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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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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 정권

사담 후세인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프로필
성명
사담 후세인 압드 알-마지드 알-티크리티

Saddam Hussein Abd al-Majid al-Tikriti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출생
1937년 4월 28일

이라크 왕국 알-아우자[1]
사망
2006년 12월 30일 (향년 69세)
이라크 바그다드
소속 정당
재임 기간
이라크 대통령
1979년 7월 16일 ~ 2003년 4월 9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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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후세인 압둘 마지드(알-마지드)
어머니 수브하 탈파
배우자
본처 사지다 탈파
사미라 샤반다르
애인 니달 알함다니
자녀
슬하 2남 3녀[2]
장남 우다이 후세인 (1964 - 2003)
차남 쿠사이 후세인 (1966 - 2003)
장녀 라가드 후세인
라나, 할라
친인척
종교
신체
186cm | 95kg[3]
이라크 수비대
군사 경력
복무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
1975년 ~ 1968년 ~ 1968년
최종 계급
총사령관
기타 이력
이라크 대통령

1. 들어가기 전에2. 개요3. 상세4. 일생5. 평가
5.1. 긍정적인 평가5.2. 부정적인 평가5.3. 총평
6. 비판
6.1. 바트 이라크 정부 관련 비판
6.1.1. 장기 독재와 공포정치6.1.2. 두자일 사법살인 주도6.1.3. 안팔 캠페인6.1.4. 걸프 전쟁 발발
6.2. "9.11은 신의 천벌" 막말 논란
7. 결론8. 여담
8.1. 의문의 1승
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1. 들어가기 전에 [편집]



이 문서가 다루는 대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대상의 모습은 천사와 악마처럼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ㄴ 빛은 경제 성장과 세속주의 성향, 어둠은 철권 통치 및 전쟁광이었단 점



이 문서의 대상은 공과 과가 너무나도 극명해 찬양하거나 까내리기만 하기에 애매한 고인입니다.

고인을 희화화하거나 비하해야 할지 너무 고민됩니다.




이 문서는 독재와 관련된 내용에 대하여 다룹니다.

??? : 참아야죠 뭐





"전쟁하자는 거냐"

이 문서는 전쟁 관련 내용, 혹은 유사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후세인는/은 사실 하페즈에게 깊은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
후세인는/은 누구보다 하페즈를 사랑하면서 왜 본심을 숨기는걸까?



이 문서는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영웅에 대해 다룹니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이라크 내전 이후 상대적 재평가



이 문서는 선녀에 대해 다룹니다!

미인은 꽃과 같아서 잎이 있어야 그 미가 살아나는 법입니다.
“다시 보니 선녀 같다!”



이 문서는 눈새에 대해 다룹니다!!!!

눈치 좀 챙겨라 씹새야



이 문서는 자식농사를 망친 대상에 대해 다룹니다.

병신 난자/정자 중 재수없게도 하나가 세상에 나와버렸습니다.



이라크은(는) 어떤 곳일까...

2. 개요 [편집]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나는 이라크 대통령이다.”
ㅡ 2005년 10월 19일 두자일 사건 첫 재판 인정신문에서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사담 후세인 압드 알-마지드 알-티크리티 (Saddam Hussein Abd al-Majid al-Tikriti, 1937년 4월 28일 ~ 2006년 12월 30일)이란, 과거 이라크를 23년 273일간 지배했던 독재자로, 소속 정당은 이라크 바트당이다.

이라크 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출신 인물[4]으로, 세속적 범아랍주의와 아랍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이라크 바트주의의 지도자였다.

21세기 들어 동네 힘쎈 그 나라에 의해 몰락했는데, 이후 2022년 현재까지도 이라크 뿐만 아니라 중동 내에서 평가가 갈리고 있으며, 한 쪽에서는 '범아랍주의의 지도자'로 칭송받는가 하면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바그다드의 도살자'로 평가가 갈리고 있다.

3. 상세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원래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정부의 부통령이었는데, 석유국유화를 철두철미하게 진행하고 고유가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사회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정비해서 한때 다 망해가던 이라크를 중상위권 국가로 끌어올린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러다 점차 권력욕에 취했는지 알-바크르를 병환 때문에 정치 못 한다 하면서 쫓아내고 지가 대통령 낼름낼름 받아 먹었다. 이후 그대로 타락해서 이란-이라크 전쟁걸프전을 일으켜 지가 한 업적을 그대로 까먹었으며, 끝내는 9.11 테러 직후 제대로 맛 간 미국을 도발하다 교수형대에 서게 된다. 다만 독재를 하면서도 무능하기만 한 건 아니었는데, 이슬람 극단주의를 잘 진압하고 이라크를 지역강국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비록 실패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이라크를 이란과 맞붙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시킨 것도 후세인의 공이다.

