 입을 통해서 거미줄을 잔뜩 뿌려냈다. 한 번, 두 번, 계속 피하면서 날카로운 일격을 노리지만 잘 되지가 않는다.


 "하아, 하아…. 어째서?"


 적이 강해진 걸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에 아직도 약점이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검의 길을 걸어, 어떤 적이라고 해도 검으로서 상대하여 승부한단 마음으로 매일 같이 연마했던 소녀.


 그런 존재이니 결국 D급 카운터 워치를 받게 됬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무기는 검이지 한낱 시계 따위가 아니다. 요행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몸은, 미약하긴 해도 시계가 주는 향상화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카운터 리얼리티 포스가 미약해져, 스스로의 움직임에 되려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거미 요괴가 자기 눈을 향해서 거미줄을 쏠 때 피하질 못했다.


 "큿… 방심했다."


 아까부터 거미줄을 잔뜩 뿌리더니…!


 사실 치후유가 피할 줄 알면서 난잡하고 허술하게 사방에 발사하던 거미 요괴였다. 땅에 끈적이는 거미줄을 계속 흩뿌려, 치후유가 그걸 밟고 움직임이 막힐 때 노릴 생각이었다.


 위기.


 심장이 본능적인 공포에 의해 뛰었다.


 하지만 이런 긴장감에 매우 강했던 치후유는, 눈을 감으며 자신 주위에 들리는 목소리를 잊으며, 단지 자신을 향한 살기에 집중했다.


 '심안… 마음의 눈으로 적을 느끼면…!'


 적은 이때를 노려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그때 베어내야만 한다.


 기회는 단 한 번.


 하지만 그렇게 집중하고 있을 때에, 이제까지 살면서 느껴본 적이 없었던 과격하고 극단적인 증오가 자신과 괴물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느꼈었다.


 "뭐, 뭐지…? 설마, 오로치…?"


 하지만 그것은 한솔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이질적인 기운은 이내에 거미 요괴에 닿자마자 그것을 폭살시켰다. 다른 사람들에게 칼날과 주먹과 총탄을 맞으며 죽은 다른 침식체들과는 달리, 아예 녹색의 재로 변하며 스스로 폐를 찢는 듯한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거미 요괴.


 마치 악마가 자신의 영혼을 그대로 포기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 이건….'


 설마 이 정도나 되는 줄은….


 한솔은 자신이 휘두르는 검 자체에 더이상 뭘 느끼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경각심? 경외심?


 한솔은 그대로 검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침식체들을 향해서 크게 반달을 그리듯 베었다.


 이내 그것들은 마치 얼굴에 불길이 묻은 사람처럼 앞발을 허우적댔다. 그러더니, 머리는 그냥 몸에서 떨어져 버리며 그 녹색의 재처럼 변했고, 그 몸은 부들부들거려 썩어 들어가곤: 아예 입자마저 소멸되어 남은 게 없게 됬다.


 한솔이 휘두르는 장검을 주시하던 엘리자베스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역시 마왕마저 폭살시킬 수 있는 검…."


 …만약에.


 저 청년이 우리를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기관에서 영입했을 수도 있었는데.


 한솔은 말없이 자신의 칼을 보다가, 이내 갑자기 살기를 느끼고 검을 직감이 향하는 곳으로 휘둘렀다. 바닥이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피어나는 손바닥을 마치 꽃을 꺾듯이 잘라내면서 그대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경로에 있던 침식체 모두, 초록색 불길을 맞곤 그대로 전신이 타들어가며 죽어버렸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아마도 솔리키타티오조차…!'


 일순 그렇게 생각한 한솔은 이내 자신이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자신 안의 무언가도 변하고 있었다.


 삭막하고 냉혈하게 타오르는 초록빛 불길에 휩싸인 검을 들고 있는 한솔을 보면서, 사슬로 침식체들을 쳐내던 로이가 중얼거렸다. "…내가 들었을 땐 아무런 반응 자체가 없었는데." 그리고, 공중형 침식체에게 사슬을 날려 꿰뚫곤 잡아당기며 방패로 쳐냈다.


 "한솔 경이라고… 설마 이 시대에 기사가 둘 나타날 줄이야."


 딱히 자신에겐 기사라는 지위 자체가 큰 의미를 갖진 않지만, 어쨌건 한솔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동질감을 느끼는 로이다. 처음부터 딱히 싫진 않았는데 점점 맘에 드는 것 같다.


 한솔은 다시 침식균열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자신이 뛰어들기 전까진 그렇게나 많아보였는데. 하지만… 대충 칼을 몇 번 휘둘렀는데도, 칼날이 아니라 아예 검이 내뿜는 극에 달한 노기에 의해 침식체들은 죽음에 삼켜졌었다.


 "이… 이건? 설마, 귀공이 했던 겁니까?"


 그제서야 눈에 묻은 거미줄을 닦아 눈을 떴던 치후유가, 주위를 보며 놀라운 목소리로 한솔을 향해 물었다.


 아마 녹색의 재로 변해버린 시체들과, 그가 쥔 검을 보고 바로 유추했던 것이리라. 치후유는 놀란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이런 수준의 무사가 현대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귀공의 존함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코핀 컴퍼니 펜릴 부소대장 양 한솔입니다."


 치후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소대장?"


 믿기지가 않는 거다. 도대체 무슨 회사이길래 이런 사람을 고작 부소대장으로 두는 건가? 설마 객장인가?


 "지금은 소대장 대리로 있습니다."


 한솔이 물었다. "이대로 가면 버틸 수가 없어요. 오로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


 치후유가 대답했다. "이들 반요반침식체들은 전부 거울세계 너머 있는 고대신 오로치의 수하들… 저쪽에 있겠죠."


 "거울세계?"

 "실례, 오래전부터 이 땅에선 음양사와 무녀들이 지금의 이면세계라고 불리는 마굴을 봉해왔습니다."


 치후유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결심한 듯 뜨면서 말했다. "침식체들이 계속 쇄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저쪽 너머에 문을 지탱하는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쪽 너머엔 얼마나 많은 적이 있나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


 자신이 갈 수 밖에 없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한솔의 위로 엘리자베스가 내려와 말했다. "한솔 경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전부다 듣고서 넌지시 물어본 것이다.


 "제가 혼자 가면 어떨까요?"

 "기사다운 자존심과 용맹함은 칭찬드리고 싶지만, 당신을 잃으면 우리의 전력이 급감합니다."


 치후유가 말했다. "저도 반대합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귀공도 오로치의 간교함엔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다른 좋은 제안이라도 있습니까?"


 "제 함선은 은폐장 기능이 있어요. 저희 셋이 탑승하며 저편으로 숨어들어 목표물을 향해 돌파하고 파괴하죠."


 치후유는 미소를 지었다. "명쾌한 전술입니다, 엘리자베스 공." 한솔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의합니다."


 리사는 둘과 눈빛을 교환한 뒤 고개를 끄덕이곤 날아올라 로이를 향해 외쳤다. "로이! 우린 알비온에 타고 침식균열 안에 들어갈 거니까, 나올 때까지 버텨!"


 자신에게 달려오는 침식체의 공격을 방패로 막으면서 쳐내곤, 사슬을 약점을 향해 내질러서 꿰뚫어 간신히 또 하나 더 처치한 로이가 멀리서 외쳤다. "뭐?!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바보야, 언제까지 이렇게 버티는데? 안에 들어가서 균열의 근원을 파괴하지 않음 안 돼!"

 "누가 봐도 덫이잖아, 저거! 그냥 이렇게 계속 방어하며 원군을 기다리는 게…."

 "조심히 들어갔다 나오면 될 거 아냐?"


 사실 로이의 의심이 딱히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선택 모두 리스크와 리워드가 공존했다.


 그러나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옛날부터 리사는 자기가 하고 싶다면 무조건 해줘야만 직성이 풀렸으니.


 로이는 소꿉친구의 고집을 절대 못 꺾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외쳤다. "젠장, 맘대로 해!"


 "나 돌아오기 전에 쓰러지면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말야!" 리사는 그렇게 말하곤, 알비온을 호출하여 한솔과 치후유를 양손에 잡곤 뛰어올라 승선했다.


 그 모습을 보곤 로이는 중얼거렸다. "너야말로…. 옛날처럼 구해줄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저편, 거울 세계.


 워프를 마친 알비온. 그쪽 이면세계는 많이 달랐는데, 인간이 세운 회색 건물은 전혀 보이질 않고, 단지 침식파에 의해 오염된 나무나 식물이 보였다.


 그것들도 침식체라 할 수 있는 걸까? 아무튼간, 자연적인 경관의 숲과 개울을 지나, 중세 일본 드라마에 나올 법한 마을의 광경이 보였다.


 무언가 불쾌한 감각을 느낀 걸까, 치후유가 눈을 날카롭게 뜨면서 말했다. "아마 이곳 근처라고 생각합니다만…."


 "…사람?" 엘리자베스는 침식체와 달리 멀쩡하게 생긴 남자들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치후유가 설명했다. "과거 일본에는 악의 파동… 현시대에 침식파라 불리우는 것에 자신의 몸을 내주곤, 귀신으로 변하면서까지 복수를 이루려고 했었던 무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충절로 생각한, 전국시대의 미련한 낭인들이죠."


 그녀는 눈을 감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선을 맹세했기에 악에 떨어지다니, 딱하구나."


 한솔도 밑을 보았다. 촌마게를 틀고 근엄한 표정을 지은, 그렇지만 눈이 어둠에 불타는 듯한… 그런 오니무사들.


 한솔이 둘에게 말했다. "알비온이 은신을 유지하는 동안, 제가 내려가서 목표물을 파괴하겠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뭘 부숴야만 할지 모르는데…."


 치후유는 카타나를 뽑으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이 이면세계는 현세와 지형이 동일합니다. 이곳은 저희의 마을과 같으며… 길을 따라 나나하라 신사까지 가야, 무엇을 베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엘리자베스가 등 뒤로 날개를 뿜곤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여기 있을게요. 우리 셋 중 오직 저 혼자만 날 수 있어요. 공중에서 적이 나타나도 함을 지키기 쉽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한솔 공, 이쪽으로 저를 따라오시길."


 은폐장을 켰던 채로 낮게 비행하는 알비온으로부터 지붕에 내리며, 마치 닌자처럼 지붕과 지붕을 밟고 뛰면서 달리는 둘. 한솔에게는 낯설은 움직임이나, 어쨌건 카운터워치 덕분에 치후유의 움직임을 따라하며 쫓아갈 순 있었다.


 놀랍게도 둘은 낭인들이 - 침식체 그림자 - 있던 자리를 피해, 무사하게 거울 세계의 신사가 있는 곳까지 올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한솔은 중얼거렸다. "과연… 진짜 우리가 있었던 세계와 비슷해. 그래서 거울세계라고 불렀던 건가…."


 이런 이면세계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한솔.


 안쪽에 가보니 공간균열이 있다.


 치후유가 갑자기 살기를 느낀듯이, 오른손을 살짝 들어올려 뒤에 같이 걸어오던 한솔을 멈췄다. "오로치… 이상하군요, 녀석이 여기에 없습니다."


 '…뭐? 원래 여기 있어야만 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한솔이 물었다. "어째서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저 침식균열은 애초 고대신 오로치의 술법입니다. 길을 만들은 뱀이 자리에서 떠나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


 "그러면 오히려 우리가 유리한 상황이 아닌가요?

 "모릅니다. 오히려 그 괴물이 함정을 치곤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치후유가 말했다. "어찌됬건, 알면서도 독사의 아가리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주술의 술식은 제가 수색할테니, 제 등 뒤를 맡기겠습니다."


 한솔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뒤, 치후유는 발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 앞… 이상했다.


 신사에는 어떤 적도 없다. 치후유는 더욱 경계하며, 칼로 신사의 토리이나, 항아리나, 아니면 새전함, 여러가지 물건들을 건드리고 찔러보며 침식균열을 유지하는 것이 뭘까 계속 조사했다.


 "하아…."


 이런 일은 지친다.


 '…언니라면 좀 더 수월하게 찾으실 수 있겠죠.'


 애초에 자질이 부족한 자신은, 무녀가 아닌 무사의 길을 택했는데. 이것저것 보고 건들고 있으면 옛날 생각이 나서 딱히 기분이 좋진 않다.


 그리고 아무리 눈을 감고서 침식파나 악의 기운을 민감히 느끼려고 해봐도, 그녀에겐 어려웠다.


 그때.


 날카로운 집중으로 기척을 느끼고자 했었던 치후유.


 갑자기 한솔과 다른 발걸음이 땅에서부터 느껴졌다.


 "누구냐!" 치후유가 소리쳤다. 지면을 탔던 파동은 시끄러워지며 탓, 탓, 탓 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카타나를 뽑았지만, 그것은 뒤에서 왔었다. 치후유는 몸을 돌리기에 너무 늦어, 적의 암습을 피할 수 없다고 느꼈던 그때. 한솔이 검을 휘둘러 그녀를 지켰다.


 챙!


 튕기는 소리에 막힌 칼날.


 "요상한 친구를 데려왔네요, 나나하라의 무사." 리플레이서 비숍, 마스크를 쓴 분홍색 머리의 여자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지, 둘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당신은…?" 한솔이 다시 검을 세우며 말했다. 치후유는 한솔의 옆에 서면서, 또한 주위에 다른 적들은 없는지 계속 경계하는 눈으로 살폈다.


 비숍이 말했다. "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단… 뭐, 뭐야?!"


 그건 당황한 비숍 자신은 물론, 그 검을 휘두른 한솔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검에서 타오르는 초록빛 오라는, 방금 전에 클로와 한 번 부딪쳤다고, 갑자기 그 전체에 불붙어 그대로 합금을 썩혀 떨어트리며, 비숍의 팔을 향해서 기어오르고 있었다.


 "치, 칫! 뭐, 뭐지 이거?! 대체 뭐야?!"


 황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팔에 둘렀던 장비를 벗어 던지는 비숍. 마치 꺼지지 않는 불처럼 그것은 물체 자체가 아예 소멸될 때까지 격노의 겁화처럼 타올라 망각속으로 삼켜버렸다.


 칼을 뽑아든 치후유도 그 광경을 보고서 무척이나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무사와 무사의 싸움은 칼날을 맞대며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한솔 본인이 보이지도 않았던 비숍의 기습을 막았던 것 뿐만이 아니라, 아예 한 번 맞댔다고 적의 무기가 아예 썩어 문드러지는 것은….


 '이 남자는… 자신의 손 뿐만이 아니라, 그가 사용하는 검도 엄청나게 위협적이다.'


 도대체 무슨 검이지? 조선엔 저런 검도 있단 말인가?


 '만약에 이 남자를 적으로서 만났다면….'


 "치후유 씨, 전 앞에서 공격할테니 옆으로 돌아 녀석의 뒤를 잡아주세요."

 "이해했습니다."


 비숍이 중얼거렸다.


 "오로치가 여기 있었다면…." 그것을 들은 치후유가 달리던 도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달리, 앞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한솔은 단지 불타는 검을 쥔 채로 다가올 뿐이다.


 비숍은 자신의 주위로 연막탄을 던졌다. 그리고 빠르게,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렸다. 이렇게 연막을 터트려 한솔과 치후유가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게 하고, 사방에서 탄을 쏴버리며 공격할 의도였던 것.


