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정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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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계 입문 [편집]
부정부패와 비리 수사를 통해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떨치고, 유명세를 얻었지만, 이를 통해 검찰에는 악명이 자자했으며 거듭된 좌천 끝에 결국 검사복을 벗게 된다. 이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자, 광주지검 시절 구속시켰던 조폭들이 가족을 위협하는 일이 계속되었고 잇따른 협박 끝에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어 제도권의 보호를 받고자 했다.
홍준표는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수사 등을 통해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떨쳤고, 이 당시 수많은 정치인들이 부정부패로 구속된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청렴하고 정의로운 이미지를 갖고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정치 입문의 가능성을 보여준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슨상님에게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제안받아 오찬 회동에 초청되었지만, "DJ와 식사하면 그쪽으로 안 갈 수가 없다더라"는 말을 듣고 일단 참석을 미뤄두게 된다. 이후 밤 늦게 훗날 MC무현으로도 유명해지는 노무현과 민주당 인사들이 집으로 찾아와 입당 제안을 하기도 하지만 일단 보류해두게 된다.
몇 시간 뒤,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찾아와 신한국당 입당을 권유했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해 "문민정부에서 큰 사람이 왜 야당으로 가려 하냐"라는 말을 듣고 한나라당 입당 결심을 굳혔다.
민주당 노무현은 "홍검, 그렇게 살면 안 돼요!"라고 화를 냈지만, 당시로서의 홍준표는 확실히 지켜줄 수 있는 당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세력이 미약했던 야당의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 특히나 홍준표가 보수 성향이었기도 하고.
그리하여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는 신한국당에 입당해 정계에 출사표를 던지게 된다.
2. 입법 활동 [편집]
2.1. 15대 국회 [편집]
"깨끗한 그와 함께
새로운 송파를 건설합시다!!"홍준표, 15대 총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한국당 소속으로 송파 갑 선거구로 출마해 현직 의원인 자유민주연합 조순환 후보를 꺾고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정치를 시작하면서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남에게 얽매이거나 굽히지 않는다'는 척당불기(倜儻不羈)를 좌우명으로 삼은 그는 신한국당 내의 소장파에 속했고, 노동 최저 연령 상향을 발의해 통과시키는 등 초선부터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15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고, 15대 국회 후반기에는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국회 윤리위원회 위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국회 제도개선특별위원회 위원 등을 겸했다.
1996년 9월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노동 가능 최저 연령을 만 15세로 상향 조정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1997년에는 한보 특위 담당 의원의 한 사람에 선임되었지만 일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타 의원들이 수사에 의욕이 없자 그해 3월 11일 한보특위 담당 의원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정치를 시작하면서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남에게 얽매이거나 굽히지 않는다'는 척당불기(倜儻不羈)를 좌우명으로 삼은 그는 신한국당 내의 소장파에 속했고, 노동 최저 연령 상향을 발의해 통과시키는 등 초선부터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15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고, 15대 국회 후반기에는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국회 윤리위원회 위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국회 제도개선특별위원회 위원 등을 겸했다.
1996년 9월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노동 가능 최저 연령을 만 15세로 상향 조정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1997년에는 한보 특위 담당 의원의 한 사람에 선임되었지만 일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타 의원들이 수사에 의욕이 없자 그해 3월 11일 한보특위 담당 의원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2.2. 선거법 위반과 위기 [편집]
선거운동 당시에 동협의회 총무에게 2,400여만 원의 선거운동비를 주고 사후 허위 지출보고서를 제출한 혐의로 국회의원 상실 위기에 놓인다.
당초 검찰은 불기소처분을 내렸지만, 야당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곧 이듬해 1997년 2월 21일 법원은 야당 측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1999년 3월 9일, 대법원은 벌금 5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 의원직이 상실됐으며 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하게 되었다.
당초 검찰은 불기소처분을 내렸지만, 야당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곧 이듬해 1997년 2월 21일 법원은 야당 측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1999년 3월 9일, 대법원은 벌금 5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 의원직이 상실됐으며 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하게 되었다.
2.3. 사면, 그리고 국회 복귀 [편집]
1999년 1월부터 그해 10월까지 미국 워싱턴인터내셔널센터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2000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슨상님과 영수회담을 갖고, 추경예산 편성과 남북 경협자금을 승인해주는 대신 이명박, 홍준표 등 선거법 위반 사범에 대한 사면에 합의하며 사면되게 된다.