그리고 후세인이 몰락하자 그대로 이슬람 근본주의의 고삐가 풀리고 다에쉬란 막장 단체가 등장하며 이라크의 상황은 더 막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때문에 이라크 현지에서는 후세인 때가 나았다고 재평가 하는 여론도 꽤나 존재하는 상황.

간단히 말하면 현대 이라크를 만든 인물으로 평가할 만한 인물이다. 물론 사후 그 현대 이라크가 전부 작살났다는 건 안 비밀.

4. 일생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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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사담 후세인 정부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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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영향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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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 헬조선 하지만 여기에 갔다 오면 헬조선이 헤븐조선으로 보일 것입니다.

가지 마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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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은 꽃과 같아서 잎이 있어야 그 미가 살아나는 법입니다.
“다시 보니 선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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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무너지는 후세인 동상.
미국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바그다드의 이라크 대통령 궁
나름 소수파 애들 데리고 이라크 오랫동안 잘 틀어쥐고 있었는데 미국이 얘 목만 따고는 대책을 안세워서 이라크에선 매드 맥스 시대가 개막되었다.

아따 우덜 후세인 슨상님 계실 적엔 이런 일 없었는디...

훗날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후세인에 대한 정신 감정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편집증 증상 외에는 별다른 정신적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즉 나름대로의 신념 하나는 확실했던 셈. 다만 저 편집증 증상이 후세인 정권 중 여러 차례 드러난 적이 있긴 했는데, 대표적으로 바트당 대숙청 사건이나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에서 이런 편집증적 증세를 잘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에 후폭풍으로 ISIL[5]가 탄생하며 지옥이 펼쳐지게 되었다. 다행히 현재는 리더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트럼프에게 암살당하며 거의 몰락한 줄 알았으나.. ISIL의 아프간 지부인 호라산 이슬람 국가또다시 폭탄 테러를 일으키며 다시 한번 관심을 받고 있다.

한편 후세인의 측근들은 끝까지 체포 당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도주 행각을 이어가고 있는 후세인 정권의 2인자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를 제외하면 전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다만 재판 과정이 너무 정치 보복성이었단 점이 문제가 되었는데, 누리 알-말리키를 중심으로 하는 신 이라크 정부는 구 정부에 대한 정치 탄압에만 앞장섰다. 사베르 압델 알-두리술탄 하심 같은 유능한 관료들도 싸그리 학살 혐의를 씌워 감옥으로 보냈고, 후세인 등을 고문하기도 했으며, 특히 "케미컬 알리"로 유명했던 알리 하산 알-마지드바르잔 이브라힘 알-티크리티 등을 체포 직후 재빨리 사형이 집행시켜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부 친후세인 세력은 이라크 내의 반군이 되어 버렸는데, 대표적인 세력으로는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가 이끄는 나크슈반디 군대(일명 JRTN)가 있다. 이쪽은 아예 다에시와도 손을 잡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결별한 상황.

여담으로 사후 후세인의 무덤이 이라크 내전 속에 파괴되는 고인능욕까지 당했다. #

2022년 "외교 천재" 날리면 할배가 빈 살만 왕세자의 '카슈끄지 암살 사건' 논란에 대해 현직 국가원수 면책 특권을 인정해주기로 하면서 이쪽만 병신이 되부렀다. 바보 병신 후세인

2018년 기준으로도 수니파와 기독교도 등 이라크 내 소수 종교인들과 세속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후세인 시대를 그리워 하는 이라크인이 꽤 있다고 한다. 후세인 사후 오히려 더 막장이 되어버렸다고. #

5. 평가 [편집]

5.1. 긍정적인 평가 [편집]

  • 현대 이라크의 기틀을 닦음
  • 석유국유화를 통한 경제성장
  • 여성 인권 상승 및 명예 살인 금지
  • 이슬람 극단주의 탄압, 알-카에다 등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 공격
  • 학교 교육 지원, 문맹률 감소
  • 군비 확장
  • 비주류 종교 보호, 종교의 자유 보장
  • 타 독재자들과 달리 끝까지 본인의 소신을 밝히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함.