 바로, 유빈을 만났을 때와 같은 전투 스타일.


 다만….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치후유가 말하며, 허리에서 피스톨을 꺼내려던 비숍의 목을 뒤에서 붙잡았다. 진짜 예상치 못하게, 너무나도 쉽게 제압 당한 비숍.


 "첩자, 네녀석은 오로치를 알고 있었구나."


 치후유가 칼날을 목에다 대면서, 연기 속에서 말했다.


 "말해라, 너는 누구지? 여기에 왜 있는가? 어째서 우리를 공격했지? 대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좀 더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나오자마자 바로 끝날 줄은 몰랐네요."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도록. 내 칼날은 예리하다."


 치후유의 여성스러운 아름다운 목소리에선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비숍은 그런 기백에 눌리지 않는지, 상대를 놀리는듯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쓸데없는 말이라고?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도 나쁘진 않죠. 그리고 그에 존경을 표하는 것도요. 나나하라의 차녀… 침식균열을 닫기 위해서 이곳에 왔죠?"

 "……."


 안개 속에서 치후유는 비숍을 노려보면서 침묵하다가, 몇 초 뒤에 말하였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 이면세계 토리이를 부수세요. 기억나시나요? 현실세계에도 그런 돌뱀들을 보았었죠?"

 "설마…? 본 적 없던 그런 조각상이 거울세계 길을 여는 역할을 했다고?"

 "으흠… 으흠…. 아뇨, 단지 보조적인 장치이죠. 여기 있는 문을 부수질 않으면 딱히 의미는 없어요. 뭐, 이 이상의 힌트는 주질 못하겠네요. 이제 놓아주시겠어요?"


 치후유가 칼을 목에다 대고 위협했다. "아직 물을 게 남았다. 너는 누구지? 또, 오로치와 너는 무슨 관계이냐?"


 "저런, 그 이상의 힌트를 요구하나요? 그건 반칙인데요."


 "네 목이 나에게 잡힌 걸 모르나 보군, 침식체 계집."

 "어머나, 무서우셔라. 후훗, 후후후훗…."


 그때였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무언가, 엄청난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느끼는듯한 이상한 소리와, 마치 무언가를 계속 염원하듯 애처롭게 우는듯한 소리가 들렸었다. 남자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


 몇 명이나 되는 것일까? 그것은 비숍의 몸에서 들려왔었다.


 치후유는 일순 당황했지만, 오히려 팔로 꽉 잡고 말했다. "이딴 속임수로 무사의 용맹을 시험할 셈이냐."


 하지만 얘기를 듣고 있었던 한솔은 달랐었다. 이건… 어디선가 들어봤다. 그리고는 이내 떠올렸다. 에델, 에델하고 싸웠을 때 들었다. 한솔은 치후유에게 소리쳤다. "녀석에게서 떨어지세요! 당장!"


 "한솔 공… 잠깐? 왜 그러십니까?"


 한솔이 다시 외쳤다. "저 녀석은 제가 싸웠봤던 매우 위험한 적이랑 비슷해요, 지금 손을 놓고 떨어지세요!"


 그리고, 붙잡은 팔에서 구렁이가 꿈틀대듯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 치후유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것은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라 한솔이 말렸기에 그러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설득하고는 비숍을 놓았다.


 그러자 비숍이 놀리듯 말했다. "어머나, 무사의 용맹은 어떻게 됬나요?" 하지만 그녀의 몸 주위로 마치 들썩이들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구더기 같은 것들이 보였다. "안타깝네요, 조금만 늦었어도 잡혔을텐데."


 그리고 왠지 모르게, 비숍 자신도 이후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솔은 서서히 걷히는 연기 속에서 비숍의 그림자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가아그셰블라랑 똑같은 짓거릴…!" 그리곤 이전에 이 검이 초록색 불길을 멀리까지 날렸던 것을 기억하며, 그대로 비숍을 향해서 휘둘렀다.


 '자, 잠깐… 이거 이렇게 써도 되나?' 아직 자신도 이 검에 대해서 완전히 알지 못하는 한솔이나, 곧장 연막탄의 연기마저 지우며 날라가는 다섯 개의 녹빛의 불길을 보며, 자신이 정말로 그 검에게 선택 받았단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하였다. 마치 검이 자신의 생각을 읽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럼, 안녕. 아마 내일이나 모레… 다시 만나겠죠. 후훗."


 너무나도 늦게 휘둘렀다.


 비숍은 자신의 발 밑에 깔아둔 어둠을 타고 사라져 버렸고, 한솔이 날린 초록색 불덩이들은 그대로 토리이까지 날라가서 양쪽의 기둥에 각각 충돌하더니, 그대로 콜라캔들처럼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비숍이 말했던 그대로, 신사의 마당에 있던 거대한 침식균열은 갑자기 내부로부터 짜부러지듯 뒤틀리면서 없어져 버렸다….


 "…괴, 굉장해. 한솔 공은… 정말로 엄청나군요." 그것을 옆에서 전부 봤었던 치후유는, 분명히 한솔이 아군임에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잠깐 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지는 검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귀공의 칼은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한솔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자신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과거 어떤 마왕을 죽였다고 전해지는 검인데… 퀴에투스라고 불립니다. 그 외의 건 저도 아는 게 없어요."


 "…그렇습니까."


 "뭔가 찝찝하긴 한데… 어쨌건 작전은 성공했네요. 저기… 엘리자베스 씨가 돌아오는데, 빨리 가죠."


 한솔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엔 알비온이 은폐장을 걷고 이쪽으로 천천히 오고 있었다. 함의 밖엔, 살짝 다친듯 엘리자베스가 날개를 펴고 전함의 옆에 나란히 날고 있다. 치후유는 조용히 검을 거두며 알비온을 올려다 보았다.


 '…이상하군. 이렇게 끝날 일이면, 애초에 요괴들을 보내면서 침공한 이유는 대체 뭐지?'


 '게다가 그 여자는 도대체…? 한솔 공이 전에 싸웠다는 적이 여기까지 쫓아왔던 건가? 그럴리가….'


 의문점만 늘어나는 것을 느끼는 치후유는 고개를 털곤, 일단 언니에게 전부 보고하기로 했다. 어쨌던간 이런 일은 자신보단 무녀인 그녀가 더 잘 알테니.


 그리고 나나하라 저택에….


 벚꽃이 흩날리는 마당에, 달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요기가 눈뜨는 새벽에. 점심 때 펜드래건 맨션과 견주는 크기의 나나하라 저택에 도착한 일행은, 치나츠와 만나고는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었다.


 한솔은 거기서 처음 들었다. 자기가 비숍과 싸우던 사이에,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나타났던 오로치와 싸웠단 걸.


 치나츠는 원군을 빠르게 보내고 싶었지만 언제 오로치가 다른 침식균열을 열고 어딜 기습할지 몰라 망설였단 점을 고백하고 사과했다. 어쨌건 적들을 막았기 때문에 딱히 크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 부분에 대한 회의는 거의 저녁까지 계속됬다.


 작전 목적은 매우 단순했다: 고대종의 신격에 달했던 오로치를 봉인 혹 퇴치. 하지만 딱히 의견이 대립되거나 충돌되거나 하지 않았어도 매우 어려운 토론이었다. 애초에 아는 게 적은 대상에 관해 도대체 뭔 전략을 짤 수 있다는 것인가?


 어쨌건 서로가 아는 정보를 교환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너무 지났고, 치나츠는 벽에 걸려있는 일본식 시계를 보더니, 손뼉을 탁 치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바베큐 파티나 해볼까?"


 '그러네! 동생도 좋아하는 요리인 걸.'


 '게다가 평상시에 먹던 된장국이나 낫토나 야채조림을 주면 펜드래건 씨들도 별로겠지?'


 그런 생각을 했던 그녀였지만….


 오히려 여기에 와서 정통 일식을 맛보고 싶었던 엘리자베스는 살짝 실망했다. 게다가 너무 밝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뭐라고 반대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그게 바로 한 시간 전의 일이다.


 아직 식사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 한솔은 밖에서 두 소년이 말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잠깐이면 될 거 아냐?"

 "안 돼, 마사키. 네 물건도 아니잖아. 함부로 만지면 기분 나빠한다고."

 "쯧, 일본인도 아니고 그렇게 쪼잔하고 소심하게 굴까?"

 "야, 야… 너도 일본인이잖아. 진짜, 자기가 일본인인데 그렇게 말하는 애들은 이해가 안 돼."


 한솔은 눈을 비비며 안경을 쓰곤, 문을 열었다.


 "아… 저, 안쪽에서 자고 있었는데. 모르고 계셨었나요? 하하…."


 원래 성격이 좋아서 그런지, 잠에서 깼어도 짜증난다는 표정도 짓지 않고서 그냥 웃으며 말하는 한솔.


 미나토가 급히 사과했다. "역시… 문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드니까 깨셨잖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게 어쨌건, 마사키는 왠지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어차피 저녁 먹을 시간도 거의 다 됬어. 어디… 오오! 저기 있다." 그러곤 냉큼 달려가 한솔이 쓰던 검을 만져본 마사키. "헤에… 이게 이름이 뭐였지?"


 그리고 잠시 동안 칼날과 손잡이를 계속 쳐다보던 마사키는 한솔에게 물었다.


 "어이, 형씨. 이거 당신이 쓸 땐 뭔가 불도 나오고 그러지 않았어?"


 한솔은 팔짱을 끼곤 대답했다. "내가 쓸 때만 그렇게 되는 거 같던데. 엘리자베스 씨나 로이 경도 불가능하다 말했으니까."


 "오, 그래? 그럼 한 번 보여줄래?" 그러면서 자신이 칼날 부분을 잡고 손잡이를 이쪽으로 향하는 마사키.


 …원래라면 그게 바른 예절이긴 하겠지만, 지금 이 검은 한솔이 잡으면 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위험한 무기다.


 한솔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 위험하니까 일단 땅에 놓아 봐. 내가 집어서 보여줄테니까."


 "아, 그렇지. 위험할 뻔했어."


 마사키는 하란 대로 내려놨다. "자."


 그걸 다시 줍고는, 한 두 번 엑스자를 그리며 휘둘렀던 한솔. 검에선 다시 그 마르지 않는 증오와 같은 초록색 불길이 피어올랐다. 둘은 그걸 흥미로운 듯이 쳐다봤다.


 특히 마사키가.


 "오… 대단한데."


 하지만 한솔은 단지 굳은 표정으로 일렁이는 검을 노려봤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온갖 복잡한 감정과 생각이 지나갔었다.


 그런 한솔의 표정을 보지 못했던 마사키가 물었었다. "도대체 어떤 원리지? 관리국의 아티팩트인가?"


 "엘리자베스 씨는 검이 나를 선택했다고 했어."

 "그래…?"


 그리고 마사키는 한솔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맞다, 내가 기억력이 좋지 않거든. 형씨 이름이 한솔 맞지?"

 "어, 맞아. 그리고 네가 마사키고, 저…."


 어느새 마사키와는 편하게 말을 놓았던 한솔이었지만, 미나토는 왠지 존댓말을 쓰는 것을 더 편하게 느낄 사람처럼 보여서 그대로 부르기로 했다.


 "미나토 씨, 맞죠?"

 "네? 아, 네."


 그러자 왠지 마음에 드는 듯, 마사키가 말했다. "오, 오늘 첫날 봤는데 우리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더니."


 한솔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아하하… 뭐 그렇지."


 "결정했다! 어때, 미나토, 한솔을 오오가미 흑막조에 넣는 것은?"

 "뭐? 그거 그냥 네가 혼자 만든 거잖아. 그… 일단은 본인 의견을 들어봐야 하지는 않아?"

 "아, 그렇겠지. 어때, 한솔? 그 전설의 검을 가지고 있는 한솔 씨라면 우리 흑막조에 와도 되는데?"


 한솔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긴 한데, 좀 더 고민해 보고…."


 "뭐, 천천히 생각해."


 그리고 마사키가 핸드폰 시계를 보곤 말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됬네."

 "저녁 시간 말야?"

 "그래. 지금쯤 바베큐 굽고 있을걸? 빨리 가자."


 그렇게 말하고 마사키는 한솔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갔다. 머리를 긁으며 그 뒤를 따라가는 미나토.


 마당으로 갈때 벌써부터 고기 냄새가 났다. 라이언과 모건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하지만 로이는 평상시에 입었던 옷 그대로….


 질질 끌리는 코트 같은 검은 정장.

 셔츠.

 하얀 넥타이.


 …거기다가 선글라스.


 이런 어두컴컴한 밤에 선글라스를 쓰다니, 뭐가 보이긴 보일까.


 한솔이 그걸 보고서 물었다. "…로이 경은 안 불편해요?"


 "내가 왜?"

 "그런 양복 입고 먹으면 좀 그렇지 않나요?"

 "그런가?"


 옆에서 꼬챙이에 야채와 고기를 대충 끼우던 모건이 말했다. "냅둬, 한솔 씨. 얜 예전부터 겉멋만 들어서…."


 "이게 제일 편한데 어쩌란 거야."


 라이언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버넷 경조차 줄기차게 격식 있는 옷차림에 익숙해지는 게 신사로서의 소양이라 말하긴 했습니다."


 모건이 한 입 먹으며 말했다. "아… 확실히 그렇게 말했었지."


 "기관에서도 꽤나 까다롭기로 유명한 남자였으니까요."

 "그래. 어쩌면 로이에겐 우리가 너무 살살 대하는 건지도."


 로이는 하품을 했다. "진짜, 이 할배들은 뭔 얘기만 하면 결국 끝에 가선 나를 욕하고 있어."


 "……."


 한솔은 멍하니 생각했다.


 '프리드웬 기관… 그러고 보니 도대체 어떤 곳일까? 일단 이 사람들과 좀 친해지긴 했지만 딱히 아는 게 없네.'


 사장님은 뭔가 알지 모르니까 나중에 물어볼까, 한솔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아키가 저쪽에서 불렀다. "한솔 선배! 마사키 씨, 미나토 씨!" 에이미도 아키의 옆에 앉아서 콜라를 마시고 있다.


 미나토가 말했다. "아아… 배고파. 한솔 씨, 저기 가서 같이 먹죠."


 "그래요."


 그러다 뭔가 생각나 살짝 묻는 한솔.


 "그런데 아키랑 아는 사이예요?"

 "아, 네. 예전부터 알았어요. 갑자기 한국에 간다고 해놓고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는데."

 "그래요? 어, 잠깐… 혹시 코핀 컴퍼니에 입사한다고 한국에 온 거 아니예요?"


 미나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한국에 친구가 있어서 보러 간다고… 이름이 민서 씨였나?"

 "처음 들어보네요. 전 아키가 저희 회사에 입사하고 자기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길래…."

 "아키가 원래 그런 성격이예요."


 그러다가, 미나토는 자신이 아키를 왠지 소심한 사람처럼 나쁘게 말한 것 같이 느껴져서 말을 다시 했다. 그도 한솔과 비슷하게 타인에게 친절한 성격인지라.


 "뭐, 나쁜 게 아니라, 다른 사람 얘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란 얘기예요."

 "하, 하하… 그렇죠.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셋이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아키가 마사키에게 물었다.


 "저기, 둘이 오면서 뭔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마사키는 별 관심도 없는지 대충 말했다. "몰라."