2000년 한나라당이 출범한 뒤 한나라당 서울 동대문을지구당을 맡게 된다. 직후 2001년 김영구 의원의 사퇴로 치러진 10.25 재선거 때 동대문 을구 선거구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16대 국회의원으로 대한민국 국회에 복귀했다.
이어 한나라당 원내 부총무로 선출되었다. 16대 국회에서는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을 맡아보았다. 당무로는 한나라당 제1정책조정위원회 위원장과 한나라당 정책본부 본부장, 한나라당 동대문을지구당 당협위원회 위원장과 한나라당 전략기획위원회 위원장, 당 공천심사위원회 심사위원 등을 맡았다.
2002년 김대중의 3남 김홍걸의 미국 은행 입출금 내역을 공개해 3달 동안 23만 달러, 1달 평균 8,700만 원이라는 비정상적인 금액이 인출된 사실을 폭로하였고, 검찰이 이에 대해 수사에 들어가게 했다.
곧 검찰은 김홍걸이 최규선에게서 3억 원을 수수한 혐의를 적발했고, 김대중 정권을 뒤흔든 최규선 게이트가 터지면서 결국 김홍걸이 구속되었다. 슨상님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민주당을 탈당했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참패하면서 레임덕에 빠지게 되었다.
2000년 한나라당이 출범한 뒤 한나라당 서울 동대문을지구당을 맡게 된다. 직후 2001년 김영구 의원의 사퇴로 치러진 10.25 재선거 때 동대문 을구 선거구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16대 국회의원으로 대한민국 국회에 복귀했다.
이어 한나라당 원내 부총무로 선출되었다. 16대 국회에서는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을 맡아보았다. 당무로는 한나라당 제1정책조정위원회 위원장과 한나라당 정책본부 본부장, 한나라당 동대문을지구당 당협위원회 위원장과 한나라당 전략기획위원회 위원장, 당 공천심사위원회 심사위원 등을 맡았다.
2002년 김대중의 3남 김홍걸의 미국 은행 입출금 내역을 공개해 3달 동안 23만 달러, 1달 평균 8,700만 원이라는 비정상적인 금액이 인출된 사실을 폭로하였고, 검찰이 이에 대해 수사에 들어가게 했다.
곧 검찰은 김홍걸이 최규선에게서 3억 원을 수수한 혐의를 적발했고, 김대중 정권을 뒤흔든 최규선 게이트가 터지면서 결국 김홍걸이 구속되었다. 슨상님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민주당을 탈당했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참패하면서 레임덕에 빠지게 되었다.
2.4. 17대 국회 [편집]
2.4.1. 17대 대선 경선 [편집]
2.5. 18대 국회 [편집]
2.5.1. 한나라당 대표 [편집]
"계파 없이 홀로 뛴 선거에서 저 홍준표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대의원 동지들에게 감사드린다."
"현대조선소에서 일당 800원을 받던 경비원의 아들, 고리채 사채로 머리채를 잡혀 길거리를 끌려다니던 그 어머니의 아들이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 여러분이 보여주셨다."
2.5.2. 당대표 사퇴 [편집]
3. 19대 총선 [편집]
4. 제35·36대 경상남도지사 [편집]
5. 19대 대선 [편집]
후보 | |||
득표율 | |||
41.1% | 24.0% | 21.4% | |
|
"지키겠습니다 자유 대한민국"홍준표, 19대 대선
5.1. 낙선 이후 [편집]
5.1.1. 미국 체류 [편집]
5.2. 귀국 [편집]
6. 초대 자유한국당 대표 [편집]
7. 당대표 사퇴와 그 이후 [편집]
8. 국회 복귀 [편집]
8.1. 21대 총선 [편집]
8.2. 21대 국회 [편집]
8.3. 집으로 [편집]
9. 20대 대선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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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후보 출마의 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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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의 약속 |
자세한 내용은 국민의힘 제2차 전당대회 문서 참고하십시오.
10. 낙마, 그리고 이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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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6.35% 표차로 윤석열 후보에게 패배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청년의꿈 문서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