5.2. 부정적인 평가 [편집]

  •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 등의 과도한 전쟁 및 전력 낭비 : 물론 두 전쟁 다 이해가 안 가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후세인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건 사실이며, 특히 걸프전은 후세인의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힌다.
  • 20여년의 철권 정치
  • 쿠르드족과 시아파 탄압, 두자일 학살 등의 학살 논란

5.3. 총평 [편집]

<<MISS ME YET?>>

이라크 어디엔가에 붙어있을 광고판...
“내가 그립지 않니?”
그가 이라크 정치 전반에 등장한 건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정권 시기 부통령으로 임명되면서였다. 당시 그는 석유국유화를 주도면밀하게 시행하고 유가 부양에도 앞장서서 고유가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사회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정비시켜서, 쿠데타와 잦은 내부 분란으로 바람 잘날없었던 이라크의 정국을 안정시켜 이라크의 1인당 국민소득을 중상위권 국가로까지 성장시킨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사실상 현대 이라크를 완성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러나 대통령 취임 후에는 과거와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는데, 바트당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20여년간의 철권 정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완성한 이라크를 다시 작살내고야 말았다. 그나마 초반에는 안정적인 통치를 했으나 단추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그는 이란 혁명을 일으킨 이란의 이슬람주의자들을 경계하며 사우디 등 주변 반이란 국들에게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빚만 잔뜩 남기고 말았으며, 이 덕에 이란의 영향력만 커졌다는 걸 감안하면 사실상 패배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에서 사우디, 쿠웨이트 등 과거의 지원국들은 빚을 갚으라며 안 그래도 이란과의 전쟁으로 작살나 있던 이라크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쿠웨이트를 침공한다는 최악의 수를 두면서 전세계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이후에는 다시 이라크 복구에 힘쓰며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을 도발하는 또다시 최악의 수를 두게 되면서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의 20여년 간의 통치 간 아예 장점이 없던 건 아니었는데, 알-카에다를 공격하고 이슬람주의자들을 탄압하며 제정 분리를 분명히 했고, 학교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문맹률을 줄였으며, 여성 인권 향상에도 앞장서며 명예 살인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6] 또한 아랍사회주의에 따라 타 종교 신자들도 적극적으로 보호해줬다. 당장 후세인의 최측근이었던 타리크 아지즈도 기독교인이었다. 이 때문에 이라크 내의 다수 기독교인들이나 집시들은 아직까지도 후세인을 그리워 하고 있는 상황. # 물론 쿠르드족이나 시아파는 얄짤 없이 탄압하긴 했다.

이라크 전쟁 이후에는 ISIL를 중심으로 한 내전 정국에 이라크 시아파 정권 + 미국 지도층의 무능까지 겹치면서 후세인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수니파들 사이에서 다시 스멀스멀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저런 놈들을 나름대로 ㅅㅌㅊ의 통치력으로 잘 통제해온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특히나 시아파 정권의 성급한 후세인 처형이 이런 기조를 앞당겼으며, 처형 당시 그의 소신 있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더 불을 지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담담하게 유언을 남기고 용수를 거부하는 등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본인 나름대로의 철학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 결과 후세인은 공과를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채 수니파 진영에서는 순교자가, 시아파 진영에서는 악마가 되어버렸다.

6. 비판 [편집]

6.1. 바트 이라크 정부 관련 비판 [편집]

6.1.1. 장기 독재와 공포정치 [편집]

"비밀경찰 한 명이 내 살을 먹겠다며 손을 물어 뜯었다. 귀에 전기선을 연결해 전기고문을 했다. 담뱃불로 지지고 차마 다 얘기할 수 없다. 특히 콜라병에 앉게 하는 고문이 횡행했다. 이 고문을 받던 전직 경찰 간부 한 명은 항문이 터져 울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 쳤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다. 지금 우리는 수백만 건의 처형기록과 고문기록을 확보하고 있다."

INA 당원이자 이라크인권협의회 의장인 사타르 알-바이르의 증언
후세인 정부, 특히 1980년대의 후세인은 극도의 공포정치를 시행했는데, 내각 관료들은 그와 차를 마실 때에 절대로 먼저 차를 마셔서는 안 되었고, 그가 말하기 전에는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안 되었으며, 항상 정자세로 경청을 해야만 했으며, 나갈 때에는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로 나가야만 했다. 심지어 국회 연설 중 한 의원이 동료 의원에게 쪽지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서, 음모를 꾸민다며 즉석에서 그 의원을 총으로 사살해버렸다. 그러자 국회는 한순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겁에 질린 의원들의 두려움 섞인 박수소리가 이어지자, 후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설을 계속했다고 한다.