 "아… 치사하게. 맨날 그런 식이야."

 "본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싫어요."


 "그러면 왜 나한테 물어봐, 귀찮게…." 옆에서 마사키가 투덜거리고 있을 때, 에이미가 말했다. "한솔, 아까 치나츠하고 엘리자베스가 오면 부르라고 말하던데?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같이 먹으면서 얘기하재."


 "그래요? 둘은 어느 쪽에 계신데요?"

 "저기."

 "아… 저기 있네. 왜 못 봤지?"


 그리고 한솔은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저는 저쪽으로 가서 같이 먹을게요."


 자기 쪽의 사이다를 따르는 미나토와, 아까부터 서로 별 것도 아닌 문제로 티격태격 사소한 말싸움을 하는 아키하고 마사키. 그리고 그냥 고기가 맛있는지 혼자 먹는 것만 열중하는 에이미.


 참 묘했다.


 왠지 밤바람이 시원해서 기분 좋다. 지금 하늘에 뜬 별들도 왠지 평소보다 다양한 색깔로 비추는듯 보였고… 주위에 친한 사람들이 즐겁게 떠드는 모습에, 왠지 침식체들이랑 싸우는 그런 현실이 잠시나마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부르셨나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왠지 궁금한데."

 "아, 한솔님!"


 그러자 치나츠가 자신의 옆에 있던 의자를 당기며 앉길 권했다. "그냥, 별 거 아니예요. 코핀 컴퍼니나 여러가지 묻고 싶어서요."


 일본식 차를 마시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런데 치후유도 동시에 말했다.


 "한솔 경, 그…"

 "한솔 공, 저…"


 엘리자베스가 치후유를 보면서 손으로 제스쳐를 취했다. 치후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한솔을 보면서 말했다. "낮에 신사에서 보여주신 힘은 너무나 대단했습니다. 덕분에 거울세계의 침공으로부터 신사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생각해 보면 진짜로….


 여태까지 일개 검사였던 자신이 낼 수 있었을 성과가 아니다. 자신이야 바쁘게 움직였던 거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 응. 나도 치후유 같은 여검사와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어."

 "과찬의 말씀을…."


 관용어구를 그대로 말하긴 했지만, 치후유는 단어 자체를 그대로 들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기분이 좋은지 잠깐 살며시 미소를 짓던 그녀는,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낮에 코핀 사장님께 일을 보고하고 의논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봤던 정체불명의 적의 정체가 짐작이 된다고…."


 "거기서부터는 제가 설명드리도록 하죠, 한솔 경." 엘리자베스가 편한 태도로 다시 찻잔을 들며 말했다.


 "사실, 육익의 유빈 씨는 이미 그녀와 조우했던 적이 있습니다. 리플레이서 조직의 간부인… 리플레이서 비숍."

 "…리플레이서?"


 치나츠가 말했다. "이상하죠? 저도 처음 들을 땐 왜 리플레이서가 이 사건에 간섭을 하는지 이해하질 못했어요."


 "하지만 사실일 겁니다. 사장님의 정보력은 그런 중소기업의 CEO 수준이 아니라… 무언가 더 있어요. 하지만 그게 사실이니까 더욱 어두운 소식이군요. 오로치에 리플레이서까지…."


 하지만.


 일단 자신과, 로이와, 엘리자베스까지 있다. 게다가 나나하라 가문이 협력하면….


 "그렇지만, 어떻게든 할 수 있을테죠."


 그의 눈이 일순 녹빛에 반짝였던 것처럼 보였던 건 착각일까?


 다만 태도는 확실히 달랐다: 강력한 상대라고 해도 싸움에 어떤 부담감도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확실히….'


 자신을 날개라 하면, 로이 녀석은 방패. 한솔 경은 검.


 피스는 모두 갖췄다. 그리고 오로치가 성수라 불렸듯이: 자기도 그 힘을 갖고 있다. 결코 불리한 싸움은 아니다.


 "펜드래건 씨는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직까지 저희가 싸우면서 딱히 리플레이서 병력과 마주친 적은 없었습니다. 애초 일본은 로스트 쉽도 떨어지지 않은, 리플레이서들에겐 중요한 작전목적지도 아니죠. 또한 치나츠 씨에게 이제까지의 전투에 대해서 여쭤봤는데… 단지 거울세계라고 불려지는 곳을 통해 나타났던, 리플레이서와 관계 없는 요괴들만을 목격했다고 하시더군요."


 "여태까지 리플레이서 병력들을 그냥 투입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는 않나요?"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저들은 북미쪽에 모든 전력을 동원하고 있어요. 게다가, 지금 오늘만 해도 리플레이서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었죠. 어느쪽이라 해도, 병력들을 거의 전부 투입하는 이런 중요한 작전에 협력조차 하지 않고 단지 어딘가에 대기시킨다는 것은 둘의 동맹이 매우 비협조적이란 의미가 될 수 있겠군요."


 엘리자베스는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오늘 봤었던 리플레이서 비숍은… 과거에도 주로 암살자나 특파원의 역할로서 주로 활동했어요. 자기 휘하에 병력을 둔 지휘관이 아닙니다."


 한솔은 팔짱을 끼고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썼던 장비도 지휘관이 사용하는 물건 같진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결국 이번에 술법을 써서 침식균열을 열던 것도 고대종 오로치, 그리고 침식체를 보냈던 것도 고대종 오로치. 이번 일은 그녀를 처치하면 끝나게 될 것이라 생각해요. 아마도 리플레이서의 개입은 크지 않은 편이라고 짐작하고…." 그리고 차를 다시 마셨다.


 '승산은 있겠지… 마왕마저 죽일 수 있는 검이라면.'


 질까 보냐.


 부숴주마.


 성수이건 뭐건, 스스로 영혼을 포기하게 만들어주지.


 …….


 '…어?'


 방금, 뭐지?


 "……."


 …모르겠다.


 한솔은 한숨을 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딱히 어떤 방향성도 목적성도 없다. 그나마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무기력한 절망감과 무력함은 느껴지질 않으니까. 하지만….


 '자비심은 기사의 미덕이 아니었나? 그렇지만….'


 …….


 고개를 터는 한솔. 무언가 석연찮은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스쳐 지나갔다.


 '일단 지금은 그런 걸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 인간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딱히 가학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어쨌던간 저딴 괴물딱지들이 고통을 받거나 말거나 알까 보냐….


 결국은 인간을 죽이려는 침식체와 그 침식체를 죽이려는 인간의 공평한 투쟁 같이 느껴지는 한솔이다.


 "후우…."


 한솔은 치나츠를 바라봤다. 왠지 벚꽃이 흩날리는 소리나, 아니면 바람이 부는 소리를 느끼듯이 눈을 감고 있다. 그러다 한솔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치나츠는 눈을 살며시 뜨고는 말했다.


 "한솔 님, 이곳의 바람은 시원해서 좋게 느껴지지 않나요?"

 "네? 아, 뭐… 그런 것 같아요."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의 위로 살며시 벚꽃잎이 떨어졌다가, 그대로 온화한 바람과 함께 하늘로 다시 날라갔다. 하얀 달이 푸르른 밤하늘에 잠긴듯한 그러한 분위기에 취해, 그녀는 술잔을 마치 달빛에 비추듯 들어올리더니, 고아한 색깔의 긴 옷자락을 나부끼며 웃음을 지었다.


 딱히 그녀의 외모엔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그런 치나츠를 보며 과거 일본의 전통과 기품을 고이 계승한듯한 옛 가문의 당주란 어떤 인상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 한솔이었다.


 "이 땅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요… 그리고 이곳에 흐르는 물길과 모든 자연의 선물도. 저의 선조들이 그러셨듯, 저는 끝까지 악에 맞서서 싸울 생각이예요. 그리고 저희를 돕는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언제나 바람에 기도해요."


 그렇게 술잔을 마시는 치나츠와, 묵묵히 눈을 감고 있었던 치후유. 또한, 그런 치나츠가 자신의 격에 맞다고 생각하는지, 엘리자베스는 차를 그만 마시고 미소를 띈 채, 자신의 술잔을 그녀에게 살짝 내밀었다.


 우아한 손놀림으로 술병을 기울이는 치나츠.


 "서쪽에도 고대종에 선택 받은 가문들이 있었다니…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닐지도 몰라요."

 "후후, 기연은 다른 기연을 부른다는 말이 있어요."


 "그렇다면, 한솔 공에게도." 치후유가 술병을 가볍게 들었다. 한솔은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치나츠가 술병을 든 채 고개를 돌렸는데, 치후유가 선수를 친 걸 보고는 칭얼거리듯 애교부리듯 말했다. "아, 잠깐! 치후유! 치사해! 언니가 먼저 따라드릴려고 했어!"


 그러자 훗 웃으며 치후유가 대답했다. "이것은 무사의 정을 나누기 위한 잔입니다, 언니. 양보할 수 없지요." 그리고, 치후유가 자신의 빈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저도, 부디." 한솔은 말없이 술병을 따라주었다.


 "무의 길은 언제나 하나로 이어지는 법이죠. 오늘이 그대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듯이, 저에게도 당신과 같은 기사와 연이 닿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밤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렇게, 기사와 무사는 서로의 술잔을 나눴다.



 .

 .

 .



 한편 그로니아로 갔던 코핀함….


 혼자 의자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보는 레지나는, 에델이 자신에게 무엇을 하려고 했었는지, 그리고 리벳은 어디로 갔는지 그런 생각을 그만둘 수 없었다. 도대체 어째서? 단지, 지금 자신을 구한 코핀 컴퍼니와 함께 하다보면, 언젠가 에델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를 할 뿐이었다.


 그러다, 창 밖에 파란 머리를 한 여성이 보였다. 레지나가 말했다. "저기, 저 분이 바로 레버넌트라고 불리는 그 사람인 것 같은데…!"


 브릿지의 릴리와 리코리스가 듣고서 코핀 함을 근처에 착륙시켰다. 안에서 앉아 자고 있었던 도로시, 허수아, 리온을 모두 깨우는 루시드. 레지나가 나갈려고 했을 때, 갑자기 대시가 가까이 오며 말했다.


 "저… 레지나 씨, 맞죠?"

 "네, 맞아요."


 대시는 갑자기 오한이 들어 몸을 떨었다. 레지나가 그걸 보고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차갑죠? 그럴 거예요. 가까이 오지 않으셔도 됬었는데."


 "아, 저… 아까 전부터 말을 걸고 싶었는데, 매우 깊은 생각에 빠지신 것 같아서…."

 "글쎄요, 그렇게 보였던가요?"


 자신은 딱히 의도하지 않았지만 뭔가 까칠한 인상을 주는 레지나였다. 그런데도 사교성이 좋은 대시는 마치 강아지처럼 눈을 굴리면서 뭔가 할 말을 계속 찾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옆에서 붙어서 따라가다가… 레버넌트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갈 동안에 다른 대화는 하지도 못했다.


 지루한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품을 하던 레아. 그러다 레지나들이 오게 되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코핀 컴퍼니? 기다렸어."


 릴리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주인님이 말씀하신 정보원이군요."


 "주인님? 코핀 컴퍼니 사장님 말하는 건가? 아니면 회장님? 아무튼 맞아. 레버넌트… 아니, 레아라고 불러줘."


 그러자 리코리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뭐? 그건 당신의 본명 아냐?"


 "좋은 사람들에겐, 적어도 내가 진짜로 누구였는지 기억되고 싶어서."


 그들을 잠시 둘러본 레버넌트가 물었다. "그런데, 너희 같이 어린 아가씨들도 싸우는 거야?" 왠지 그 말에 반응하듯, 도로시가 말했다. "하아… 우리도 언니 같은 사람에 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한다구."

 레아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나쁜 의미로 말한 건 아냐. 그냥 너무 기특해서. 나도 너희 같은 동생들이 있으면 좋겠는데."


 마치 폐허처럼 변한 이 그로니아의 땅 때문인지, 아니면 레버넌트의 쓸쓸한 기분이 전파된 것인지. 도로시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가족을 원하는 아이는 많을 거야. 방금 한 말이 진심이면… 나중에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그런 아이들을 같이 돌봐줬으면 좋겠어."


 "……." 레아는 도로시의 말을 듣고는 잠시 땅과 주위의 풍경을 보다, 이내 털어내듯 웃으며 말했다.


 "미안, 혼자 너무 심각해졌네." 그리고 벽에서 기대던 등을 떼면서 말했다. "자, 가야지?"


 이십 분 뒤.


 위저드의 눈에 띄지 않게, 일부러 멀리서 코핀 함에서 내리고, 이후 자동조종으로 전환해 상공에 띄워놓고 조용히 걸어서 접근하는 일행들. 마침내 위저드의 마지막 은신처까지 도착했다.


 "헤론이 저기에 있다고 하셨죠? 이제까지 저희를 매우 괴롭힌 위저드가… 이제는 매우 작게 보여요."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레버넌트가 말했다. "뭐… 사실, 그럴 만해." 루시드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


 "윌버의 제프티 바이오테크와 다르게, 헤론은 자신만의 세력이란 것이 딱히 없었어. 애초에 그녀는 단지 윌버에게 실험 목적의 고아들을 공급하는 하청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녀가 부릴 수 있는 인력도 실상 윌버가 떼어준 사람들이나 아니면 용병들 밖에 없었고."


 "하지만 윌버는 코핀 컴퍼니와 카린 대령에 의해 몰락했죠."


 루시드가 말한대로였다. 사장과 카린의 협공에 의해서 브라운 락 캐니언 근처의 지사가 파괴되었다. 그것 뿐만이 아닌, 그곳에서 입수한 여러가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에 더해, 사장에게 받은 데이터로 윌버를 범죄자로 증명한 카린. 제프티 바이오테크는 완전히 몰락했다. 하지만, 윌버 본인은 잡히기 전에 도망쳐버렸다.


 "그 윌버 말인데… 걔도 여기에 있어."


 헤론 뿐만이 아닌, 리플레이서 폰으로 개조당했던 윌버도 또한 이곳에 보내진 것이었다.


 "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헤론이랑 윌버. 도망자 윌버가 마지막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곳이지."

 "그렇군요…."


 레아는 잠시 걱정하는 눈초리로, 기지에 옆에서 순찰을 돌고 있었던 리플레이서 보초를 멀리서 힐긋 보곤 물었다.


 "혹시, 사장님이 윌버가 리플레이서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말해주셨어?"

 "그건 알고 있었어요, 왜냐면 저도 그때 거기에 있었거든요."

 "그래… 그러면 이해가 빠르겠네. 저기에 돌아다니는 보초병 모두… 그냥 용병들이 아냐. 전부 리플레이서들이야. 평범한 일반 용병들처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돼."


 그렇게 다시 이쪽을 바라보는 레버넌트. 그리고 물었다.


 "일은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좋아… 당신들의 목적은 헤론이야, 맞지?"


 도로시가 말했다. "그렇긴 한데… 그건 왜?"


 레버넌트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고개를 살짝 돌리며 턱으로 저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가 비록 마지막 기지는 맞지만, 경비가 무척 삼엄해. 어떻게 할지 정하고 들어가야지, 응? 그러니까…."


 레버넌트가 릴리와 레지나를 번갈아 보다가, 레지나가 더 강하다고 보여졌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레지나 씨 맞지? 사장님이 주신 자료들을 훑어봤었는데, 당신이 여기서 제일 강한 카운터 같은데…."


