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스는 내가 만난 첫 번째 오로리안이야. 그때 난 바이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 뭐, 그때 그녀의 눈에 비친 나도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의 존재였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상한 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잘 몰랐는데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손발을 맞췄다는 거였지. 바이스가 내 곁에서 응원하고 힘을 준 덕분에 난 아스트라 대륙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었어.
맞아. 오랜 여정을 함께해서인지, 바이스는 가끔 말을 안 해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어. 물론 나도 바이스가 언제 어디에 나타날지 알고 있고 말이야... 바이스가 장부 때문에 잔소리하는 날들도 이제 익숙해졌어. 심지어 바이스가 곁에 없게 되는 날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어.
다행히 운명은 바이스를 데려가지 않았어. 오히려 새로운 힘을 각성할 수 있었지. 그 힘은 왠지 낯설지 않은 것 같아. 하지만 바이스의 두 눈은... 왠지 예전보다 깊은 근심을 담고 있는 것 같아. 그제서야 난 우리가 만났을 때 바이스가 「나와 넌 사실... 비슷한 점들이 있거든」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
──[조종사]

휴~ 잠깐 떠나 있었던 것뿐인데 마치 딴 세상 같은걸. 콜로서스의 방을 다시 보니까 뭔가 낯선 느낌이야...
처음 이 콜로서스에 탔을 땐 이 거대한 규모와 구조에 한참 빠져 있었어. 그때 콜로서스는 정말 깨끗했던 것 같아. 그럴듯한 가구도 몇 개 없었고, 볼 만한 장식품은 말할 것도 없었어. 근데 지금은 운치 있는 가구는 물론, 생기 넘치는 조경 식물도 많아졌어... 아무거나 하나 골라도 그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몇 분은 늘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아, 예를 들면 휴식실 의자를 어떻게 놓을지를 두고 난 [조종사]하고 3일 밤낮 동안 대토론을 펼치기도 했었어. 결국 [조종사]의 체력이 부족해서 먼저 잠들어버린 덕분에 내가 이겼지만 말이야. 아하하, 지금 떠올려봐도 여전히 재미있다니까.

나 말고도 콜로서스에는 이따금 새로운 얼굴이 보이곤 해. 저마다 입장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지만, 이 콜로서스에서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 음, 물론 가끔 소란이 일기도 하고... 콜로서스를 망가트릴 때도 있지만 말이야. [조종사]도 말로는 화내고 사람들이 거칠다고 투덜거리지만, 그래도 매번 모두를 포용해줘. 난 그게 모두가 콜로서스에 오는 걸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
여기까지 얘기하다 보니 느낀 건데... 난 전에 일루미나의 「예비 조종사」 계획에 참가해 교육을 받았고, 콜로서스를 위해 많은 계획을 세웠어. 하지만 콜로서스가 이렇게 따스한 곳이 된 건 전부 [조종사] 덕분이었던 것 같아.
좋아. 그럼 이따가 [조종사]의 방법대로 휴식실 의자를 다시 놓아볼까?

요즘 갑자기 「기억」이란 게 무척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어. 만약 내가 어떤 일을 잊어버린다면, 그건 내가 그 일을 겪어본 적이 없게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렇게 별의별 얘기를 다 하면 또 이야기가 딴 길로 샌다고 [조종사] 네가 뭐라 하는 건 아니겠지? 헤헷, 농담이야. 사실 난 그냥 나에 대한 이야기를 너한테 전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비록 내 기억 속에서는 이미 사라진 일들이지만, 비 온 뒤에 나는 새싹들처럼 여기저기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거든...
내가 「예비 조종사」 육성 계획에 참여했던 거 기억해? 전에 내가 어떤 실험에 참여한 적 있다고 말했었잖아. 근데 그거 알아? 그때 내가 참여했던 건 콜로서스의 의식과 연결하는 실험이었어. 아직도 기억나. 실험이 시작되기 전에 주변 사람들이 내게 보내던 간절한 시선이... 기대가 담긴 그 시선들 덕분에 난 일루미나의 영웅이 된 듯한 느낌을 미리 느껴볼 수 있었어. 하지만 내가 우쭐대던 그 순간 실험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라.

많은 일들이 다시 제 색깔을 찾아가기 시작했어... 노란색은 콜로서스 폭주, 빨간색은 실험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당황하던 모습... 그리고 모든 건 흰색으로 변했어. 병원의 흰색. 그 뒤는 회색이야. 희망이 사라져버린... 불꽃이 꺼져버린 사람들의 눈빛 말이야. 그 혼탁한 회색이 그 시절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선택할 수 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예전의 난 이 기억이 나한테 필요 없다고 느꼈을 거야. 심지어 나한테 상처를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잊기로 선택한 거겠지. 그럼 반대로 내가 이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도 이 기억이 내게 뭔가 영향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이건 사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
물론, 이런 건 [조종사] 너한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기억해? 우린 동료잖아. 그러니까 난 이 이야기를 너한테도 들려주고 싶었어. 그리고 과거에나 미래에나, 난 계속 나일 거라는 거, 믿어줬으면 좋겠어. 난 언제나 네가 아는 그 바이스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