1979년에 살해된 의원들만 60명이었고, 집권 이후 3,000명 이상의 정치가들이 처형당했다. 후세인의 이복동생인 바르잔 이브라힘 알-티크리티 또한 후세인 카멜 알-마지드에게 밀려서 숙청되었다. 원래 후세인의 어머니 수브하 탈파는 바르잔의 아들과 후세인의 딸을 결혼시켜 집안을 결집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후세인은 어머니의 유언을 씹고 자신의 딸을 후세인 카멜과 결혼시킨 다음에, 바르잔의 권력을 빼앗고 이라크에서 추방했다. 근데 후세인 카멜도 후세인의 아들들의 음모로 숙청된 건 덤.

또한 대놓고 자신의 정부에게 지지를 표하지 않는 모든 집회를 법적으로 금지시켰고, 출국도 대놓고 막진 않았으나 국내의 도로와 고속도로에 경찰 검문소를 채워넣거나 출국 비자를 값비싸게 만드는 식으로 막았고, 특히 이라크 여성은 남성 친척의 호위 없이는 해외 여행이 불가능했다. 물론 우상화도 착착 진행해 이라크 전역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고 관공서나 집집마다 자신의 사진을 걸도록 강요했으며 만약 사진을 걸지 않으면 반체제로 간주해 처벌했다.

6.1.2. 두자일 사법살인 주도 [편집]

1982년 7월 8일, 후세인은 바그다드로부터 53km 정도 떨어진 두자일(Dujail)이란 마을을 방문했다가 바그다드로 돌아가던 도중 총을 든 무장 괴한들에 의해 경호원 2명이 죽고 본인도 암살될 뻔한 일이 발생하자, 후세인은 암살범들의 매복을 막기 위해 발라드 지역에서 두자일로 가는 길 양쪽에 있는 과수원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그뿐만 아니라 두자일 마을 주민 상당수를 죽였다는 것. 당시 후세인은 마을 주민 787명을 체포하고 이 중 암살에 가담했다고 판단된 148명을 '혁명 재판소'에 보내 약식재판을 거치게 했다. 1984년 5월 말에는 전쟁이란에 대한 무장 지원을 제공한 반역죄에 대한 유죄도 인정하며 1984년 6월 14일에 이들 전원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는데, 이 사형수들 중 무려 96명이 1985년 3월 23일 단 하루 만에 모두 처형당했다.

이 역대급 사법살인은 훗날 후세인이 처형당하는 주요 근거로 이용당했다. 또한 이 사건은 후세인의 편집증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1.3. 안팔 캠페인 [편집]

1988년 2월부터 9일까지 이라크 정부는 '쿠르드 반군 그룹을 제거하고 키르쿠크 주의 전략적 부분을 아랍화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안팔 캠페인'을 선포하며 쿠르드족 마을 40여곳에 화학무기를 살포했다.

이 화학전에 후세인의 사촌이자 바트당 이라크 북부 사무총장이었던 알리 하산 알-마지드가 개입하며 '케미컬 알리'란 별명을 얻게 된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1993년에 휴먼라이츠워치는 '5만 명 미만일 수 없으며 그 2배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으며, 1995년에 안팔 피해자 권리 수호 위원회는 63,000명이 실종되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며 전체 사망자 수는 7만 명 미만이라고 추정했다. 게다가 수만 명의 여성, 어린이, 노인들마저 수개월 동안 감금되었고, 거의 2천 개에 달하는 마을이 파괴되었다.

6.1.4. 걸프 전쟁 발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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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라크 전쟁 직후 바트 이라크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변국들한테 큰 빚을 지게 되는데, 종전 이후 쿠웨이트를 비롯한 다수 아랍 국가들은 이라크에게 빚을 갚으라며 압박에 나섰고, 특히 쿠웨이트는 전쟁 후반부부터는 내정 간섭에 돌입했다.

이에 후세인은 고갈된 재정을 매꾸기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하며 쿠웨이트의 풍부한 석유를 차지하고자 했다. 또한 쿠웨이트를 이라크로 병합할 시, 이라크의 지리적 약점인 좁은 해안선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이라크인들은 영국이 식민지 시절 자신들의 영토인 쿠웨이트를 떼어냈다고 믿었다.

걸프 전쟁 개시 이틀만에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쉽게 점령했지만, UN은 침공을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이라크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한다. 후세인이 이를 무시하자 미국을 주축으로 35개국이 참가한 다국적군이 세계 4위 규모였던 이라크군을 무참히 패퇴시킨다. 이라크는 결국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고 UN의 엄격한 제재를 받아 경제가 붕괴된다.