 "…제가 여기서 제일 강한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맞아요."

 "그럼 어때? 레지나 씨가 저기에 있는 리플레이서들을 전부다 죽일 수 있어?"

 "그럴리가요."


 레버넌트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겠지. 뭐라고 그러는 게 아니야, 나도 하질 못하는 걸. 어쨌던간, 그렇다면 모두 사이좋게 정문으로 공격하다간 그냥 죽겠지. 릴리 씨는 어떻게 생각해?"


 "애초부터 모두가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리겠죠. 단지, 정면에서 강한 카운터들이 공격할 동안에, 일부가 숨어서 헤론이 있는 곳까지 침입… 만일 헬기를 타고 도망친다면, 밖에서 다른 인원이 바주카를 쏴서 격추하는 걸로…."


 리코리스가 말했다. "그거, 사장님 따라하려는 거잖아?"


 "네?"

 "회사의 전투기록 파일을 읽었어. 그때 코핀 사장님이 이거랑 비슷한 짓을 했는데."


 리코리스는 의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게 그때 왜 통했는지 알아? 그땐 전면에서 공격을 받을 강력한 전투원이 불도저처럼 앞에서 밀었던 거잖아. 너 혼자 저 리플레이서들을 모두를 상대할 수 있겠어?"


 "당연히 저랑 레지나 씨랑 리코리스 당신이 같이 막아야 합니다."


 릴리의 말을 듣고서 왠지 황당한 표정을 짓는 레지나였다. 어쨌건,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리코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큰 소리로 반대했다. "될 리가 없잖아? 안 돼, 절대 안 돼. 그건 그냥 자살이야."


 "그러면 리코리스는 어떻게 하고 싶나요."


 "몰라. 하지만 그건 아니야."

 "대안을 주지는 못하면서 불평만 하다니… 당신도 참 멀었군요."

 "아니, 야! 나는 현실적인 지적을 하는 것일 뿐이야!"


 "후…." 레아는 고개를 돌리며 레지나에게 물었다. "혹시, 레지나 씨는 다른 대안이 있어?" 레지나는 그냥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릴리와 리코리스가 서로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면서 십몇 분이 지났다.

 자신들도 뭔가 좋은 생각은 없는지 고민하던 허수아와 리온. 하지만 도로시는 눈 앞에 바로 헤론이 있는데 여기서 머뭇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길바닥의 돌멩이를 발로 찼다.


 루시드는 대시가 혼자서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눈치를 보는 것을 알아채,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대시? 혹시,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요?"


 "아뇨, 전…. 이런 말하면 왠지 웃길 거 같아서…."


 그런 대시를 보고 리코리스가 말했다. "얘는 뭐래. 우린 전부 친구잖아. 말하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말해봐. 웃지 않을테니까."


 "저… 루시드 언니는, 그러니까… 침식체들을 조종한다고 했었죠? 그러면, 혹시 침식체로 변하는 리플레이서 아저씨들도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랄까…"


 "아, 아하하하…, 아… 괜히 말했네요."


 대시가 말을 마치자,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히잉….'


 어색한 분위기에 아까부터 쪼그리고 앉았던 대시는 무릎에 얼굴을 그대로 파묻었다.


 "잠깐… 그거 설마…" 레지나가 갑자기 뭔가 깨달은듯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군요. 정작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저도 몰랐었네요. 대단해요, 대시." 루시드는 왠지 유감인듯한 목소리를 내었지만, 윙크하며 대시를 칭찬했다.


 "에? 에? 그래요?" 하지만 그 말을 했던 대시 본인이 제대로 이해가 되질 않는지 혼란스러워하다가, 다시 되물었다. "잠깐만요, 안 되지 않나요? 루시드 언니의 능력은 고작 침식체 하나 둘 정도만 통하지 않을 거 아녜요?"


 그렇게 이해를 하지 못하는 대시를 보고, 릴리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사실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자신이 말하긴 했지만, 결국 자신은 모르고 모두가 이해한 뭔가 이상한 상황. 잘 모르겠어하는 대시는, 단지 일어나 움직이는 일행을 졸졸 쫓아갈 뿐이었다.


 삼십 분 뒤….


 밖에서 패트롤을 돌고 있었던 리플레이서를 뇌파로 조종한 루시드. 이후 일행은 각자 자신의 팔에 노끈을 엉성하게 묶고, 그대로 리플레이서가 끈의 끝자락을 쥐게 해놓고, 정문으로 걸아갔다….


 "음? 루릭 아냐? 뭐야, 그 여자들은?"


 루시드는 눈을 감고 뇌파를 통해 리플레이서가 말하게 하였다.


 "헤, 헤헤… 보스가 데려오라고 명령했었지. 지금 올려보내야 돼."


 그러자 정문에 서던 보초가 일행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고는 말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아무튼… 상관 없을 거 같군. 빨리 가봐."


 "그래. 아, 맞다. 헤론님은 어디 계시더라?"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


 그렇게 묻자 왠지 수상하게 느끼는 것 같아서, 루시드는 그냥 그만뒀다.


 "아, 아니… 그냥. 일단 나는 들어가지. 보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말야."

 "……."


 아무 말도 없이 자신들을 노려보는 것 같았던 보초병.


 …이상한 질문을 해서 들켰나?


 어색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천천히 걸어서 건물로 들어갈려고 했었다. 그때였다.


 "아, 맞다! 지금은 보스랑 같이 지하에 있는 실험실에 있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실험체들을 조달하려고 그랬던 거였네?"


 그 소리에 깜짝 놀랐던 루시드는 너무나 빨리 뛰는 심장을 억지로 멈추려고 노력하며, 억지로 태연하게 대응했다.


 "그, 그렇군. 맞아. 그럴 거야. 아무튼, 빨리 가볼게!"


 뒤에서 뭔가 이상하지 않냐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일행은 어떻게든 건물의 내부에 들어갔다. 거기엔 더욱 많은 리플레이서들이 있었었는데, 아무도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단지 침묵하면서 지하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십 분 뒤에….


 이상할 정도의 한기가 느껴지는 건물 지하까지 내려간 일행들. 침식파를 감지할 수 있었던 그녀가, 밑으로 내려갈 수록 더욱 큰 기운을 느끼며, 왠지 진짜로 이곳에 그들의 실험실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틀림 없어… 여기에 윌버가 있어. 그 사람이 만들었던 인공침식체들의 파장과 비슷해…!'


 그러던 중 갑자기, 분명히… 루시드가 조종하던 침식체 리플레이서가, 자기 혼자 멀리서 걷고 있었다. 일행은 그것을 이상하게 보고 있다가, 도로시가 왠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루시드 언니, 이게 뭐야?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마치 누군가 듣는 사람이 있을까봐, 애매하게 중의적인 형태로 물었던 도로시.


 하지만 그건 딱히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갑자기 불이 꺼졌다. 모두 당황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


 불이 켜지며, 윌버와 헤론이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보고 있는 것을 봤다.


 "헤론!" 그녀를 보자마자 도로시가 소리쳤다. 왠지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중얼거리는 마담 헤론. 그 얼굴은 이제는 마귀할멈처럼 보였다. "저… 저 멍청이들이… 너희들이었구나.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처럼 몸을 고쳐주고 음식과 잠자리를 줬는데… 이 녀석들이…!"


 그러자 리온이 어느 때보다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아뇨, 당신은 단지 실험쥐들이 굶어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먹이를 던져준 거예요! 당신은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야, 그냥 악당이야!"


 허수아는 단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헤드기어에 아무것도 떠올리지도 않았다. 단지 총을 겨누고 있을 뿐.

 도로시가 말했다. "맞아! 당신 같은 쓰레기 마귀 할멈과 달리, 우리는 진짜 가족 같은 사람을 찾았어! 그리고 다른 애들도 더이상 고통을 받지 않도록 도와줄 거야!"


 그 말을 듣고, 헤론이 부들부들 떨면서 뭔가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윌버가 팔을 들면서 제지했다.


 "미스터 딘, 왜 말리시는 거죠?"

 "저 빚쟁이 개년과 할 말이 있다. 방해하지 말도록."


 그리고 윌버가, 자신을 당당히 쳐다보는 대시를 향해 물었다.


 "이 쓰레기… 너 같은 썅년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대시? 응? 죽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왔나?"


 자신을 노려보는 대시를 두고서, 윌버는 난간을 쾅 치면서 말했다. "뭐야? 말하는 방법까지 까먹었냐? 이 멍청아?!" 하지만 대시는 윌버를 측은한 눈길로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윌버…. 당신도 매우 불쌍한 남자예요… 저는 한 때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려고 했죠. 하지만 당신은…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여기서 당신과 연을 완전히 끊기로 했어요."


 묘하게 어른스런 말투.


 하지만 그건 리타처럼, 뭔가 냉혹하고 고압적인 것이 아닌: 냉정하나 온화하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마치, 무사히 어른이 된 그녀는 그런 느낌이 아닐까, 그런 편린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러자 윌버가 손을 이마에 대고, 윗머리를 들어올리며 비웃었다. "뭐라는 거냐, 이 멍청이가! 몇 달 전에, 네가 나한테, 살려주세요 윌버님 그러면서 구걸했었던 것은 기억하긴 하냐?! 어?!" 그리고 루시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그리고 넌 여기까지 왜 굴러왔냐, 이 실패작 폐품 쓰레기! 이 바보들을 따라와서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 어?!"


 그리고 윌버는 난간에 양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하! 웃기지도 않는군, 네가 날 이길 일은 진짜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넌 어차피 몇 년 있으면 죽어!"


 "모르는 것은 당신이예요… 당신은,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제 몸은 사장님이 고쳐주신 뒤로 완전하게 나았어요. 늙어서 허리가 휠 때까지 저는 살아있겠죠!"


 "뭣…! 설마, 코핀 컴퍼니… 그 사장 녀석…! 맞아, 그 녀석이 바로 관리자였었지…!"

 "…네? 관리자?"


 윌버는 잠시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다시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후, 후후… 후후후… 그 멍청한 녀석, 내가 갖고 놀다가 버린 고물덩어리를 다시 주워서 애지중지 고쳤다고? 혹시 너한테 더러운 감정을 갖고 있는 거 아냐? 진짜 취향도 이상한 녀석이군…."


 "사장님은, 당신같은 천박하고 상스러운 남자와는 달라요!"


 "내가 천박하고 상스럽다…? 후, 후훗… 내가 너에게 뭘 했었지? 뭘 보여줬었지? 네가 본 것은 인간을 개조하거나 침식체를 창조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아. 이 학구열이 너에게는 천박하고 상스럽게 보여지나?"


 그러자 리코리스가 중얼거렸다. "와… 진짜 변태네, 이 녀석."


 하지만 그걸 듣지 못한 윌버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건 네 눈에 어떻게 보일까? 응? 봐라!" 그러고는, 갑자기 방금 전까지 루시드가 조종했던 리플레이서가 그의 옆까지 오더니, 그대로 검은 침식체의 몸으로 변하고는, 이내 윌버의 몸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레지나가 그것을 보고 놀랐다. "리플레이서를… 흡수했어?!"


 "이건… 이런 정보는 듣질 못했었는데…? 윌버가 카운터였다고? 아냐… 설마 자신을 침식체로 시술한 건가?" 바로 위험함을 직감한 레버넌트는 얼굴을 구기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반은 맞았다, 파란 머리 여자!" 윌버가 손가락을 딱 튕기면서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더 많은 리플레이서 보초병들이 계단을 내려오며 그를 향해 느리게 걸어왔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한 게 아니야! 그 망할 도미닉이 내 몸을 갖고 장난을 쳤지! 덕분에 이런 침식체 쓰레기들을 흡수하면서 강해지게 되었지만… 이게 좋겠냐고! 어?!"


 윌버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갖고 실험했던 것을 완전히 잊었는지, 마치 일행들에 잘못이 있다는 듯 그렇게 미친듯이 소리쳤다. 레버넌트는 주저없이, 몸이 부풀면서 변하는 윌버의 머리를 쏘았다.


 그 머리가 풍선처럼 터졌다. 하지만, 몸에서 다시 다른 머리가 자라나며 말을 이었다. "봐라! 이 쓰레기들아! 나는 이제 너희들과 다를 것도 없어진 괴물이다! 하지만, 날 이렇게 만든 너희들을 여기에서 전부 죽여야만 해야겠어! 이건 복수니까! 맞아!"


 그리고 위에서 바닥으로 쿵 떨어지며, 윌버가 말했다. "루시드, 너 이 빌어먹을 썅년! 넌 지금 당장 죽여주지, 그리고 나머지 녀석들…! 너희는 카운터인가? 좋아, 너희들을 흡수하고, 다른 카운터들도 잡아먹으면, 날 이딴 괴물로 만든 도미닉 그 자식도 박살내 버릴 수 있겠지!"


 "칫… 언니, 꽉 잡아!" 루시드를 향해 살덩이를 내뿜으며 공격하는 윌버를 보고서, 도로시는 빨리 뛰쳐나가 루시드를 안고서 그 자리에서 피했다. 그것을 보고서, 윌버는 도로시가 뛰어가는 경로에 다시 살덩이들을 내뿜어냈다.


 레아는 윌버를 보고서 생각했다. '아마… 윌버가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본인이 말했듯 리플레이서 킹이라는… 그런 존재 때문이겠지. 설마 그 자가 리플레이서들의 총지휘관인가? 그러면…? 그렇지, 복수하길 원하는 것을 봐서는, 윌버는 다른 리플레이서들에 어떤 동질감을 느끼지도 않았어. 오히려 자신을 감시하는 적으로 느꼈겠지. 자신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밖에 있었던 모든 리플레이서들을 흡수한 것이다. 조직 내부에서 윌버의 위치는….'


 레지나는 약간 다른 방향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아까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리플레이서들 중에선 정문에 서있던 다른 보초병도 있었죠. 그러면 이 남자가… 지금 여기에 유일하게 남은 적이겠죠. 하지만, 방금 전에 레버넌트 씨가 총으로 머리를 쐈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어요. 혹시 재생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던지, 아니면 다른 약점이 있다던가…? 어떻게 해야 이 괴물을 죽일 수 있을까….'


 하지만 계속해서 살덩이를 던져도 아예 맞추질 못하는 윌버였다. 그 모습에 뭔가 짜증이 났는지, 윌버가 헤론을 향해 소리쳤다. "마담,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문을 잠그고 나가! 그걸 사용할테니까!"


 "그, 그거요?!" 그러자 마담이 다급하게 빠져나가며 외쳤다. "뒤는 부탁해요, 미스터 딘!"


 그때, 탕, 하고… 도망치는 헤론을 향해서 총을 쐈었던 허수아였지만, 맞지 않았다.


 어쨌던간 지금 문이 잠겨진 상황에, 지금 여기에 있는 누구라도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끼면서 윌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즐기듯, 윌버가 광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 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너흰 이제 다 죽었어, 너흰 여기서 빨리 나갔어야 살 수 있었는데!"


 그리고, 윌버의 몸이 갑자기 녹아내리듯 보였다.


 그 징그러운 광경을 보면서 리코리스가 말했다. "뭐, 뭐지? 이 녀석 지금 혼자서 뭐 하는 거야?" 그리고 창으로 찔러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위험함을 느끼면서 릴리가 제지했다. "안 돼! 다가가지 마세요, 리코리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요!"


 윌버의 녹아내린 하반신은 마치 엎지른 우유처럼 온 바닥에 흘러퍼졌다.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면서, 윌버의 머리나 혹은 몸이나, 아니면 그런 흘러내리는 살덩이 자체를 향해 총을 쏴보는 레버넌트. 하지만, 윌버는 잠시 찡그린 표정을 지을 뿐이고, 딱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 이건…! 위험해, 총으로는 녀석을 막을 수 없어!"


 그러자 윌버가 미친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하하하하!!! 맞아, 근데 총 뿐만이 아니야! 이렇게 갇힌 이상 너희가 날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 바보들아!!"


 도로시가 위쪽에 루시드를 내려놓고, 빠르게 리온을 향해 떨어져, 다시 올라가며 말했었다. "리온! 토토로 문을 갉아먹어! 우리도 나가지 않으면 안 돼!"


 "놔둘 줄 아냐? 이 빌어먹을 계집애들이!" 그렇게 말하며 도로시를 향해 살덩이를 투척하는 윌버. 하지만, 그것은 레지나가 날린 고드름에 막혀 바닥에 튕겨나갔다.


 "뭐, 뭐야?!" 윌버는 당황하며 얼음이 날라온 방향을 보았다. 이미 이쪽의 바닥은 자신의 살덩이에 감싸였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레지나가 그 위에 거대한 얼음을 깔아놓았던 것. 릴리와 리코리스를 비롯해 대시도 그곳에 서있다.


 "그… 어떻게 해야만 좋을까요… 혹시 제 낫으로 자를 수는 없을까요?" 그렇게 릴리와 레지나와 레아를 보면서 매우 혼란스러운 얼굴로 묻는 대시에게, 레지나가 빠르게 대답했다. "아뇨, 그건 안 돼요. 저 괴물의 살은 닿는 것을 흡수할 수 있어요. 게다가, 무기를 잘못 휘두르면 살덩이들로 당신마저 잡아당길 수 있어요."


 그리고 레지나는 허수아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윌버는 물론이고, 옆에 있는 누구도 듣지 못했다.


 다음에 레지나는 도로시에게 외쳤다. "도로시, 루시드 씨를 이쪽에 데려와줘요! 여기가 더 안전해요!"


 "잠깐, 저 녀석을 죽일 방법이 없잖아?!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루시드 씨가 그곳에 있으면 안 돼요!"

 "토토로 문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도로시는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 뿌리를 박은 윌버가 퍼트리는 살덩이는 이미 난간을 타고 이층의 바닥까지 올라왔다. 그쯤되면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 안 되겠네, 이제…!" 결국 도로시는 루시드를 잡고 떨어졌다. 쿵, 하고 착지한 두 사람. 그리고 도로시가 물었다. "그러면, 좋은 방법이 있어?!"


 레지나가 다급한 척하면서 외쳤다. "우리는 지금 도망칠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문을 통해서 나가진 못해요, 천장을 부수고 나가야만 해요!"


 "처, 천장이요?! 레지나 씨, 정말 가능해요?" 리온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렇게 단단하고 두꺼운데 가능한 걸까?


 "아니, 그딴 게 될 수 있겠냐, 이 멍청아?!" 윌버도 비웃듯이 외쳤다. 하지만….


 레지나가 대답 대신에 천장에 날린 무수히 많은 얼음 가시들.


 그것은 레지나 본인이 놀랄 정도로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천장에 박혀버렸다. 오히려 레지나 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강했었던가…? 아니야, 분명히 그렇지 않아요. 에델이… 에델이 나에게 뭔가 했었겠죠….'


 "제, 젠장! 이 녀석, 엄청난 카운터였잖아?!" 날라가서 천장에 박혀대는 얼음의 위력을 본 윌버는, 되려 경악하며 살덩이를 매우 빨리 전개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제, 젠장! 안 돼! 여기서 녀석들을 놓칠 수는 없어! 어떻게든 천장까지 전부 막아야만…!"


 하지만 그 살덩이가 천장을 타고 기어올라갈 동안, 무수히 많은 라이트가 깨졌고, 천장 자체도 흔들리며 작은 돌까지 떨어졌었다. 레지나는, 최대한 자신의 의도를 들키지 않게 하려고, 얼음을 마구 뿌리듯이 날려대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곳엔, 바닥과 벽과 천장을 그로테스크하게 감싸는 살덩이들과, 마치 가시처럼 무수히 많이 천장에 박힌 얼음만이 보였다.


 리코리스가 두려워하며 중얼거렸다. "이, 이제… 끝났어!"


 그리고, 녹아내리는 얼음의 위에 서있는 레지나들을 보며, 윌버가 웃으며 소리쳤다. "하, 하하하하, 아하하하!!! 봐라, 이 쓰레기들아! 너희 같은 바보들이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었냐? 어? 웃기지도 않는군! 이제 끝났어!"


 그리고 대시와 루시드를 차례로 보면서 외쳤다. "너, 이 쓰레기 같은 사채꾼 계집! 그때 거기서 얌전히 죽었으면 이런 고통스러운 꼴은 당하지 않았어도 됬잖아? 이거 네 잘못이야! 어?! 알아들었어?! 멍청한 네년이 아직까지 나한테 개기니까 이렇게 된 거라고!!!! 그리고 너, 루시드… 이 빌어먹을 폐품 쓰레기 새끼가!! 넌 진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 각오해라 진짜!!!"


 대시와 루시드는 단지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레지나가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윌버라고 하셨나요?"

 "응? 곧 죽을 네년이 내 이름을 알아 뭐하게? 아, 그렇지! 죽기 전에, 네 녀석이 누구한테 죽었는지 알고서 가는 게 좋겠지! 그렇지 않아? 맞아, 그게 내 이름이다! 윌버 웨이틀리, 저승에 갈때 가지고 가라고!!"


 후, 하고 차갑게 숨을 뱉더니, 보석 같이 아름다운 짙은 청색의 눈을 빛내면서, 신비로운 하얀 머리칼을 눈처럼 휘날리는 레지나. 그때에 그녀는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들은… 차갑고 고결한 조각상처럼 보여졌었다.


 "저는 당신에 어떤 원한도 없고, 누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군요."

 "뭐?"

 "당신… 우둔하네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탁 튕겨냈다.


 그러자 건물 전체에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울리며, 무슨 거대장치가 갑자기 가동하듯이 위잉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삐익 삐익 울리는 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그것이 뭔지 아는 윌버는 당황하며 외쳤다.


 "뭐, 뭐야? 뭐지?! 분명 리플레이서 쓰레기들은 전부 흡수했을텐데? 어째서 비상전력이 가동되었지? 어이, 이거 설마 너희들의 원군이냐?"


 분명 윌버는 레지나를 보고서 물었지만, 허수아가 대신 대답했다.


 "아니. 우리가 전부야. 그리고… 당신은 이미 끝났어."

 "하지만 대체 어떻게… 자, 잠깐! 너… 네가 허수아인가? 헤론이 말했던 그 사이보그 계집녀석!"


 갑자기, 물이 뚝, 뚝, 거리며 떨어졌다.


 물을 맞은 윌버는 위를 보았다. 방금 레지나가 발사했던 천장의 고드름은 전부다 녹고 있었다.


 조용히 허수아가 말했다.


 "레지나 언니가 나에게 말했어. 이 건물의 기기를 해킹할 수 있냐고. 그리고 나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컨트롤 룸의 권한을 탈취할 수 있었어. 레지나 언니는 나에게 명령했었어. 자신이 손가락을 튕길 때, 전력을 모두 이쪽에 방출하라고."


 윌버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천장을 보았다. 허수아의 목소리가 마치 죽음의 사자와 같이 들렸다.


 "당신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어. 만일, 당신의 동료가 위에 있었다면 지금 이것을 막았을 거야."


 그리고,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위에서부터 엄청나게 크게 들려졌다. 윌버는 매우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다급히 살덩이를 천장에서 거두려고 했었지만 너무나 느렸었다.


 "제, 젠장! 젠장! 어떻게, 안 돼!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허수아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안녕."


 그리고,


 마치 제우스 신의 낙뢰와 같이.


 천장에 꽂힌 전선을 따라온 전기들은, 레지나가 날렸던 얼음의 녹은 물을 타고서, 윌버의 흉측한 마음과 같은 살덩이를 그대로 휘감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방 전체가 노란 빛과 파란 빛이 번갈아가며 계속해서 엄청나게 번쩍였다. 리플레이서 폰으로 개조됬다고 해도, 그리고 다른 리플레이서들을 흡수했어도, 윌버의 몸은 그것을 버티질 못했다. 계속해서 알아듣지 못할 비명과 괴성을 지르던 윌버는, 마치 녹아내리듯이 얼굴에서 침을 흘리다가… 그대로 온몸이 타들어가면서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기름기 가득한 살덩이 표면은 전부다 썩어버린 듯이 다른 색깔들로 변했다. 천장에 붙었던 윌버의 살덩이들은 그대로 떨어졌었다.


 마지막에 절규하며 죽어버린 윌버의 모습은 마치 거짓된 악마가 미뤄둔 심판을 받은 것 같이 보여졌다.


 "윌버… 만일 당신도 저희들 말을 제대로 듣고 반성했더라면… 이렇게 끝나진 않았을 거예요." 대시는 흉측하게 굳어버린 윌버의 얼굴을 보면서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드는 눈을 감고서 담담히 말했다. "윌버 씨는… 결국 남을 이용하고 버릴 줄만 알았던 사람이예요. 그런 사람이니… 늦던 빠르던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여태까지 침착을 잃지 않았던 레버넌트는 레지나를 힐긋 보면서 생각했다. '이런 위기상황에도 냉정하게 생각하며 대응법을 빨리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 레지나 맥크레디… 학회 소속의 인원. 주시해야만 할지 몰라.'


 악마의 내장과 같은 공간에서 겨우 살았다고 생각해 쓰러지듯 앉아 안도하고 있는 리온들을 보며 도로시가 소리쳤다. "윌버인지 뭔지, 이 바보는 죽었지?"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헤론을 여기서 놓치면 안 돼!" 그렇게 말하곤, 리온을 잡고서 위로 뛰었다.


 "자, 잠깐! 도로시?!"

 "빨리 토토로 문을 열어. 녀석이 어디까지 갔는지는 모르지만 빨리 쫓아가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도로시는 다급하게 재촉했다.


 한편 도망친 헤론은….


 일단 윌버가 문을 잠그고 나가라고 했었지만 도망쳐도 된다고 말하진 않았었다. 다만, 리플레이서 폰으로 변했던 윌버는 괴물 같은 능력을 가졌었지만 무조건적인 승리를 보장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헤론은 단지 헬기에 타서, 윌버가 이기나 지나 그것도 알 수 없는채, 안절부절 못하면서 헬기를 띄울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윌버가 큰 소리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분명, 이것은 윌버가 졌다는 것이겠지. 일단 지금은 그냥 도망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륙하려고 했었던 그때….


 "다, 당신은?!"


 어느새 헬기 뒤에서 타고 있었던 리플레이서 나이트. 그리고 그녀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칼을 들었다.


 "아, 안 돼!!"


 십 분 뒤….


 헤론이 어디에 갔는지, 이제는 리플레이서 한 명 없는 그로니아의 폐건물을 돌아보면서 찾던 모두. 그러다가, 릴리가 바깥에 있는 헬기를 발견하고 모두에게 알렸다. 그리고… 헤론의 시체를 모두가 보았다.


 "제가 처음 발견했을 때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릴리가 말했다.


 도로시가 왠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거… 도대체 누가 헤론을 죽였던 걸까?" 레버넌트가 대답했다. "애초에 이곳을 아는 것은 우리나 리플레이서 밖에 없어. 아마… 쓸모없어진 헤론이 내부정보를 털어놓기 전에 처치했던 것일지도 몰라."


 리코리스가 왠지 납득이 되질 않는다는듯이 말했다. "그래? 정말 그럴까?"


 입수했던 정보에 따르면, 헤론은 반항적이지 않았고 무능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악행이긴 하지만, 하란 대로 전부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어째서 죽일 필요가 있었나?


 그때,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헤론의 시체 옆에 놓여진 편지를 루시드가 주웠다.


 모두의 눈길이 그녀에 향하고, 그녀가 그것을 읽었다. "귀찮은 코핀 컴퍼니 자식들. 세실리아를 보냈다. 이걸 듣고…" 루시드가 이어서 말했다. "음… 이 다음은 피에 젖어서 잘 보이질 않아요."


 그러자 릴리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그 사람… 설마! 그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게 모르는 레버넌트는 물었다. "그 사람? 잠깐, 그 사람이 대체 누군데?"


 릴리는 그 말에 대답하질 않고, 당장 자동운행을 시킨 함선을 부르면서 외쳤다. "지금 당장 코핀 컴퍼니로 돌아가야합니다! 주인님과 회장님이 위험에 처했어요!"



 .

 .

 .



 같은 시각….


 마치 헤이안 시대부터 있었던 듯한 일본 고성. 안에는 등불이 켜졌고, 여성의 그림자가 문을 통해서 보였다. 그리고 그곳을 찾아온 다른 핑크빛 머리의 여성. 거울세계의 심장부에서, 그리고 과거 오로치 자신이 제일 추억하던 그 장소에서… 데몬 타입 침식체의 무녀의 몸을 취했던 오로치는, 리플레이서 비숍을 탐탁지 않게 느끼는듯 보였다.


 "인간의 세상도 이리도 강해졌다니…." 문의 안 쪽에, 중얼거리듯 여성이 말했다.


 "아니, 오히려 당신이 약해진 거예요."


 비꼬듯이 웃는 비숍에게 왠지 기분 나빠진 오로치가 말했다.


 "건방진 인간 계집애… 이 몸의 잠을 깨워놓고 감히…."


 "강한 척 말하셔도 딱히 무섭지도 않네요… 후훗, 오로치는 신성의 힘을 가지는 존재. 다만, 그 그림자로 변한 몸을 육체로 취하는 동안 당신의 힘도 완전하진 못하겠죠."


 "…리플레이서라 했던가? 어차피 네녀석들이 원하는 건 첩의 힘이 아니었느냐? 그렇게 혓바닥을 놀려서 좋을 것도 없을텐데?"


 "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


 오로치는 귀찮아졌는지 물러냈다. "흥, 지루해졌다. 가보거라, 졸립구나."


 "그럼 이만…. 내일 뵙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고 나간 리플레이서 비숍.


 '…역시, 멋대로 깨워서 그런지 일할 의욕은 보이지 않네요.'


 '결국 이렇게 될 줄 예상은 했다만… 어쩔 수 없죠. 원래부터 저 나름대로 할 거라고 생각은 했었으니까."


 뱀이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는 비숍이 떠난 뒤에도 그 방에서 계속 들렸다.


 그 다음날….


 나나하라 저택.


 아침부터, 오늘 어떻게든 오로치를 끝내기로 결정하고 바로 알비온을 타고 거울세계로 넘어왔었다.


 사실 나나하라 가문에도 함대 수준으로 전함을 보유하긴 했지만, 알비온의 은폐장을 통해 좀 더 뛰어난 전술적인 및 전략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에 그런 결정을 했다.