후세인의 철권 통치가 패전으로 흔들리자 곧바로 이라크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걸프전 종식 다음날인 3월 1일 바스라에서 귀환하던 군인들이 후세인의 초상화를 포격한 것을 시작으로 시아파가 주로 거주하던 남부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관공서와 교도소, 바트당 지부가 공격당한다. 탈영병, 이슬람주의자, 공산주의자, 일부 수니파, 바트당내 반 후세인 세력까지 참여하면서 대부분의 도시들이 장악되지만 이들은 후세인 타도 외에는 공동의 목적도 전략도 없었다. 북부 지방에서는 3월 5일 쿠르드족도 "이라크에는 민주주의, 쿠르드족에는 자치"라는 구호로 반란을 일으켜 모술을 제외하고 모든 주요 도시들을 전투도 없이 장악한다. 이들도 이념에 따라 여러 정파로 나누어져 있긴 했지만 남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었고 목표도 명확했다.

반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18개 주들 중 14개가 반란군 손에 넘어갔지만 후세인은 곧 반격에 나선다. 수도 바그다드는 반체제 세력의 기반이 약했기에 시아파가 거주하는 빈민가 사담시티에서 쉽게 제압된 봉기를 제외하면 정부가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친위대인 특수 공화국 수비대는 여전히 후세인에 충성하고 있는데다 반란군의 주축인 이라크군 탈영병들보다 무장이 잘 되어 있었다. 특히 고정 익기를 금지한 종전협정에서 미국이 전후 복구를 위해 헬리콥터 사용을 허가한 것을 악용했다. 파괴된 도로를 대신한 교통 수단으로 헬리콥터 허락을 받았지만 반란군 점령 도시에서 무차별적 사살하는데 이용했다. 3월 말에는 도시 지역은 모두 정부군이 재장악한다. 후세인은 또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물을 돌려 반란의 중심이라고 여긴 하구의 늪지대를 파괴해 늪에 의존해 살던 주민들을 환경난민으로 만든다. 1994년에는 늪지대의 57%가 사라졌다. 미국이 남부를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자 후세인은 미사일로 1994년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북부는 산지에서 전투가 이어지다 4월 미국이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10월까지 전투가 이어진 끝에 양측의 협정으로 쿠르드족 자치 지역이 형성된다.

후세인은 정권을 유지했지만 그 대가는 컸다. 18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25,000명에서 180,000까지 대부분 민간인인 인원이 사망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정권 붕괴 후 집단 무덤에서 발견된다. 독가스와 늪지 파괴로 인한 피해도 컸다.

6.2. "9.11은 신의 천벌" 막말 논란 [편집]

2001년, 오사마 빈 라덴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를 들이받는 테러를 저지르며 보복대상을 찾고 있던 미국에게, 후세인은 "신의 천벌을 받았구나."라고 조롱하는 역대급 패착을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후세인 본인도 아차 싶었던지, "우리 이라크도 테러로 고생하는데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물밑접촉을 시도했지만 이미 상황은 흘러갈 대로 흘러갔고, 미국 정부는 후세인과 이슬람 극단주의를 엮는 선동을 통해 후세인=빈 라덴이란 공식을 완성하고 결국 2003년 미군이 전면적으로 침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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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론 [편집]

8. 여담 [편집]