 지금 함선에 탑승한 인원은 전부: 엘리자베스; 버넷; 라이언; 모건; 한솔; 아키; 에이미; 치나츠; 치후유; 미나토; 마사키.


 하지만 왠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치나츠.


 대체 무엇 때문일까. 확실히 그녀가 짐작했듯, 어제에 치후유와 한솔이 가보았던 그 마을엔 반대로 아무도 없었다. 어제까지 분명 침식체가 됬던 오니무사들은 전부 사라졌고, 마치 폐가처럼 변해있는 광경.


 "언니, 아래를 보시죠. 어제 제가 한솔 공과 왔었을땐 침식체로 타락했던 무사들이 잔뜩 있었습니다만…."

 "그래… 없구나. 대체 뭘까, 이 느낌은? 너무나 불안하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주를 호위하는 무사로서 어떤 다가올 위협이라도 막겠습니다."


 함선에 앉아서 눈을 감고 집중하려던 치나츠는, 결국 아무것도 느끼질 못했는지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바람이 느껴지지가 않아… 치후유, 너는 느낄 수 있니?"

 "무리군요. 저는 애초에 언니에 비해 그런 감각들이 예민하지 않습니다."

 "어쩔까… 내려가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까?"


 치후유는 잠시 고민했다.


 분명히 어제까지 넘쳤던 침식체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실은 오로치가 이미 도망쳤던 것일까?


 그럴리가 없다.


 게다가 어제는 리플레이서 비숍이라는 의외의 적하고 마주쳤었다.


 하지만… 어제에 말한대로였다. 요괴들을 모두 지휘하는 오로치를 제압하면, 리플레이서는 결국 본진으로 도망칠 것이고, 더이상 이곳이 위협을 받을 일조차 없게 되겠지.


 '그것이 전부일 터이다.'


 치후유는 마음을 다지고 치나츠에 말했다. "이제까지 했던대로, 당주님의 호위는 제가 계속 맡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펜드래건 공과 한솔 공을 중심으로 각기 인원들을 붙여 오로치를 찾도록 하는 것이 좋겠죠. 두 분 모두 오로치가 습격해도 대등한 싸움이 가능한 분입니다."


 치나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안이구나." 그리고, 그 제안을 엘리자베스와 한솔에 물었다.


 십 분 뒤….


 한솔은 미나토와 마사키랑 에이미랑 함께, 엘리자베스는 로이와 라이언과 모건과 함께, 치나츠는 치후유와 아키랑 움직이기로 했었다. 에이미가 한솔하고 같이 간다 스스로가 결정했던 것은 의외였는데, 아무래도 셋은 수색력이 매우 떨어져서 그녀가 따라 붙기로 한 것 같았다.


 한솔은 남쪽으로 가서 그 뒤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올라와서 다시 동쪽으로 귀환.

 엘리자베스는 동쪽으로 가서 북쪽으로, 이후 서쪽으로 가서 남쪽으로 내려오며 귀환.

 치나츠는 이 중 오로치를 탐색하기 제일 유리하니 본인 스스로가 판단해서 움직이는 걸로.


 대충 말을 맞춘 모두는 그렇게 셋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등에 날개를 편 채 걷는 엘리자베스와, 소총과 주먹을 꽉 쥐고 집사처럼 뒤에 따라오는 다른 둘. 방패와 사슬을 꽉 쥐곤 그녀의 옆에 따라 붙던 로이가 말했다.


 "리사, 어제 싸울 때 보니까 꽤 강해진 것 같던데."

 "…나 따위에겐 어울리지 않는 힘이야."


 아직도 책임을 느끼는 것일까.


 리사가 말했다. "나 말야… 어쩌면 내가 기관장이 되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생각해."


 얘는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다. 그것을 잘 아는 로이도, 모건도, 라이언도,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침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걷는 리사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한 로이가 말했다. "후회해도 어쩔 수 없어. 애초에 왜 너한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누가 기관장이 됬더라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하지만 네가 됬다면… 그리고 나 때문에 아직도 아프잖아."

 "또 그 얘기야? 아프지 않다고. 게다가 네 탓도 아냐."


 로이는 왠지 짜증내는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너보다 멍청한 내가 기관장이 됬었다고 달라질 게 있을 거 같아? 모든 건 그냥 그 늙어빠진 용이 말도 없이 혼자 나갔다가 죽어버린 거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자신도 그렇게 심한 말로 표현한 게 찝찝하게 느껴져 기분 좋진 않은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네가 목소리처럼 우릴 잘 이끌면 될 거 아니야."


 "노력할께."

 "…넌 노력할 필요도 없어. 지금도 잘하고 있으니까."


 …….


 그 뒤, 다시 어색한 침묵에 빠진 둘.


 결국 치나츠와 다시 합류하게 될 때까지 딱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같이 수색해 보자는 의견에 따라서 걷는 모두.


 아직도 그 생각을 떨칠 수 없던 건지, 아니면 자신의 우울한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 건지,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나나하라 씨… 저희 쪽의 성수이자 고대종인 오래된 목소리는 가문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치나츠가 이쪽을 쳐다봤다. "오로치라는 성수는 어떠한 존재였나요?"


 그녀는 바로 뭐라고 말하려 했다가, 이내 생각을 정리하듯 머리를 기울였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생각해보면 매우 가련한 존재일지도 몰라요."


 마치 옛날 얘기를 하듯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리까는 치나츠. 어쩌면 폐허가 된 고대 일본의 모습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공기를 감는 느낌에, 옆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걷고 있었던 아키는 물론이고, 이런 이국적인 분위기에 생소했던 모건이나 라이언도 왠지 그런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이 땅은 예전부터 거울세계의 요괴들로부터 계속된 침공을 받았습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모르지만, 오니들은 자신들이 과거 이 땅의 주인이었는데 인간들에게 땅을 뺐겼었다고 했었죠. 우리의 선조들은 반대로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인간들과 요괴들은 공존하려고 했었습니다. 다만… 인간들의 탐욕과 야망에 의해서 요괴들은 전부 내쫓기게 됬습니다."


 인간들의 탐욕과 야망이란 말에서 살짝 거부감을 느낀 로이였지만, 딱히 아무런 소리도 않고 계속 들었다.


 "백귀야행… 그렇게 내쫓긴 모든 요괴들은 다시 이 땅을 탈환하기 위해서 기나긴 주기를 반복하며 많은 덴노들과 싸워왔습니다. 하지만 원념에 휩싸여, 거울세계로부터 계속해 밀어닥치는 군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많은 음양사들이 부적과 의식을 통해서 그것을 막으려고 했었지만, 애초 지옥의 힘은 그들에게 더욱 익숙했던 것이었습니다…."


 치나츠는 자신도 모르게 슬픈 목소리를 내면서 말했었다. "그리고… 그때에 한 소녀와 함께 하였던 수호신이… 바로 오로치였습니다. 많은 무사들이 그녀를 따라나서, 그녀 스스로도 수호신의 힘을 빌어 거울세계의 문을 영원히 닫으며 이 땅을 요괴들로부터 지켜내었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많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덴노는 그녀를 시기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다른 무녀들도 그녀를 질투했습니다. 그들의 증오는 날이 갈 수록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덴노는 그녀가 사실 요기를 품고 있었다며 모함하여 살해하려 했습니다. 그녀의 몸에 깃들은 오로치는 이면세계로 같이 도망쳤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그녀는 오로치에게 자신의 몸을 부탁하며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몸에 혼자 남게 되어진 오로치는… 그 날 이후로, 단지 복수심에 불타는 요괴로 변하여… 다시금 이 땅을 처벌하려고 스스로 거울세계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 얘기를 옆에서 듣던 치후유는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았다. 치나츠는… 단지 쓸쓸한 듯 말했다.


 "그녀의 후손이 바로… 저희입니다."


 엘리자베스는 그 얘기를 모두 듣고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공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로치란 그런 존재였었구나, 왠지 싸워서 죽여야만 한다는 적으로 알았었던 오로치에게 왠지 미안한 감정마저 들었다.


 "정말… 안타까운 얘기네요."


 잠시 말을 잊은 치나츠는, 이내 결심한 눈을 뜨고서 말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었어도, 인간으로서, 많은 사람들과 아이들을 죽인 그녀의 행동은 용서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제 피와 바꿔서라도… 이 땅의 평화는 지켜내야만 합니다."


 치나츠의 옷은 죽은 바람에 나풀거렸다. 단지 이 적막한 회색 공간에… 원래부터 가라앉은 분위기는 마치 슬픈 일본의 동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마저 들게 되었다.


 일행은 조금 걷다가, 그대로 보이는 폐가의 쪽마루에 앉아서 쉬기로 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곳의 근처를 더 둘러보고 싶다고 했었었다.


 그로부터 잠깐 지났는데….


 쪽마루에 앉아 쉬고 있던 일행들은 갑자기 푸른 빛의 섬광이 온통 회색뿐인 이 죽은 차원에서 갑자기 번쩍이고 퍼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두 빛줄기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하늘 위에는 하얀색 뱀과 푸른색 용이 춤추고 있다.


 "리사! 저건… 오로치가 드디어 나타났다!"


 치나츠가 말했다.


 모건이 말했다. "으음…. 저런 속도면 총알로 맞출 수도 없겠어."

 라이언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뱀이라고 했었지만 그냥 동양의 용과 다를 게 없군요. 버넷,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사슬로 끌어당길 수는 있겠나요?"


 "…노력이야 당연히 하겠다만, 될 수 있을리 없잖아. 기대하지 말라고."


 치나츠가 말했다. "…저라면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네?"


 "저는 동생에 비해 검의 실력이 좋지 못하나, 대신 무녀들의 봉인술과 주술들을 배웠습니다."


 치후유가 거들며 말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언니가 저보다 도움이 될 것은 자명합니다."


 영국인이라, 주술인지 요기인지 그런 걸 전혀 모르는 로이.


 하지만 어쨌거나 이쪽이 더 능숙하겠지, 그렇게 판단한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갈라졌던 한솔들을 불러 합류하겠습니다. 치나츠 씨는 리사를 도우러 가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셋은 달렸다. 아까 어느 구역에서 어느 구역으로 갈지 서로 말했기에, 대충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던 로이다.


 그리고 치나츠 자매와 아키도 서둘러 달렸다.


 하늘에서 푸른 용과 같은 날개를 계속 펼치며, 마치 꿰뚫리는 빔과 같은 에너지 단검을 날리는 여자와, 하늘을 나는 뱀에 올라타 보주를 통해 불과 바람과 얼음과 대지의 기운을 다스리는 여자가. 마치 용과 뱀의 윤무곡을 그리듯이 하늘에서 춤추듯 싸우고 있었다.


 '어제도 싸우긴 했지만….'


 오로치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땐 단지 바람과 얼음을 섞은 우박을 썼지만, 이번엔 서로 다른 원소들을 전부 섞으면서 쓰기 시작했던 것. 오로치는 싸움 시작부터 대지에서 작은 바위들을 들어올려 엘리자베스를 향해 날리는 동시에, 거대한 토네이도를 만들어 그녀에게 보냈다.


 하지만 용의 날개는 겉치레가 아니었다. 위로, 아래로, 급강하해, 그리고 다시 솟아올라, 그것들을 쉽게 피하면서 빛의 단검들을 미친듯한 속도로 던지는 엘리자베스. 신성을 부여 받았던 이후 그녀의 전투 스타일은 아예 바뀌었다. 얼마나 던져도 탄환이 떨어질 일이 없었기에, 그녀는 마치 슈팅 게임의 비행기처럼 회피기동을 하면서 계속 발사했다.


 그러나 오로치는 그렇게나 많은 신성력의 에너지에 맞고서도 전혀 죽지를 않았다. 지치는 기색도 없었다.


 다음으로 오로치는, 보주에 손을 대더니 이내 불대문자를 쐈다.


 다만 그것마저 쉽게 피한 엘리자베스. 하지만 더이상 단검을 던지지 않고 그냥 오로치를 바라봤다.


 그에, 왠지 이상하다는 듯이 오로치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서역의 공주야."


 "당신… 지난 번엔 제대로 싸우질 않았었군요."


 "어린 아이를 상대로 본심을 보이는 어른이 어디 있겠느냐, 후훗."


 공중전에 있어 오로치의 가속력은 리사보다 높았지만 기동력은 엘리자베스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여태껏 모든 공격을 계속 피했던 리사였다.

 하지만 한 대 맞으면 바로 죽을지 모르는 엘리자베스에 비해서, 오로치는 마치 슈팅 게임 보스처럼 아무리 그녀가 에너지 단검을 던져도, 비늘을 뚫어도, 피해가 없었다. 상처가 너무나도 빠르게 재생했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타이일까…."


 "타이?"


 "스테일메이트란 말입니다."


 "스테일메이트?"


 외국어 자체를 잘 모르는 오로치는 단지 그게 뭐냐는 듯이 되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말했다. "무승부란 뜻입니다. 당신은 저를 맞추질 못하고, 저는 단검을 던져 맞춰도 죽이질 못하니까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혹은 재밌다는 듯이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오로치.


 "너희들 나라의 말을 첩에게 해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흠… 무승부라, 그것도 그런 것 같구나. 솔직히 말해 첩도 아까 전부터 힘 좀 썼지만, 네녀석의 날개가 너무나도 빠르고 민첩해서 맞추질 못하겠더구나."


 그걸 시원하게 인정하는 오로치를 보고, 왠지 엘리자베스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런 여자가 이제껏 증오를 품은 괴물이라고…?'


 오로치가 물었다. "적으로 만났지만 인사를 할 예의가 있었던 네녀석이었다. 어떠냐? 첩의 질문에 잠시 귀를 기울여줄 수 있겠느냐?"


 엘리자베스는 손에 들었던 에너지 단검을 공중에 던져 흩날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치가 그 모습을 보고 왠지 기쁜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호라, 네 녀석이 가진 그 기운은… 신성이다. 어떠냐? 맞췄지?"


 갑자기 어린아이 같이 신난듯이 묻는 오로치. 그냥 별 생각없이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당신도 일찍이 신성을 가진 성수니 아마도 알아보셨겠죠."

 "그러하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네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느니라. 아니면 뭐하러 내가 봐주었겠느냐? 그래서 궁금해지더구나. 너는 그 신성을 어떻게 얻었느냐? 혹시 출생의 권리로서 받았던 축복이느냐?"


 "네? 날 때부터 타고난… 그런 게 가능한가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서쪽 대진이란 나라에선 그런 게 자주 있었다고 하더구나. 그냥 유언비어였는지 첩은 모르지만… 어쨌건, 네녀석은 그게 아니란 말이로구나?"


 "저희 펜드래건 가문에는 과거 저희에게 조언을 해주던 고대종이 계셨습니다. 최근… 마왕 가아그셰블라에 의해 떨어지셨죠. 그 분은… 마지막 순간에 이 유산을 물려주셨습니다."


 다시 떠올리자 왠지 착잡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어서 눈길을 돌리며 말하는 엘리자베스.


 그러자 오로치는 그녀의 표정을 읽고서 왠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마왕이라… 그것 또한 슬프구나. 과거, 우리 고대종들이 힘을 합쳐서 이 요사스러운 괴물들에게 대적한 때가 있었느니라. 지금은… 나조차도 과거의 성수라고는 할 수 없게 떨어졌으니… 이젠 정말로 아무도 없구나."


 "잠깐… 설마? 당신은 그를 만나본 적이 있나요?"


 "발이 네 개, 몸에는 비늘이, 등에는 날개가 달린 녀석이었지? 그렇지 않느냐?"


 "설마… 오래된 목소리와 당신은 친구였는지…?"


 그러자 오로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즐거워하는 모습.


 "하하하, 그 녀석은 진짜 그 이름을 썼구나! 가네샤도 그런 촌스러운 이름은 쓰지 말라고 웃었는데 말야!" 그렇게 킬킬 웃더니, 갑자기 엘리자베스와 똑같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얼굴을 돌렸다. "그래… 가네샤도. 그리고 바다 건너 동쪽의 대륙으로 건너간 코아틀 녀석도. 그리고 그 녀석도… 이젠 아무도 없구나."


 "……."


 어째서?


 막상 얘기를 해보면, 나나하라가 이야기해준 괴물의 느낌과 너무나 달랐다.


 '이런 여자가 침식체를 보내어 우릴 공격했다고…?'


 어젠 전혀 어떤 대화조차 없이 무작정 공격한 그녀다. 그렇지, 그때도 고작 시험을 해보려던 것이라고 본인 스스로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체 뭐지?


 이 여자의 진심은 뭐일까?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왜 싸우는 건가요?"


 "오야?"

 "세월이 흐르며 그때 천황이 지었던 죄는… 현세의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도 없습니다."


 오로치가 아예 경계를 풀고, 지금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치나츠들을 보면서 말했다. "나나하라의 젊은 딸이 말했구나, 그렇지 않느냐?"


 "……."

 "참 입도 싸구나. 현 당주 녀석은… 이제 와서 그런 과거가 무슨 의미라도 있겠느냐."

 "그렇다면…?"

 "착각하지마라. 요괴에게는 요괴의 길이 있는 법이다. 너희 인간이 어떤 이유든지 만들어서 전쟁질을 하듯, 요괴들도 나름대로의 숙명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요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첩을 유일한 대요괴로 받들고 있는 것을 못 보았느냐? 신처럼 숭배를 받는 자에겐 신에 가까운 책임과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니라… 본인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과거에 그들을 이용했던 첩이,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지."


 "당신은… 나나하라의 당주도 심판하고 싶습니까?"

 "……."


 나나하라 가문.


 오로치에게 있어선, 그 무녀가 자신에게 남겨둔 마지막 유산. 하지만….


 뱀이 입을 벌리며 번개를 엘리자베스의 옆으로 쏘았다.


 가만히 있었던 그녀의 옆으로 거대한 전기의 기둥이 파지직하며 지나갔었다. 그리고, 표정을 억지로 감추려는 듯이, 오로치가 말했다. "에이이, 얘기를 너무 길게 했구나!"


 "와라, 첩은 지금 네녀석에게 모든 수를 보였다! 서역의 전사도 정정당당한 싸움을 좋아하겠지? 오는 게 좋아! 첩을 무찔러봐라!"

 "…역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일까요."


 하하하, 그렇게 웃던 오로치. 그런데, 갑자기 밑에서 왠지 모를 부적들이 날라왔다.


 "이건…?" 엘리자베스는 당황해서 버릇대로 빨리 움직였지만 딱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밑에서 날라온 부적은 사실 치나츠가 오로치를 향해서 던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칫… 무녀들은 옛날부터 이런 하찮은 수를 썼었지!"


 뱀이 번개를 내뿜은 직후, 매우 느리게 꾸물꾸물 움직여 결국 피하지도 못하고 사방에서 감싸듯이 날라오는 부적들을 맞은 오로치.


 그리고… 자세를 잡지 못하고, 뱀은 기우뚱거리더니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설마… 치나츠 씨가 날리던 저 스크롤들의 힘인가? 아니… 잠깐!"


 치나츠를 향해 힐긋 눈길을 돌릴때, 하늘에서 내려보던 그녀의 눈에는 갑자기 핑크빛 머리의 자객이 그녀들을 향해 타닷타닷 다가오는 것이 보였었다. 그리고 위에서 소리쳤다. "치나츠, 위험해!"


 밑에 있던 치후유는 그 소리를 듣고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막듯이 급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꺄, 꺄악! 자, 잠깐… 살려…!"


 소리를 지르는 아키.


 리플레이서 비숍은 치나츠가 아니라 아키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몸에 주먹을 꽂고는, 그대로 기절시켜 업고서,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큿… 이런 불찰이! 안 돼…."


 어째서 아키를?


 비숍의 행동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의문점만 남겼다.


 어째서 자기도 언니도 아닌, 이 중 어떤 영향력도 없는 아키를 굳이 공격하고 또 잡아갔던 거지?


 하지만 그게 어쨌건, 오로치에 집중하던 치나츠가 엘리자베스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리사 님! 오로치가 땅을 파고 도망치고 있습니다!"

 "저건… 안 되겠어요."


 땅에서 몸을 비비며 부적들을 떼어내고 바로 기어 들어가는 흰 뱀.


 뱀을 제압할 화력이 없던 엘리자베스는 보고도 어쩔 수 없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진 오로치를 보며, 단지 날개를 천천히 접으면서 치나츠의 옆으로 내려왔다.


 몇 분 뒤, 로이가 한솔들을 데려올 땐 아키가 잡혀갔고, 오로치는 놓쳤다는 말에 한솔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치후유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하도록 애쓰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매우 이상한 점은….


 지금껏 이 난리를 피우는 동안에도, 어떤 다른 침식체도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하늘에 날아 올라 오로치가 있나 없나 혼자 찾아보았지만… 결국 어디서도, 어떤 것도 찾질 못하였다.


 결국 일행은 여러가지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접고서, 다시 알비온에 올라타곤 나나하라 영지까지 귀환했다.


 그날 밤에….


 자면서 몸을 뒤척이던 치나츠는, 갑자기 차갑게 부는 바람을 느끼고는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자신의 단아한 머리칼을 쓰다듬고 바깥을 본 그녀는 여자가 서있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오로치였다.


 "야마타노오로치… 어떻게 이곳에?!" 그렇게 노려보며 손을 더듬어 칼을 찾으려고 했었던 그녀의 뒤에는 이미 뱀이 혓바닥을 내밀며, 마치 강아지처럼 그녀의 손등에 대고 얼굴을 부볐다.


 "……?"


 전혀 이해하질 못한다는 듯이 그녀와 뱀을 쳐다본 치나츠. 문에 한 쪽 팔을 기대고 왠지 언니처럼 쳐다보던 오로치는, 웃으면서 등 뒤에 숨겼던 팔을 보였다. 술병이 쥐여져 있었다.


 "마시지 않겠느냐? 오랜만에 귀한 술을 꺼내왔느니라."


 잠시 망설였지만, 오늘 엘리자베스가 전해준 말을 듣고서 왠지 모르게 그녀를 알지도 못하고 미워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치나츠였다. 그래서 이불을 걷고 그대로 나가, 그녀와 같이 쪽마루에 앉았다.


 처음에 차갑다고 느껴졌던 바깥 바람은 시원한듯… 아니면, 어째선지 따뜻한듯 느껴지기까지 했었다. 별들이 묻힌 밤하늘마저도 왠지 더욱 밝은 듯한 기묘한 느낌이다. 이미 술잔을 따른 오로치가 치나츠에게 건네었다. 마실까 말까 고민한 치나츠는, 우아하고 기품있게 받아서 마셨다.


 아리따운 목소리로 하얀색 소매를 너풀거리던 오로치. 그리고 뱀을 불러서 무릎에 앉혀 쓰다듬으며 말했다.


 "옛날 이 나라 사람들은, 싸움이 끝난 뒤에 친구도 적도 무기를 내려놓고 술을 마시던 풍습이 있었지. 전부다 사라졌구나."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내 잔을 한 번 받았으니 어떤 질문이든 답해주마."


 치나츠가 물었다. "…인간들이 밉습니까?"


 "그랬었지. 지금도 그렇지. 그렇지만 너희 인간들은 재미있는 녀석이야."

 "…그건 대답이 되질 않는군요. 왜 오랜 역사에 걸쳐 저희들을 괴롭혔나 여쭈어봤던 것입니다."

 "어허."


 장난스럽게 쯧쯧하던 오로치는, 비운 술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술을 들면서 말했다. "한 잔 더 받거라. 그러면 또 하나의 질문을 들어줄테니."


 치나츠는 술잔을 다시 비웠다.


 "당신은 우리가 밉습니까? 죽이고 싶을 정도로?"

 "……."


 오로치는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


 "……아니."

 "거짓말이군요."


 그러자 오로치가 말했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네가 어렸을 때 쫓아와 이 땅을 잿더미로 만들었겠지. 그리고 옛날에도 그럴 수 있던 때는 엄청나게 많았느니라. 왜, 바다 건너의 몽골과 한국이 같이 침략한 때나, 아니면 내전으로 땅이 황량해진 때도 많았단다. 모르겠느냐?"


 그리고 술병을 주면서 말했다. "이번엔 네가 따르거라. 내가 묻고 싶구나."


 "……." 침묵하던 치나츠는 오로치의 잔에 따라줬다. 그리고, 잔을 비웠던 오로치가 물었다. "너는 이 땅을 어떻게 하고 싶느냐?"


 "지키고 싶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 당연하지. 한 잔 더 따르거라."


 그리고 홀짝거리며 술을 맛보던 오로치가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키고 싶으냐?"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오로치는 마치 어머니가 딸을 보는 듯한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진짜 딱하구나, 너는. 그러면서 계속 고민하는 꼴이라니." 그것은 과거 자신이 수호신이었던 시절에, 나나하라의 초대 무녀에게 지었던 그 표정과 비슷했다.


 오로치가 조용히 말했다. "네 동생을 보거라."


 "치후유는 분명 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검의 길을 좇는 자에게 허락된 강함.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망설임이 없는 길입니다."


 "호오?"


 "당주된 자로서 그런 길을 좇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길이란… 당주의 책임과 의무를 내려놓지 못하는 저에게는 허락된 강함이 아닙니다."


 "오호라, 그러면 당주란 무엇이냐?"


 그러자 치나츠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문들의 수장이 된 자로서, 모두의 바램에 맞는 무녀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자 오로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지, 그건 네가 상상한 의미한 당주다."


 "…네?"


 "시대가 지나며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단어의 의미를 까먹지. 너희도 같구나!" 그렇게 깔깔거리며 웃는 오로치를 보면서, 치나츠는 왠지 무언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아둔한 나나하라의 딸이여, 초대 당주가 그런 것을 신경썼겠느냐?"


 "……." 치후유는 그 말을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질 못했었다. 오로치의 말은… 왠지 틀리지 않게 들렸었기 때문이다. 그 표정을 보던 오로치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오늘 술은 너 가지거라. 달밤이 참 맑구나. 이런 탁해진 구름을 안주로 삼으며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당까지 내려온 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생각해 보거라. 그때에 당주란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이었는지. 다음에 우리가 만날 땐 둘 중 한 명은 죽겠지. 제대로 된 대답을 듣고 싶구나."


 그렇게 말하곤, 뱀은 소리도 없이 동양의 용처럼 공기와 하늘을 가르며, 오로치를 태운 채로 사라졌다.


 쪽마루에 앉아 아직도 차가운 술을 한 손으로 잡던 치나츠는,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진정한 당주의 길….'


 다음 날.


 아침에 모두를 불러서 다시 알비온을 타고 오로치를 쫓기 위해 움직였다. 다만, 이번에는 왠지… 치나츠가 오로치가 있는 곳이 알 것 같다며 확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은 바로 거울세계의 나나하라 영지. 그곳에는 아침부터 바람을 쐬고 있듯이, 오로치가 단지 마당의 주위를 산보하듯 걷고 있었다.


 알비온이 내릴 때까지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질 않았다.


 치나츠는 내리자마자 동생에게 말했다. "치나츠. 오로치와 저는 일기토를 할 겁니다. 만일 제가 패하게 된다면… 나나하라 가는 그대의 손에 달리게 됩니다."

 그러자 치후유가 당황하며 말했다. "잠깐, 무슨 생각이십니까? 반대합니다! 저는 당주님의 검, 만일 베어야 할 적이 있다면, 제가 앞에 서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치나츠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치후유, 나의 동생…."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이것은 나나하라 가문에 내려져 왔던 숙명입니다. 오늘 그것을 꽃피울 날이 되었습니다. 이 땅 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위험한 지금에… 오랜 원한에 대해 결착을 낼 때가 왔습니다."


 "당주님…."

 "그렇다면, 부탁해요."


 안심하라는 듯이 살짝 웃어준 치나츠는 이내에 진중한 얼굴로 바뀌며, 오로치를 향해 다가갔다. 오로치는 보주를 쓰려고 하지도 않은 채로, 옆에 있었던 뱀이 칼집을 토하게 한 뒤, 그것을 집고 칼날을 뽑으며 말했다.


 "그래, 어떻더냐? 나나하라 가의 당주로서 나를 벨 각오는 됬느냐?"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그러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와 칼을 내리치는 오로치. 하지만, 그 치후유의 언니는 맞았는지, 검집에서 칼날을 뽑으며 그 자세로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치나츠가 외치며 오로치를 밀쳤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때 초대 무녀가 꿈꾸던 이 땅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


 뒤로 발을 뛰었다가, 이번에는 치후유의 배를 향해 오른쪽에서 베는 오로치. 그리고 말했다. "초대 무녀는 요괴를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살았다. 그대도 나를 없애는 것으로서 이 재앙을 끝내려 하지 않느냐?"


 그런 칼날을 검집으로 막은 치나츠가 말했다. "그게 사실이 아니란 것은 누구보다도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계속 칼날을 주고 받으면서 말했다. 때로는 베고, 때로는 찌르고, 그러면서도… 뭔가 오로치가 봐주듯이, 그녀는 치나츠의 공격을 쉽게 막으면서도 뭔가 느릿한 속도로 팔을 휘두를 뿐이었다.


 "표면적인 이야기와 달리, 나나하라 가에는 당주에게만 전해져 오는 비밀이 있습니다. 초대 무녀가 숨긴 일기입니다. 거기에 적힌 사실은… 원래는 요괴들은 인간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 그들 자신의 요기로 인해 쉽게 타락한 그들은 다른 요괴와 인간을 해쳤다…."


 "……."


 "그 타락은 지금 현 세대의 사람들이 말하는 침식파입니다. 침식체로 변한 무리들로부터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침식체조차도 불쌍히 여기어 언젠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계속된 싸움에 지친 인간과 요괴를 위해, 나나하라의 당주는 오로치하고 계약해 침식체로 변한 요괴들을 거울세계로 보냈습니다."


 "……."


 "하지만 덴노는 남아있는 요괴들을 죽이거나 쫓아내려 했었습니다. 이때, 그들을 동정한 초대무녀는 요괴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일기는 거기까지입니다. 그리고 역사에 감춰진 사실은, 무녀와 요괴들은 덴노의 무사들에게 참패했었고, 이미 신격화된 무녀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를 두려워한 당시의 사람들은 결국 거짓된 진실을 만들어냈습니다…."


 치후유는 그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단지 치나츠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것은 그녀도 몰랐던 사실. 그리고….