  • 정말로 무지성 대량학살무기를 만들고 있었나?
    ㄴ 단지 전쟁 명분일 뿐이고 대량학살무기, 즉 핵은 있지도 않았음
    물론 화학 무기는 가득했지만
    ㄴㄴ 화학무기도 ABC 무기 아님?
    ㄴㄴㄴ 저거 잘못 썼었노. ABC 무기 말고 핵 없다 하려고 했는데 ABC 무기야 꽤 많이 있었고. 그리고 그런 화학 무기들이 있던 건 전쟁 이전에도 기정 사실이었고 그런 무기들을 지원해준 건 다름 아닌 미국이었음.
  • 사자나 여러 동물들을 애완동물로 키웠다. 그리고, 후세인 몰락과 같이 이 동물들은 총살당하거나 동물원으로 끌려가 굶어죽는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 이라크 전쟁 당시 그의 현상금은 자그마치 한화로 250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돼서 아무도 250억을 받지 못했다.
  • 장남은 우다이 후세인이라는 놈인데, 아이큐는 190에 대학교 성적을 올만점을 받을 정도로 천재이기는 하다. 문제는 인간성이 심히 딸려서 그렇지. 한창 잘 파티를 하는데 뭐가 그리도 꼴받는지 갑자기 아버지의 측근을 곤봉으로 쳐죽여버렸다. 그리고 지네 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을 무슨 브이독아인 줄 알고 있는지 경기에서 졌다고 선수들을 잡아다 콘크리트 공으로 축구 시합을 시키거나 마치 베어너클의 일렉트라 마냥 전기 채찍으로 때려서 인간을 맛이 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토우에 맞아서 죽었다.
  • 이집트의 모하메드 비스흐르는 사담 후세인과 닮아서 화제가 됐는데, 몇몇 단체들은 후세인의 성생활을 그린 야동에 출연시키기 위해 납치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
  • 집권 기간 내내 콧수염과 이라크 군복 차림으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사실 후세인은 이라크군에서 복무한 적이 없다. 걍 이미지 메이킹용. 다만 그와는 별개로 이라크군에 대한 군비 확장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 집권 기간 동안 주요 지지층은 티크리트를 비롯한 이라크 북부 수니파 지역 주민들이었다. 주요 지지층 자체는 이라크 내 소수 수니파 세력이었으나, 기독교인들과 집시들도 다수 후세인을 지지했다고. 특히 후세인에게 거의 우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대접을 받은 집시들은 이라크 전쟁 시기, 군대까지 꾸려 반 후세인 연대에 맞섰고, 이들은 2023년 현재까지도 후세인을 그리워 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후세인 사후 후세인을 지지하던 이라크 북부 지역은 이라크 신정부가 들어서자 급격히 반정부 성향으로 고개를 틀었는데, 거기다 누리 알-말리키의 종파주의적 정책까지 더해지며 신정부에 대한 반감은 더해졌다. 그 사이 후세인이 그렇게 경계하던 이슬람 극단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며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주변에서 등장한 것이 ISIL. 이 ISIL이 이라크 중북부 지역 대다수를 먹게 되며 2014 이라크 내전이 발발했고, 그 결과 누리 알-말리키 총리가 사퇴하고 이라크 정부는 ISIL과의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다.
  • 같은 바트주의 지도자였던 하페즈 알-아사드와는 떨떠름한 관계였는데, 서로에 대해 과한 적대감을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위협으로 봤다. 과거 알-바크르가 후세인을 견제하기 위해 바트당을 통합시키고 하페즈를 끌어들여서 후세인의 영향력을 줄이려 한 적 있는데, 후세인은 바르크의 이런 의도를 알고 반대 입장을 표했고, 하페즈 역시도 통합 이후 시리아가 이라크의 영향력 안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 반대 입장을 표했다. 이후로는 서로를 서로에 대한 위협으로 본 듯. 실제로 하페즈는 후세인이 벌인 이란-이라크 전쟁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 모두 반 후세인 편을 들었다. 다만 후세인이 미국에 의해 제대로 억까를 당하고 사형당하자 시리아 내에서 동정 여론이 들끓긴 했다.

8.1. 의문의 1승 [편집]

??? : 훠훠...

솔직히 이 재앙 새끼는 후세인 말고 말리키한테 비비는 게 맞긴 하다. 후세인은 유능하기라도 했지, 말리키 문재앙 이 두 재앙 새끼는 정치 보복 말고 뭐 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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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우디-이란 관계 회복 선언 (2023)
관련 문서
[1] 본래는 티크리트에서 8km 정도 떨어진 알-아우자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러나 알-아우자 마을 자체가 워낙 깡촌이고 치안이 불안정한 동네여서 후세인은 티크리트라 고향을 속였으나, 워낙 티크리트와 가까운 동네긴 해서 티크리트 사람들한테도 동향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특히나 후세인 정부의 주요 지지층 중 하나가 티크리트 주민들이었다.[2] 이들은 본처인 사지다 탈파의 자녀들이고 이 외에 몇 명의 사생아들이 있다.[3] https://www.howtallis.org/saddam-hussein-height-weight-shoe-size/[4] 사실 전세계적으로 가보면 수니파가 절대 다수긴 하다. 이라크가 특이한 케이스.[5] 정식명칭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6] 물론 '그 돼지'들 덕에 꺼림직하게 느껴질 수는 있으나, 이 동네는 ㄹㅇ로 여성 인권이 막장인 동네다. 이런 막장에서 이슬람주의를 탄압하고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한 건 분명히 공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