 어째서 덴노와 다른 무녀들이 질투했던 나나하라 가문이 이제까지 존속될 수 있었는지, 그것에 대한 해답.


 또한, 옛날엔 전혀 설명할 수 없었던 침식병에 대한 모든 불안과 공포를 단지 요괴에게 떠넘긴… 슬픈 과거.


 "다시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는 그런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세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해…!"


 오로치는 단지 치나츠가 치는 칼날을 계속해서 받기만 할 뿐이고, 딱히 공격을 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의 말을 계속 들으려고 하기 위해…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심장을 찌를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팔을 서서히 늦췄다.


 "그게, 저에게 있어서 나나하라의 당주란 의미입니다!"


 찌를듯이 다가오는 칼날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오로치가 잡고 있었던 칼을 날려버렸다.


 튕겨져 나간 칼날은 땅에 박혔다.


 그리고, 오로치가 뭔가 모든 감정에서 벗어난 해탈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훌륭하구나… 자, 베어라. 이 목은 너의 것이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호오? 왜 그러느냐? 마지막까지 날 설득할 수 있겠느냐?"


 "왜냐면… 왜냐면, 초대 무녀가 여기 서있었어도, 설령 당신을 몰랐다고 했어도… 저랑 같은 선택을 했을테니까요."


 그 말을 듣고.


 오로치는 조용히 거울세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같은 것은… 진작에 죽어야만 했었지. 다른 요괴들은 나를 그들의 신처럼 생각했었지만, 나는 나 자신의 복수심에 빠져서 그들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었으니까… 너희의 초대 무녀는 나에게 그런 유언을 남겼지. 인간들을 미워하질 말고, 앞으로 그들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너무나 아꼈어. 그런 상실감에 빠져… 성수라고 불려지는 이 몸은 타락한 괴물들이랑 다를 것도 없어져 버렸지…."


 그리고 조용히 이어서 말했다.


 "어느날, 꿈에서 그 아이의 얼굴이 보이더구나. 하지만 나는 그것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지.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는 자격은 이미 없다고 생각했기에…."


 치나츠가 조용히 칼날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당신은… 자신의 죽음으로 이제까지의 죄를 씻어내려고 했었군요. 바로 그녀의 피를 잇는 저의 손에 의해 모든 것을 끝내는 것으로…."


 "…다른 요괴들은 전부 보내버렸지. 이곳에 묻히는 것은 나 혼…"


 그때였다.


 멀리서 탕, 하고 쏘아진 저격총 소리.


 그때에 오로치는 그것이 어디로 쏘아졌는지 알고 있었다. 급하게 몸을 던져서, 자신의 옆에 서있던 치나츠 대신에 맞았다. 그리고 치나츠를 포함해, 그 광경을 보았던 모두가 놀랐다.


 사실 매우 가까운 저편에, 리플레이서 비숍이 저격총을 들고 계속 기회를 보고 있었던 것.


 그것 뿐만이 아니었었다. 요괴들은 없었지만, 침식체로 변한 오니무사들이 주위에서 스멀스멀 나타나고 있다. 리플레이서 비숍은, 옆에 아키를 세워둔 채로, 웃으면서 손짓을 하였다. 곧 몇백 명은 되는 무사들이 이쪽으로 돌진했다.


 "시, 실수했구나… 저 간악한… 잡종년한테… 빈틈을…."


 자신이 상황을 제어하지 못했던 사실이 분했는지, 오로치는 피를 토하면서 말했다. 그녀의 수족과 같은 뱀조차 왠지 머리를 세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로치… 아니, 오로치 님…." 왠지 자신이 초대 무녀가 된듯한 기분을 느끼며, 모든 오해가 풀린 치나츠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로치의 손을 움켜잡았다.


 "나나하라의 딸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구나….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노라…."


 "…무엇인가요?"


 "나를… 다시 받아들여줄 수 있겠느냐?"


 치나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로치가 치나츠의 손을 자신의 심장에 갖다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리며 푸른 날개를 펼친 뒤에, 곧바로 리플레이서 비숍을 향해 뛰어오르며 단검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비숍에게 외치듯이 소리쳤다.


 "저 오로치는… 제 단검을 여러번 맞고서도 버텼어요! 고작 저격총이 대체 어떻게 저런 파괴력을 가질 수 있죠?"


 비숍이 라이플을 들어올려 막았다. "이건 그냥 저격총이 아니야. 탄환도 그렇고…." 그리고 에너지 대거를 맞았던 저격총은 그대로 부숴졌다.


 "…뭐, 부숴졌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야."


 비숍은 그렇게 개인 은폐장을 키며 갑자기 사라졌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기운을 감지하려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알비온의 은폐장이 풀리면서 땅에 추락했다.


 리플레이서 비숍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면서 전함에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닌, 일행들에게 칼을 세우면서 가까이 다가가는 오니무사들. 그 모습을 보고서 라이언이 모건에게 외치듯 물었다.


 "모건, 지금 이탈할 수 있겠나? 알비온의 상태는 어떻지?"

 "안 되겠는데… 엔진이 완전히 당했어. 자동수복으로 맞춰놔도 앞으로 세 시간은 있어야 다시 날 수 있고."


 그러자 라이언의 옆에서 마사키가 화염을 불태우며 말했다. "헷, 재밌겠군! 혹시 할아버지들은 겁나거나 그렇진 않겠지?" 그러자 라이언이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 패기가 좋은 젊은 친구군요. 아직 어린 사람들에게 지지 않습니다." 마사키가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진짜 그 말이 맞는지 보자고!"


 그리고 팔을 그대로 휘두르며 외쳤다. "먹어라!" 그렇게 보라빛 불꽃이 땅을 타고 오니무사들을 향해 날라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뒤에서 화살이 날라갔다.


 "궁도부 연습을 일상으로 했으니까… 이 정도는 무섭지도 않아!" 뭔가 얌전한 말투와 달리 상당한 기백이 느껴지는 미나토. 그리고 그 옆에서 치후유가 칼을 뽑으면서 말했다. "두 분은 여기서 언니를 지켜주십시오!"


 ""아아, 알겠다고!""


 미나토와 마사키의 대답을 동시에 들으며, 단신으로 뛰쳐나가는 치후유.


 상대와 가까워지는 거리를 재려다가, 갑자기 옆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꿰뚫듯이 날라와 적들의 얼굴에 꽂히는 걸 보았다.


 '사슬…?'


 뒤에서 로이가 사슬로 오니무사를 치고 방패로 공격을 막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치후유 씨, 너무 앞서 나가면 나중에 위험할 때 구해주기 힘들다고!"


 그 말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무사에게 있어, 실수는 후회가 아닌 만회를 위한 목적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옆에 있는데도 지킬 수 없던 아키.


 한솔하고 코핀 컴퍼니에 폐를 끼칠 수는 없는 거다.


 더욱 각오를 다진 치후유는 눈을 매섭게 뜨며 말했다. "로이 공은 이곳을 맡아주십시오."


 "크윽… 잠깐! 가지 말라니까!"


 다가오는 오니무사를 역으로 걷어차고는 날카로운 방패로 찍으면서 계속 싸우는 로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여자들은 다 왜 이런 거지?!"


 계속해서 침식체를 베어나가면서 무리하게 돌진하던 치후유.


 하지만 선두에 섰던 적들과 달리, 후방에 있던 적들은 무거운 철갑옷을 입고서 창을 세우곤 접근하기 힘들게 막고 있었다. 실력이 없는 낭인 무리인 앞의 적과는 달리, 생전에도 유명한 무사였던 그들은 치후유가 접근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한 수비와 공격을 병행했다.


 전혀 파고들 틈이 보이질 않자, 치후유가 역정을 내며 외쳤다. "칫… 귀공들은 어째서 나를 방해하는가? 어째서 그렇게나 간단히 저 악당에 회유되었나? 생전의 긍지는 전부 잊어버렸는가?!"


 무사 중 하나가 해골을 딱딱거리면서 말했다. "지금… 바깥은… 리플레이서라는… 우리와 같은… 괴물이 된 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하더군…." 눈에서 안광을 뿜으며, 그들 중 하나가 창으로 찔렀다. 하지만 치후유는 칼을 들어내어 막으며 일침했다.


 "천하구나! 단지 청렴한 긍지를 품고 주군을 섬기던 그대들이 이제는 자신만을 위해 동족을 상처입히고 하늘과 대지를 더럽히려고 하다니! 그것은 진정한 무사가 아니다!"


 "후… 후후… 후후후… 너도… 우리와 같이… 된다면… 다시금 지상을… 밟고 싶다는… 느낌이… 뭔지 알겠지…."


 '칫…! 여길 뚫을 수는 없나?'


 그때였다.


 갑자기 멀리서 뼈가 시릴 정도의 과격하고 극단적인 증오가 느껴지더니, 초록색 기운들이 그대로 오니무사들에게 쏟아져버렸다. 갑옷도 창날도 막을 수 없고, 단지 맞는대로 격노한 망각의 겁화는 그대로 그들의 상반신을 태워버리고, 서있는 다리까지도 그대로 먹어들었다.


 "한솔 공?!"


 이런 괴팍한 힘을 가진 것은 그 남자 밖에 없다. 이미 둘러쌓인 한솔은 자신의 칼로 창대와 창날에 칼날을 맞댔는데, 그것만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무사들을 초록색 잿더미로 녹여버렸다.


 "가세요, 치후유!"


 "하,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갑자기 위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허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뱀의 비늘에 올라탄 치후유.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연회색 머리칼을 가진 그 여자는 자신의 언니처럼 보였지만, 다시 볼때 왠지 오로치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느껴졌다.


 "오… 오로치? 설마, 네녀석, 언니의 몸을…!"


 하지만 치나츠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치후유."


 그리고 뱀에 탄 채로,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로치 님이… 옛날처럼 우리에게 힘을 빌려주기로 하셨어."


 "잠깐… 그게 정말입니까?"


 아직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질 않았던 치후유.


 치나츠의 입술에서 오로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우… 도움을 줬지만 미움을 받는 것도… 그때랑 같구나."


 그러자 눈 앞의 여성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언니 치나츠의 목소리로 말하였다. "후후, 설마요. 치후유가 저희를 미워할리 없잖아요?"


 그 모습에 아직 적응이 잘 되지 않는 치후유는 단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뱀은 그대로 날아서 아키가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치후유는 땅에 착지하여, 바위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아키의 몸을 잡고는 뱀의 위에 올리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당했다…! 아군을 구하기 위해 빈틈을 보일 때 습격하려고 일부러 이렇게 놓아둔 것이었구나!"


 비숍이 은폐장을 걷으며 웃는 표정을 짓고는, 그대로 클로로 베려고 했었다. 그때….


 "뭐, 뭣… 어떻게…?!"


 비숍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던 줄에 의해, 목과 양쪽 손목이 잡힌채로 멈추게 되었다.


 그것은 에이미였다. 그녀가 비숍을 막고 있는 사이에, 치후유는 아키를 뱀에 태웠다. 그리고 뱀이 다시 알비온쪽으로 떠나는 것을 보면서 목을 살짝 더 조이는 에이미. "미안, 아키는 내 친구니까. 뺏어갔을 때 조금 화났거든?" 그리고 웃으면서 더욱더 꽉 조였다.


 "큿, 쿨럭, 크… 어떻게, 에이미 당신이 벌써 여기에… 응?!"


 그때 비숍은 그걸 눈치챘다. 펜드래곤이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며 머리를 넘기고 있다.


 '설마… 은폐장을 키고 사라졌던 내가, 아키를 구조할 치후유들을 기습할 것을 알고서… 역으로 따라왔었던 건가요…!'


 사실은, 날 수 있는 엘리자베스가 아키를 직접 옮기면 더욱 쉬웠겠지.


 하지만 그걸 읽고서, 리사는 계속 상황을 보다, 시간에 맞춰서 에이미를 들곤 여기까지 날아왔던 거다.


 딱히 사전에 작전을 짜지 않았다. 하지만, 영리한 그녀는 이 상황에 동료들의 행동을 보고 최적의 서포트를 수행한 거다. 지금, 그건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완전히 읽혔단 생각에 미치자, 비숍은 왠지 분한건지 즐거운지 모를 광소를 터트리며 크게 웃었다.


 "아, 아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걸 계속 쓰게 될 줄 몰랐는데… 코핀 컴퍼니는 역시 강하군요…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런 비숍의 웃음을 뒤로 하면서 다급히 알비온으로 가는 흰 뱀. 치후유는 아키가 죽은 눈을 하고서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자, 살짝 흔들면서 아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속에는 치후유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단지 자신만이 다른 세계에 있는 것과 같이, 그리고, 잊혀진 어둠 속에서 다시 깨어난 것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에 계속 멤돌았다.


 '자, 눈을 떠보세요, 나의 오랜 친구, 아키.'


 '우리가 항상 함께 했던 나날을 당신도 영원히 추억하기를.'


 '언젠가 끝나야만 하는 세상이라면, 적어도 당신과 내가 함께 하기를.'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그렇게 머릿속에서 계속 상냥하게 울려퍼지는 정체조차 모를 소리에, 마치 아키는 머리가 부숴질 것처럼 아파 양손을 머리에 대고 신음하며 외쳤었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리고 그 목소리 자체를 자신의 목소리로 억지로 묻으려는 듯이, 계속해서….


 '넌 누구야…?!'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아…!'


 '머리가, 머리가 아파… 그만해… 제발….'


 그런 아키는 단지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가, 이젠 식은땀을 흘리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입으로 내고 있었다. 계속 그녀를 붙잡고 흔드는 치후유의 손을 치나츠가 잡으며 멈췄다.


 "치후유."

 "……."


 "빨리 모두를 돕지 않으면 안 돼."

 "…알겠습니다, 언니."


 그리고 흰 뱀은 곧, 계속해서 불꽃을 날리면서 오니무사들을 공격하는 마사키와, 칼을 든 적을 상대를 파고들어 펀치를 날리는 라이언, 그리고 멀리서 화살과 총알을 빈틈없이 쏘던 미나토와 모건이 있는 알비온까지 다시 되돌아왔다. 치나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오니무사들을 향해 칼날을 뽑으며 돌격하였다.


 한편, 비숍의 몸으로부터 부풀듯 일어나게 된 검은 괴물들에 의해 에이미의 실은 끊겼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도망을 쳤다. 그래도 침식체로 타락한 귀무사들을 상대로 치나츠들은 분전하였다. 그리고 곧, 승기가 보였다….


 같은 시간….


 인공침식파를 통해 리플레이서가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평화롭고 느긋하게 느껴지는 코핀 컴퍼니의 앞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있다. 둘은 무언가를 얘기하다, 관리자가 시계를 흘긋 보고는 말하였다.


 "이제 다 됬군."


 어머, 그런가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여 앞을 보는 지아. 멀리서부터 보이는 검은 리무진. 그리고….


 그들의 앞으로 다가와, 차문을 열고 내리는 고풍스러운 분홍빛 머리카락의 메이드.


 베로니카가 정중히 인사하였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인님."




-- EP.IV END




 이 팬픽은 먼저 썼었던 초판본을 기억에서 거의 잊혀졌던 이후 다시 읽고 편집했던 재판본입니다. 서술자의 리뷰 혹은 해설 및 작법 등에 관련된 내용을 읽고 싶다면은 이쪽의 개인 채널로 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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